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파의 구원관

구원파의 구원관은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구원은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고 별도로 성화를 위한 회개기도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육체는 원래 죄성이 있어서 육체의 죄가 구원받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구원파의 구원관을 종합하면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고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했으므로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는다. 이들은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히 6:1)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시 51; 삼하 24:10; 마 6:12; 요일 1:8-9)를 구별하지 못하며, 죄에 대한 참된 회개와 회개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종합 사이비이단연구보고집>, 2001)라는 결론이 나온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양심의 가책을 받고) 돌아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구원파의 주장처럼 구원이라는 것을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했다’고 ‘깨달음’으로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죄를 지어도 회개할 필요가 없고 다만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일응 그럴듯하게 보인다. 현대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갈 것 같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유병언 구원파 사건에서 필자의 변론을 맡은 경험으로 구원파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주명수 변호사는 “물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맞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했다는 것은 맞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분적으로 죄인이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지, 성품적으로도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 짓고 있는 죄까지도 회개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구원을 받았지만 현재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구원의 현재라고 말한다. 날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산다는 의미는 단지 죄용서의 의미를 능가한다. 날마다 회개를 통해 인격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서 그분을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옛 성인들은 날마다, 마음속에 짓는 탐욕과 탐심 교만 질투 나태 색욕 분노를 회개하였다. 날마다 회개한다는 의미는 날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구원파 주장처럼 이미 다 용서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가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면 날마다 인격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마치 재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평생을 쓸 돈을 저축해 놓았는데 아들은 평생 그 돈을 쓰기만하면 되고 그 돈을 저축해 놓은 아버지를 만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진정한 아들은 재벌 아버지가 저축해 놓은 많은 돈 보다는 그 돈을 저축한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2) 박옥수의 구원관

박옥수는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으면 모든 죄가 소멸되어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은혜를 누리면서 구원의 확신 속에 살자고 한다.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죄사함을 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어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가르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는 신학적으로 엄청난 교리사기이다.

신학적으로 무식한 돌파리 목사(목사도 아닌 자칭 목사다)가 성경을 억지 해석하여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 박옥수는 반율법적이고 율법폐기적인 왜곡된 칭의론에 근거하여 회개기도는 스스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회개를 금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주기도를 하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반복적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성화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박옥수에 대해 1992년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믿음의 한 가지 기능인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영지주의적 사고임에 틀림없으며, 깨달음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또한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 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이단으로 사료된다”(예장통합 제77회 총회 1992년).

3) 박옥수와 구원파류의 구원론 비판

박옥수와 기쁜소식선교회는 정통교회의 회개를 “비성경적으로 혼돈되고 변질된 회개기도”이며 “자백을 회개기도로 변질시켜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통교회와 대척점에 서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본 선교회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무근한 것으로, 본 선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가 공식 예배 순서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도 개인의 기도 생활도 강조하고 있음을 밝힌다.”고 항변한다.

박옥수의 복음에 의하면, 그는 완전히 죄(죄성)가 하나도 없는 완전히 성화된 의인이기 때문에, 설사 속여 재산을 빼앗든 간음을 하든 사기를 치든 죄가 아니라고 확신할 것이고, 원래 구원을 받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여 온대로, 죄사함 받은 의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 것은 어떤 것도 죄가 아니며 자신은 의인이기 때문에 어떠한 회개도 필요 없다는 확신이 넘쳐날 텐데... 어떤 기도를 한다는 말인가?

박옥수와 기쁜소식선교회는 “의인은 죄를 지은 후 그때 그때 자백함으로 육신의 생각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어져야 된다.”고 둘러대고 있다. 이는 마치 기도생활을 통해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통교회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인 회개를 부정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회개’가 아닌 ‘자백’이란 용어로 대치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닌 ‘인정’만 하는 태도로 피해가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구원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고 본 받으며, 성령의 감화로 거룩하게 하심과 영원한 영광을 믿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개념적으로 요약하면, “나를 믿으라”(칭의), “나를 따르라”(성화), “나를 기다리라”(영화)는 것이다.

온전한 구원은 과거에 이미 “마음으로 믿어 얻은”(롬 10:9) 구원(칭의), 현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야 할”(빌 2:12) 구원(성화), 그리고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롬 13:11) 영원한 구원(영화)이라는 세 차원으로 되어 있다.

구원의 세 가지 요소인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化) 중 어느 하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도 구원론을 왜곡하는 구원론적 이단인 것이다(허호익, <이단은 왜 이단인가>, 2016).

죄가 하나도 없는 분(sinless)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성경에 죄라는 것은 죄성과 죄책(guilt: 죄의 대가 사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성경의 죄 사함은 죄책의 담당이며 박옥수의 주장대로 죄성 자체를 하나도 없게 만든 것이 아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지 죄가 없다고 하신 적이 없다. 우리는 신분상으로는 의인이지만 성품적으로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우리는 사함받은 죄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녀라면 반복적인 회개와 자백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통교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믿음을 통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회복, 회개를 통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 모두 중요하다. 구원은 믿음을 통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무용론자 박옥수는 양심이나 신앙의 죄는 물론 실정법과 관련한 각종 범죄 혐의로 검찰조사와 법원재판을 받으면서, 회개하거나 자숙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국내외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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