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도단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문희곤 목사의『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를 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예수전도단 사람들이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예수전도단의 묵상과 중보기도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하여 그대로 순종했는데, 결과가 정반대로 흘러간 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의문부호가 뗘오르기 시작했다 ...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성경적이고 체계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문희곤 목사)

문희곤 목사의 경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온 사례 즉, 이런 저런 시행착오 후 점점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발견되는 모습,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훈련 등은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하지 않는다. 문희곤 목사는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이제 기정사실화 하는 작업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전도단은 국내외 전도 여행을 자주 다닌다. 이 또한 어느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후에 떠난다. 당연히 이런 무속 신앙 같은 행위 또한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은 선교 여행시 선교팀이 모여 어느 곳으로 가야하느냐는 것을 묻지 않는다. 바울과 그 선교팀들이 먼저 무릎 꿇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모였고,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선교지 선정에 있어서 성경의 사례를 살펴보자.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시 이고니온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 13:50-51)

바울과 바나바는 장소를 결정할 때 한 곳에 모여 앉아 기도하며 같은 모양과 음성이 떠오를 때까지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이고니온에서 다음 전도지 루스드라로 가게 된 사연을 좀 더 보자.

"이방인들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5-7)

성경의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의 이야기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최초 기독교 선교인데, 어찌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경거망동하며 아무 곳이나 가겠습니까? 주여! 우리가 갈 곳의 이름을 들려 주시든지, 환상을 보여 주십시오!"
“바울 선생! 당신은 뭘 들었고 뭘 보았소?”
“네, 저에게는 소리는 안 들리고 동네 한 가운데 있는 우물이 보였습니다. 우물은 맑고 깊었습니다. 바나바 선배님은 무슨 음성을 들었나요?”
“저에게도 들리지는 않았으나 노랗게 칠해진 지붕이 보였습니다!"

이때 밖에서 손에 돌을 들고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있다 빨리 돌을 던질 준비를 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바나바는 더 다급하게 바울에게 말했다.

“바울 빨리 기도하시오. 빨리! 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아 내시오!”
“아! 이제 들렸습니다. 아주 세미하게 ... ‘루스드라’라고 들렸습니다.루스드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선교할 지역을 알아내지 않았다. 바울의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이 끝나고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하였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행 15:36)

2차 여행의 계획을 할 때에도 1차 전도 여행지의 형제들이 어떠한지 좀 살펴보고자 한다. 바나바는 바울의 의견을 곧바로 수용하고 더욱이 전도팀원까지 누가 될 것인지를 말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행 15:37)

마가라 하는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원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1차 선교 여행시 중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이었다. 이런 그를 바나바는 2차 전도 여행에 참여시키기를 원했고 바울은 반대하였다. 이 일로 심히 다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

이때도 역시 바나바는 마가와 둘이서 선교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바울도 실라와 둘이 앉아서 선교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 이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루스드라에 이른다.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은 자였다. 바울은 그를 데리고 그 지역 전도 여행을 하고자 계획한다. 바울은 평소 하던 대로 자기 소신껏 계획을 잡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것이다. 디모데와 더불어 그 주변의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디모데가 순수 혈통의 유대인이냐를 트집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복음 전파가 막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킨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할례는 의미 없다고 이야기 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의 의견이 옳다고 확정된 것을 보면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정한 규례를 지키게 한다. 오해의 눈으로 바라보면 바울이 소신없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고 규례를 행하게 한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루스드라와 더베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겠다는 바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더라.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도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행 16:3-4)

이제 완전히 전도할 준비를 완료했다. 그러나 그날 밤 성령님께서 그곳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신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전도지를 정할 때 임의대로 결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방향을 바꿔주신 것이다. 결코 미리 그 지역을 묻지 않았다. 바울이 미리 성령께 물어보고 전도지를 정했다고 하면 디모데에게 굳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바울의 전도 여행은 계속적으로 이와 동일한 방법을 취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교지를 옮기면서 어느 곳으로 가야할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 책망하시지 않으신다. 바울은 속수무책으로 성령의 말씀을 듣는다. 머리를 조아려 집중하여 기도하며 선교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꿈속에서 분명하게 자기의 진로를 막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9)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행 16:13)

