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 목사가 왜곡하는 성경 구절들

김성로 목사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에서 그 핵심인 십자가를 밀어내고, ‘부활을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김성로 목사는 시종일관 성경을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부활복음’이 마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인 것처럼 위장한다. 이를 위해 김성로 목사가 이용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1)사도행전 전반부에서

김성로 목사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을 외치는 증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이 부활을 외치고 믿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해석을 근거로 자신의 교회에서도 부활을 외쳤더니 초대교회의 기적적인 역사와 부흥이 있었다고 간증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왜곡한 속임수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부활을 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부활 외침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과는 그 맥을 달리 한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부활을 강조하지만,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틀림없다는 사실(십자가에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부활을 강조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증거로 외친 것이다. 사도들이 부활을 외친 것은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이 부활을 외친 이유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특별한 삶의 정황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김성로 목사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특별한 삶의 정황을 일반화시키는 속임수를 써서 ‘부활복음’이 성경적인 것처럼 위장했다. 또 김성로 목사의 한마음 교회가 부흥한 것은(실제로는 부흥이 아니라 비대해진 것이다) ‘부활복음’이 참 복음이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좁은 길(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빼버린 넓은 길의 거짓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힘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지 않아도 되는, 신바람 나는 ‘부활복음’에 열광하여 많이 모여 들었을 뿐이다.

2) 롬1:4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여기서 “선포(인정)되셨으니”로 번역한 헬라어 “호리스텐토스”는 신적수동태이다. 그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인정)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롬1:4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선포(인정)하신 시점이 예수의 부활 이후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번역은 오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이 물세례 받으실 때(마3:17), 변화산상에서(마17:5), 또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막15:39)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여러 번 선포(인정)하셨기 때문이다(마3:17; 17:5; 막15:39).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호리조”를 “선포(인정)하다”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호리조)는 일관성 있게 “임명하다”, “정하다”, 다시 말하면 ‘권세의 자리에 앉히다’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눅22:22; 행2:23; 10:42; 11:29; 17:26, 31; 히4:7 등). 이렇게 헬라어 ‘호리조’는 적어도 성경 안에서는 ‘선포(인정)하다’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70인역에서도 ‘호리조’가 ‘선포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롬1:4의 “호리스텐토스”는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부활 때 비로소 ‘선포(인정)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이 능력으로(이것도 소유격인 ‘능력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셨다”는 것이 “호리스텐토스”의 요점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셨을 때, 다윗의 씨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롬1:3).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권좌를 포기하고 인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메시아적 왕의 보좌에 앉히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기점으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가 실제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 임명되신 것이다. 또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예수님의 위치가 성육신 때 포기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위의 자리에서, 성육신 이전의 수준으로 높아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롬1:4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불완전한 구속을 완성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을, 그의 승귀를 통해 십자가를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위한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는 잘못 해석한 롬1:4을 교묘히 이용하여,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 능력’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 자신의 ‘부활복음’을 성경적인 것으로 위장했다.

3) 고전15장에서

김성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을 찾아보지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히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너희가 십자가 사랑 사랑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면 죄를 그대로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지더라구요.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는 그런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흥분했던 사람들의 ‘우상이었던 십자가’가 이 한 구절에서 무너지는 거예요.”

김성로 목사는 여기에서도 교묘히 성경을 왜곡하는 속임수로 자신의 ‘부활복음’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19)

김성로 목사는 이 본문으로 ‘부활을 강조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이 없는 헛된 믿음’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그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으면, 하늘에 올라가 하늘성소에서 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전 15장을 쓴 바울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한 거짓말이다. 바울이 고전 15장을 쓴 이유는, 당시 헬라 사상에 물든 고린도교회가 마지막 날에 성도들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마지막 때에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오히려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유로운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몸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으로 자유롭게 된 영혼이, 다시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성도는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으므로, 마지막 때 성도의 몸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몸의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믿지 않는 심각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고전 15장을 쓴 것이다. 특히 바울은 고전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일이 없으면’이라는 말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성도의 몸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웅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다면, 우리가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죄 사함의 능력이 없는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십자가를 믿고 죽은 자들도 구원받지 못했으므로 망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전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입증하는데 반해, 놀랍게도 김성로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으로 변조해서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며, 그러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협박함으로써 바울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가 하늘 성소에 올라가 완전한 제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부활 강조는 예수가 부활하기 이전의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이루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김성로 목사는 말끝마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

 

