그는 개정판에 새로 더한 것들 중, 첫 Chapter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액션을 취한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십자가’이다. ‘대속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道)이다(고전1:18).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속죄의 유일한 근거는 ‘피’다(레 17:11).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가’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것이다."(개정판, p. 28)

그러나 김성로는 계속되는 글에서 당연히 ‘십자가’를 언급해야 할 자리에 ‘십자가’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다음 장에서 ‘십자가’ 자리에 ‘부활’을 이식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음을 보라!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로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가 아닌 영원하고도 완전한 속죄 제사가 성취되었다!" (개정판, p. 29)

위에서 적어도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죽으심)를 통해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가 아닌 영원하고도 완전한 속죄 제사가 성취되었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또는 십자가를 통해’라고 말함으로써 반드시 ‘십자가’를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 후의 진술에서도 피, 속죄 제사, 영원한 속죄 등을 언급하면서도 끝내 ‘십자가’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런 그의 태도는 “하나님의 핏 값으로 산 교회”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요16:9)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Lord)으로 믿을 때 예수님과 한 생명으로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 거듭나는 것이다(엡3:6)”(개정판, p. 78)

그는 여기서 거듭남의 조건으로 ‘회개’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믿음’을 제시한다. 거듭남의 역사에서 가정 중요한 ‘십자가’는 어디에도 없다. 김성로에게 복음의 핵심은 사실상 “회개와 부활”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근원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반드시 선포해야 하는 복음이다."(개정판, p. 45)

"지금 이 시대는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를 세운 원형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죄 사함을 얻게 히는 회개’가 가려졌다는 뜻이다."(개정판, p. 47)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 회개가 사라진 이 시대에 다시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죄에 대한 회개가 선포될 때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오늘날 모든 한국 교회에 동일하게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개정판, p. 49)

이렇게 그는 복음에서 반드시 선포해야 하는 ‘십자가’를 빼버린다. 왜 그는 ‘십자가’를 언급하는 일에 이렇게도 인색할까?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십자가’가 각인되지 않아야, 그의 부활복음 진술을 통해, 추종자들의 마음에 ‘십자가’가 있을 자리에 ‘십자가’를 제거하고 ‘부활’을 좀 더 쉽게 이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롭게 더한 두 개의 Chapter에서 더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폄훼한다.

김성로는 앞장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다”에서 은밀하게 의도해 놓은 대로, “부활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자!”를 시작하면서 바로 ‘부활’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는 이 장 서두에서 “초대교회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개정판, p. 32)라고 단언함으로써, 바로 앞 장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가’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것이다”(개정판, p. 28)를 뒤집어 버린다. 그리고 끝부분에 와서 그는 다시 “부활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사건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다”라는 애매한 말로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액션을 취한다.

그럼에도 이 애매한 말이 결국 십자가를 폄훼하려는 목적임을, 바로 뒤에 언급된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을 구분하는 반쪽짜리 복음은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개정판, p. 28)에서 분명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이 진술은 ‘십자가’와 ‘부활’이 합쳐져야 완전한 복음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십자가’에 ‘율법’을 더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성로는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처럼 ‘십자가’만으로는 모자란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김성로는 자신의 ‘부활교’를 흥왕시키기 위해서 교묘한 말장난으로 서슴지 않고 성경을 왜곡한다. 예를 들면, 처음에 말한 ‘하나님만 전능하시다’를 적당한 상황이 되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또는 ‘하나님도 전능하시다’ 등으로 살짝만 왜곡시켜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나님의 전능성을 교묘하게 부인한다. 그의 성경 왜곡과 속임수 솜씨는 이단 전문가마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매우 교묘하고 정교하다(그의 투박한 겉모습과 말투 때문에 그의 속임수의 효과는 더욱 증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속임수는 새롭게 더한 “사도행전 2장의 회개와 굴복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행된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다(롬1:4)....(중략) 왜냐하면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개정판, p. 36)

그는 롬1:4으로, 다시 한 번 ‘부활’이 복음의 핵심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롬1:4의 오역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진리가 아닌,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부활의 주를 만난 제자들이 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김성로의 상상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신 아들 예수를 원래의 자리로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필자는 부활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십자가의 기적에 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이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기적 축에도 낄 수 없는,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부활)에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세상 끝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 외에, 죄로부터의 구속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 왜냐하면 죄로부터의 구속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만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김성로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려면, 구약성경이 계시하는 메시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성경대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을, 특히 그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바르게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연적이다. 만약 김성로의 상상대로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대신에, 바로 부활한 자신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며, 도마에게도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또 김성로는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을 때 변했다’는 일반적인 이해를 애써 부인하면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나 후에 예수께 한 말을 살펴보면 억지 주장임이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함이 이때니이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다(행1:6).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께 물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아직 영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십자가 때문에 인간적으로 기죽었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인간적인 기가 다시 살아난 변화는 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김성로는 개정판에서 새롭게 더한 3개의 Chapter에서, 첫 Chapter에서는 ‘십자가’를 복음의 핵심으로 여기는 것처럼 액션을 취하다가 다음 두 Chapter에서 결국 부활로 올인하므로 결과적으로 십자가를 폄훼하는 그의 무서운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는 여기서 성경을 왜곡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인 ‘십자가’와 ‘십자가’를 알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자신의 부활교의 핵심 교리인 ‘부활’로 대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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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