바울과 일행은 안식일이 되어 기도처가 있는지 살펴보러 갔고 강가에 여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복음을 받아들인다. 빌립보에서 간수를 회심시키고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에 이른다. 바울은 특별한 계시 없이 움직인다. 하던 습관대로, 관습대로 유대 회당에서 전파한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바울의 선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매주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밤에 탈출하게 된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행 17:10)

한밤중에 신속하게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바울과 실라의 뜻대로가 아니라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보낸 곳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고 바울의 규칙대로 회당에 들어가 강론한다.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한다면 결코 성경에서 그러한 방법론이 나타나지 않았을리가 없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선교 가기 전에 바울과 실라가 모여 앉아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곳이 어디 입니까?’라고 기도 했고,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아냐? 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질문을 삼가야 한다. 그런 궁금증 때문이었는지 문희곤 목사 또한 성경을 이 잡듯 뒤졌다고 한다.

"나는 이런 문제로 10년 이상 고민하며 답을 구했다. 하지만 가슴 후련한 대답을 들려주는 책이나 강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 해결해 보겠다고 결심하여 성경책 한 권만 들고 금식하며 그분께 매달렸다.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면, 분명 하나님이 비슷한 경우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 것 같았다. 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성 경 인물을 찾아 연구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내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만이 가득했다. “이게 제 생각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까?”라고 묻거나 갈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 나는 정말 이 잡듯 성경을 뒤져 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놓고 갈등하는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성경이 이런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다니, 놀랍지 않는가? 이 문제가 영적으로 정말 중요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에 대한 뜻과 사례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문희곤 목사)

성경에 단 한 번도 언급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것은 없으니 그쯤에서 멈추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을 더 파헤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문 말씀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말씀 속에 없는데 우리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어떤 틀을 거기에다가 부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 해석의 철칙이어야 합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는 성경 해석의 기초가 아닌가? 그런데 문희곤 목사는 이런 고민 끝에 엄청난 결론을 내린다. 성경 해석의 기초가 전혀 없는 듯하다.

"그 일은 문제가 될 소지가 전혀 없거나 성경에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궁금해 한다면, 하나님이 일일이 답해 주셔야 할까? 그분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 ... 성경에 없는 질문까지 만들어서 고민하고, 그 때문에 온전한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우리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다."(문희곤 목사)

어떤 정신병자가 있었다. 이 정신병자는 우유통을 들고서 닭이라고 했다. 아무리 설득하여도 이미 닭으로 알고 있는 이 정신병자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 확신이 너무도 확고하여 어떤 이론과 논리로 설득하여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의사는 이야기했다.

“닭은 목을 자르면 피를 흘리지요?”
“네!”
“닭의 피는 빨간색이지요?”
“네!”
“그럼 이 닭 모가지를 처서 빨간색이 아닌 흰색이 나온다면 이게 닭이 아니고 우유라는 것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럼요!”

의사는 우유통을 칼로 내리쳤다. 우유가 콸콸 쏟아졌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와! 흰색 피를 흘리는 닭도 있네!”

성경적 근거가 없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 들리는 것으로 기정사실화 시키면 어떤 성경적 이론으로 설명해도 그 생각을 변화시키기 힘들다. 문희곤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 들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성경을 깊이 연구한 이후의 생각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도 우리 귀에 생생히 들려주신다는 명제를 세운 이후 성경을 상고한 경우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음성인지 내 생각인지 마귀의 음성인지’를 구별해주는 기준이 한 구절도 없는 것이다.

이미 정한 마음을 굽히지 않는 것은 사람은 합리적인 해명이 있을지라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생생히 들린다는 이론을 이미 확고하게 세운 이상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해도 그의 마음이 돌이켜지지 않는 것도 사실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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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