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이후정 교수(기감 신학정책위원회 분과위원장)

이전에 제가 웨슬리의 신학에 관해 <바른믿음>에 올린 몇 편의 글들로 인해 마음의 아픔을 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합니다. 또한 그 일로 마음이 상하여 조금 과민한 대응과 행동이 나오고 있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후정 교수님이 쓰신 “정이철 목사의 문제에 대한 답글”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는 부분을 보았습니다.

“최근에 정이철 목사는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오류가 없었던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한 오늘의 교회에서 웨슬리가 종교개혁 정신에 충실했는가를 의문시하며, 심지어 이단이라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하는데 이르렀다. 이에 웨슬리안 계통 교회들인 감리교회, 성결교회, 나사렛 성결교회, 구세군 등의 신학과 교리를 크게 오해하고 훼손하는 잘못된 주장을 함으로, 답변할 요구를 가진다.”(감신대 이후정 교수, “정이철 목사의 문제에 대한 답글”)

제가 썼던 글이 저의 의도보다 더 많이 감리교 목회자님들과 성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렸던 것 같아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단 한 번도 웨슬리나 감리교회를 ‘이단’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 글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그러면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웨슬리가 한 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믿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 결코 죄인의 그 무슨 행위로도 발생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낯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칭의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을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 인해 칭의와 구원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의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웨슬리가 강력하게 가르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는 그런 말 못 들었다.

웨슬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와 삶의 열매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혹시 이 내용은 와전된 것일까?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영원한 칭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는데, 우리가 웨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삶의 변화, 즉 믿음의 선한 열매를 칭의 유지와 구원 지속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큰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감리교가 정통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고, 맞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것이다. 말은 바르게 해야하지 않을까?”(정이철 목사,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오류가 없었던 것인가?”)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나, 구원 이후의 신앙의 행위에 의해 구원이 완성되기도 하고 또한 구원이 사라져 다시 지옥의 형벌을 받게되기도 한다고 가르치는 행위구원론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반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사상은 결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일 수가 없고, 그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에 힘쓸지라도 성경적 신앙인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경로로 웨슬리의 구원론이 행위구원론이라고 배웠고, 또한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웨슬리안 목회자들의 주장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웨슬리나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웨슬리의 신학적 이단성'이라고 표현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따라 곧 '신학적인 오류'로 바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문제 제기의 핵심 문단을 이곳에 옮겨보겠습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삶의 변화, 즉 믿음의 선한 열매를 칭의 유지와 구원 지속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큰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정이철 목사,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오류가 없었던 것인가?”)

제가 이러한 글로 웨슬리의 구원론이 과연 종교개혁 신앙과 일치하는 내용인지 곧개적으로 질문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등의 웨슬리안 목회자들이 빈번하게 다음과 말하는 것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다시 믿음이 떨어지면, 다시 타락하여 죄에 빠지면, 다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망가지면, 다시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삶이 이전으로 돌아가서 성화가 중단되면 구원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말이 감리교회와 여러 웨슬리안 교단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빈번하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고 매우 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웨슬리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웨슬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믿는 것 외에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친 증거가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웨슬리 신학을 전공한 몇 분이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완전하게 구원얻는다고 가르쳤다는 증거를 보라면서 논문등의 자료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속에도 웨슬리가 행위구원론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웨슬리에게)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교회의 Gregory of Nyssa와 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 교회의 Augustine의 영향과 함께 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영향으로 성화의 완성(Perfection 혹은 entire sanctification)이 죽기 전에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인간 구원이 완성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로 구원이 완성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방교회나 웨슬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의 개념이다.”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으로부터 믿음으로 구원받되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날 때 풍성한 구원,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을 배운다.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믿음으로 되지만,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은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웨슬리는 동방교회적이다.”