4)히 9:11-12에서

김성로 목사는 먼저 히8:5에서 모세가 지은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의 모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는 죄인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왜 장막이 있어야하는지를 몰라서 고민하다가, 히9:11-12에서 하늘에 장막이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에서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리고 그는 그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기상천외의 ‘부활 소설’을 쓴다. 그가 쓴 ‘부활 소설’을 요약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십자가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15:17에서 부활이 없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늘에 있는 참 장막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온전히 사하여 졌다’(김성로 목사의 설교에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쓴 ‘부활 소설’을 자신만이 발견한 구속의 진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설교로, 세미나로, 유명 언론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선전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자신이 고안한 ‘부활복음’을 공전의 히트 상품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 ‘부활복음’을 이용하여 수많은 목회적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부활 소설’의 신화는 정이철 목사의 ‘이중 제사’ 비판에 부딪혀 위기를 맞는다. 이때 그는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고, 기이협의 이인규 씨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다음은 김성로의 ‘부활 소설’을 비호한 이인규의 글의 일부이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도 단순한 시간적인 순서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대부분의 정통신학적인 견해는 죽음 이후에 즉시 하늘성소로 들어가셨고, 그 후에 부활하신 것으로 본다. 김성로 목사는 “하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다”라는 표현을 부활로 착각한 것 같다. 어쨌든 김성로 목사는 그의 책과 양육교재에서 여러 번 밝혔듯이 두 번 제사를 말한 적이 없으며, 단지 시간적인 순서에 대한 착각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이인규, “춘천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에 대한 결론”)

‘이중 제사’처럼 보인 것이 김성로 목사의 착각 때문에 빚어진 실수라고 지적한 이인규 씨의 제언은 성경적인 견해인가? 아니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 소설’의 내용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인규 씨의 제언은, 정통신학에서는 ‘십자가 -> 하늘 성소-> 부활’인데, 김성로 목사는 하늘 성소와 부활을 시간적으로 착각하여, ‘십자가 -> 부활 -> 하늘 성소’로 바꾸어 버리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 모두는 본질적으로는 조금도 다르지 않는 황당무괴한 오십보백보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부활하여 하늘성소로 올라갔다는 김성로 목사의 주장이나, 십자가에서 곧바로 하늘 성소로 올라갔다는 이인규 씨의 변명은 부활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결국 둘 다 ‘이중 제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설명하면, 그들의 주장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십자가 죽음 사건이 곧 하늘 성소에서의 영원한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늘성소의 영원한 제사까지’이다. 그런데 이인규 씨는 한 술 더 떠서 이런 자신의 황당무괴한 견해를, 대부분의 정통신학적인 견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사실상 정통신학의 일반적인 견해는 ‘하늘 성소란 땅의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해서 십자가가 하늘 성소라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사건이 곧 하늘 성소에서 자기의 피를 드림으로 완성된 영원한 제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죽으심으로써 하늘 성소에서의 영원한 제사를 마치셨다’이다).

어쨌든 김성로 목사는 앞으로도 자신이 쓴 ‘부활 소설’을, 여러 가지 변명으로 변신과 위장은 할지 몰라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활 소설’이 자신의 ‘부활복음’을 공전의 히트 상품이 되게 한 핵심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자신에게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얻게 한 ‘부활복음’으로 망하게 될 것이며, 이인규 씨도 자신이 변호한 ‘부활복음’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거짓복음’이기 때문이다.
 

저주받아 마땅한 ‘부활복음’의 전파자들

김성로 목사는 그가 새롭게 고쳤다고 내놓은 성경 교재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셨다”고 쓰고 있다(김성로,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 p.31, 2015년 5월 개정판). 이것은 그가 나중에 말한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와 동일한 의미의 말이다. 따라서 그의 ‘부활복음’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구속이 부활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부활복음’은 십자가 복음에 ‘부활을 첨가한 다른 복음’이다.

바울은 십자가 복음에 율법을 첨가한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 여기서 ‘너희가 받은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십자가의 복음’이며(갈3:1), ‘다른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에 ‘율법’을 첨가한 복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에 ‘부활’을 첨가한 ‘부활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갈1:9과 동일한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글을 마치며

천국 클럽에서는 일부 사람들에게 천국 클럽 회원임을 증명하는 회원 카드를 발급했다. 그리고 그 회원 카드를 소지한 회원들에게 사은품으로 다이아반지를 선물했다. 김성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지 천국 클럽 회원 카드와 함께 다이아 반지를 소지한 사람만이 천국 클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다이아 반지는 없고, 회원 카드만 소지한 자는 천국 클럽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다이아 반지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클럽 회원 카드만으로는 천국 클럽 회원임을 증명할 수 없고, 다이아 반지가 천국 클럽 회원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이아 반지를 잃어버린 자들은 빨리 한마음 타운에 오셔서 제가 제작한 다이아 반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타운이 있는 강원도로 몰려갔다. 거기서 다이아 반지를 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손가락에 낀 다이아 반지를 신바람 나게 바라보면서, 하나같이 천국 클럽 회원 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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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