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는 최근 모 일간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국민일보/2017. 7. 10). 이것은 그의 책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제1판에서 “사도행전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제1판, p. 16)라고 주장한 것과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 “지금”이라는 수식어를 씀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독자들로 하여금 부활해서 지금까지 살아계신 예수님만 의식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다.

김성로가 이렇게 살아계신 예수님, 즉 부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믿음 안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부활복음’에는 혹 김성로가 만들어낸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없다. 이것이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김성로의 ‘부활복음’을 비판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최근에 김성로는 <기진협>과 <바른믿음>의 변명할 수 없는 바른 성경적 비판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비판했던 부분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개정판에서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든다면,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개정판에서는 제1판에 언급된 ‘죽은 예수가 아니라’를 빼고 “사도행전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개정판, p. 16)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활복음’의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이단 시비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고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지 자신의 ‘부활복음’을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김성로는 개정판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를 빼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의 핵심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은 예수가 아니라’를 빼버렸다 하더라도 ‘십자가’가 부활복음의 핵심이 아닌 것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여자가 그의 아들에게 “우리 집의 가장은 너의 아버지가 아니라, 뒷집 아저씨야!”라고 했다가, 남편이 두려워서 “너의 아버지가 아니야”를 빼고, 다시 “우리 집의 가장은 이웃 집 아저씨야!”라고 수정해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너의 아버지가 아니라’를 빼버렸다 하더라도 ‘우리 집 가장이 이웃 집 아저씨’인 것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김성로는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집중적으로 비판한, 그러나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메시지인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를 개정판에서는 빼버리는 비장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삭제하고 바꾼 표현들은 이리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발톱을 잠시 숨긴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김성로는 지금 “눈 가리고 아웅”(姑息之計/당장의 편한 것만을 찾는 일시적인 계책)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성로의 ‘부활복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리와 같은 거짓 복음이다. 그러므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를 뺀다고 할지라도, 이리가 아무리 발톱을 숨겨도 이리인 것처럼, 거짓 복음인 ‘부활복음’이 참 복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정판에서 수정한 것들

필자가 김성로의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매 페이지마다 성경 왜곡과 거짓된 속임수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이 책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적어도 이 책의 몇 배 이상의 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우선 책 전체에서 원론적인 것들만 추려서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각 장들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비판할 생각이다).

그러면 먼저 제1판에 비해 개정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부터 살펴보자.

1>
“사도행전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제1판, p. 16)

“사도행전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개정판, p. 16)
 

2>
“부활은 약화되고 십자가에 머물러 있는 신앙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제1판, p. 20)

“부활이 약화되어 있는 신앙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개정판, p. 20. 이 경우에도 [들어가는 말]에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상으로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3>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제시를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흠 없는 자신의 피로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영원한 제사(히10:12)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히 9:12)를 단번에 이루셨다”(제1판, pp. 26, 27)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제시를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의 모든 죄를 위해 흠 없는 자신의 피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히10:12)를 드리심으 로 영원한 속죄(히9:12)를 단번에 이루셨다”(개정판, p. 26)

여기서도 김성로의 신학적 무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히브리서의 “하늘나라 참 성막”은 “십자가”의 본질적인 정체를 묘사한 것으로서, “하늘나라 참 성막”과 “십자가”는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굳이 수정할 필요가 없다(김성로는 그동안 ‘하늘나라 참 성막’과 ‘십자가’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고, 부활해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올라가서 영원한 제사를 드려야 구속이 완성되는 것으로, 즉 부활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써 ‘부활’이 ‘십자가’보다 우월함을 주장했다. 사실상 이것이 김성로의 ‘부활복음의’ 핵심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김성로의 부활복음에 환호했고, 이인규도 여기에 박수를 쳤다). 그런데도 김성로는 개정판에서 ‘이중제사’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하늘나라 참 성막’을 ‘십자가’로 수정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김성로는 히브리서의 ‘하늘나라 참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4>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열쇠는 바로 ‘부활’이었다. 로 마서 1장 4절 말씀 그대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선포된 것이다. 부활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제1판, p. 98)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열쇠는 바로 ‘부활’이었다. 로 마서 1장 4절 말씀 그대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 님이시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빌립보서2:6,7). 그것이 부활을 통하여 능력으로 선포된 것이다 (로마서1:4). 따라서 부활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개정판, p. 104)

김성로가 새로운 설명을 개정판에 삽입한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보다 부활하신 예수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롬1:4을 인용해 잘못 설명한 내용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함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삽입한 내용의 끝에 “그것이 부활을 통하여 능력으로 선포된 것이다(로마서1:4).”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원래의 주장으로 회귀한다.


5>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수 없다 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 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 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 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는 말씀같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제1판, p. 187)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수 없다 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는 말씀같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 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개정판, p. 205)

그는 ‘이중 제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개정판에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를 빼버렸지만, ‘부활이 구속사역의 완성’이라는 사상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김성로가 빼버린 부분(반드시 부활해서 하늘성소에서의 영원한 제사를 드려야 구속이 완성된다)을 집중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그의 ‘부활복음’에서 그 부분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복음’ 전체가 잘못된 거짓 복음임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김성로가 <기진협>과 <바른믿음>의 ‘이중제사’ 비판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부활복음 전체를 폐기처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기진협>과 <바른믿음>의 비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한 부분만 슬쩍 감추는 얄팍한 ‘고식지계’의 수법으로 여전히 자신의 ‘부활복음’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그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이 고안한 ‘하늘 성소의 이중 제사’를 인류 최초로 발견한 진리인양 자랑스럽게 외쳐댐으로 부활복음의 우월성을 강조해왔는데, 이것을 빼고도 ‘부활복음’ 장사가 잘 될지 의문이다. 아마도 김성로는 이 부분을 뺀다고 해도, 이미 ‘부활복음’에 세뇌된 신자들은 변함없이 자신의 ‘부활복음’을 추종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신자들의 동요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김성로는 끝까지 ‘하늘 성소의 이중 제사’를 ‘부활복음’의 핵심 진리로 주장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김성로가 ‘부활 후 하늘 성막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구속이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가장 힘주어 외쳐온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성로가 그동안 그렇게 강조해 왔던 초대교회와 동일한 성령의 역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동안 성령은 김성로의 ‘하늘 성소의 이중 제사’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계속 그의 설교와 목회에서 역사하셨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리 없다.

그렇다! 김성로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다른 역사이다. 그는 결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적인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거짓 복음인 부활복음으로 설교하며 목회해 왔어도, 그의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았으므로 성령이 탄식하며 그를 말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5>
“연합의 비밀은 나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였다”(제1판, pp.53-58)는 개정판에 빠져 있다. 그리고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다”(개정판, p. 28)
“부활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자”(개정판, p. 32)
“사도행전 2장의 회개와 굴복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개정판, p. 36) 개정판, p. 36)
“기도로 생명보다 더 귀한 사명을 감당하라”(개정판, p. 144)
“영원한 상”(개정판, p. 148)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개정판 ‘Chapter 1’에 연속적으로 새롭게 더한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다”와 “부활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회개와 굴복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이다. 그는 여기서 오히려 더 교묘하게 십자가를 폄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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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