“웨슬리는 루터나 칼빈의 노예의지론의 한계를 또한 넘어선다. 하나님만이 홀로 구원을 완성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더불어 구원을 완성해 간다는 신인협조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의 선한 본성에 의해 선행의 노력으로 구원을 출발할 때 은총이 다가온다는 펠라기우스주의나 반 펠라기우스주의의 신인협조설과는 다른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강조한다. 곧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다가올 때 인간이 응답하고 동참함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행함으로 성취됨을 주장한다. 구원의 출발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선행으로 되어진다고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종합하였고, 종교개혁의 신앙과(의인화) 로마 가톨릭의 선행(성화)을 종합하였다. 까닭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적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았다.”

“루터, 칼빈과 달리 웨슬리는 칭의에서 용서받은 죄를 ‘과거의 죄’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할 것(요일 1:9)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눅 3:8)을 강조했다.”

“웨슬리가 죄 용서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고 말씀한다. 또 베드로도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라고 말씀한다.”

저는 솔직히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웨슬리가 행위구원사상을 가르친 것이 아니냐? 하고 질문했더니, 일부의 웨슬리안 신자들과 목회자들은 "다시 믿음이 떨어지면, 구원을 잃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반응했습니다. 또 다른 다수의 목회자들은 "웨슬리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강하게 반박하였으나, 정작 증거라고 제시하는 논문 등의 자료들 속에 웨슬리가 행위구원 사상을 가르쳤다고 의심되는 내용들이 다수 나타났습니다.

웨슬리의 구원론이 행위구원론과 무관하다고 선명하게 선을 긋고 깔끔하게 설명하는 한국 감신대의 두 분의 신학자를 최근에 보았는데, 한 분은 임성모 박사님이시고 또 한 분은 이후정 박사님이십니다. 

“웨슬리의 성령론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성화에 대한 강조이다. 성화는 구원의 여부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지만 구원받는 신자가 필연적으로 맺는 열매다”(감신대 임성모 교수, “웨슬리 관점에서 신사도 운동 비판”)

“그러나 그는(웨슬리)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좀 더 중도적, 포괄주의적 입장에 충실하게 믿음과 함께 믿음의 결과로서의 선행과 사랑의 열매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행위는 결코 칭의에 있어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이처럼 칭의에 있어서의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확고한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을 이어받은 감리교회의 중요한 유산이다.”(감신대 이후정 교수, 정이철 목사 문제에 대한 답변)

임성모 박사님의 성화가 신자의 구원의 여부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으며, 성화는 이미 구원받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열매라고 설명하는 내용, 그리고 이후정 박사님의 신자의 행위가 칭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선명한 신학적 진술은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왜 다른 웨슬리안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두 분처럼 바르게 말하지 않을까요? 웨슬리는 신학자 성향이 강했던 칼빈이나 루터와 달리 부흥사였고 전도자였으므로 그의 가르침이 나타나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는 것일까요? 

행위구원사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피 제사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가 우리에게 칭의를 주고 구원을 얻게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우리의 영원한 칭의와 구원을 이미 보장하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셨고, 그리스도를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칭의와 구원을 주셨습니다. 성화. 회개, 삶의 변화를 칭의와 구원의 조건으로 달면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의 구원을 얻는 신자에게서는 성령의 새롭게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삶의 변화와 성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성경의 진리입니다. 만일 교회에 다니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나는 성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구원을 얻었다가 잃는 사람이 아니고 처음부터 구원을 얻은 적이 없는 사람, 즉 처음부터 진정한 믿음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번 소동으로 불편을 당한 분들이 많으시지만, 감신대의 임성모 교수님과 이후정 교수님이 이 진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셨으니,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신앙 행위와 회개의 정도에 따라 다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웨슬리가 가르쳤다고 말하는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저로 인해 마음이 아픈 분들이 많이 계셨고, 또한 저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보람을 느낌입니다. 다시 한번 저의 도발적인 글로 인하여 마음의 불편을 당하신 많은 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별도로 보내주신 질의서에 대해서 곧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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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