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異端), ‘다를 이(異)’, ‘바르다, 끝 단(端)’이다. 그래서 혹자는 ‘끝이 다른 것’으로 규정해서,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매우 바람직하지 않는 정의이다. 이단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알파와 오메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시작이 같으면 끝이 같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믿는다(롬 8:39).

이단(異端, heresy)은 정통(正統, the Orthodoxy)이 세워짐으로 확립된 개념이다. 정통은 구원을 무력하게 하는 공격에 대항해서 형성된 변호적인 체계이다. 변호와 믿음 고백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하는 것이 정답이다. 정통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동일한 본체의 한 하나님으로,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믿는다. 16세기 종교개혁신학에서 루터는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확립했고, 칼빈은 루터의 견해에 동의했다.

종교개혁 이후 이단(異端)이란 규정이 어렵게 되었다. 이단은 박멸해야 하는데 박멸할 권위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이단 박멸을 위해서 종교재판소(이단 심문, Inquisition)를 운영해서 이단을 박멸하는데 실제 무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서 무력을 쓸 수 있는 권위체는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단 규정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초기 한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단으로 규정되어도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가 기존 한국 교회를 배교한 단체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단으로 규정한 세력들이 야합해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단체와 연구자들에게 소송 등으로 심각한 경제, 정신적 피해를 안겨다 주기도 했다. 한국 교회는 이단을 통제할 수 있을까? 한국 교회가 규정하는 이단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 이단은 무엇인가? 이단에 대해서 한 교단이 심의해서 결정하면 한국 교회가 동의해야 한다. 어떤 교단에서는 이단이라고 하고, 어떤 교단에서는 아니라고 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혼란을 증폭시키는 행위이다. 차라리 이단 심의를 하지 않으면 더 나을 것이다. 한 교단에서 이단으로 결정하면, 비록 자기 교단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도 이단으로 결정한 교단의 결정을 우선하게 따라주어야 한다. 그것은 위험물을 다루는 기본 원칙이다. 위험을 알렸을 때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위험 신호를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그것만 합의해 준다면 한국 교회는 이단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단체는 수 많은 단체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단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일 것이다. 그리고 더 발생할 가능성도 무한하다.

이단이란 무엇일까? 정통 교리(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 믿음)와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이단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실재로 그러한지 검토할 수 있다. 이런 고상한 지식으로 한국 교회는 이단을 규정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규정한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가 이단을 결정한 가장 독특한 방식은 포교 대상이 어디인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교회를 전도 대상으로 한 그릇된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한다. 구원파는 “구원을 받았습니까?”는 질문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해서 교회를 허물었다. 신천지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료성경학원’을 열어서 포교활동을 했다. 그런데 기존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형 교회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교회,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 방식은 이단이다.

둘째, 이단은 교회의 역사성을 부인하면 이단이다. 교회 역사성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기는 하지만, 절대로 사도의 가르침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이단들의 공통점은 교회 역사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교회 역사성을 거부하는 것은 교회의 기초인 사도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초가 없는 건물이 없기 때문에 이단이다. 교회는 정통 역사와 자기 역사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이단은 극단을 일상화 한다. 복음은 극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극단이 일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단은 극단을 일상화시켰다. 죽음, 가정 부정(포기), 경제 포기, 학업 포기, 직업 포기 등을 일상화시켰다. 극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것과 극단을 일상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 기존 교회에서 집을 팔아 헌신하는 행위에 대한 칭송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모습이 아니라, 극단적 행동을 자제하라고 권면해야 한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자유의지로 단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단을 규정할 때 주의할 점은 ‘성경’이라는 말이다. 이단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틀리게 푼다. 정통 교회에서 그 오류를 증명하는 것은 쉬울 수 있다고 보는데, 이단 당사자에게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단의 분별할 때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혼돈을 증폭시킬 수 있고, 변증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단을 규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자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살아있는 선생’을 갖고, 존경하는 선생의 판단을 기준으로 여러 판단을 검증한다면 빠르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교사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이단 획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교회 교사도 이단의 획책을 분별하려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죽은 좋은 교사들은 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지침을 줄 수 없다. 반드시 살아있는 좋은 교사를 자기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을 세울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의심하고 싶고, 이단으로 가려고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지켜주는 교사를 세웠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잠 18:12).

그리스도인 존경하는 교사는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 역사를 찾아가면 칼빈이나 루터가 나올 것이고, 정통 교리로, 사도의 가르침으로,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게 된다. 가르침의 정당성은 역사, 가르침의 계보로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과 성경으로 믿음을 증진한다. 성경의 제자는 경건과 겸손으로 믿음을 증진한다. 이단의 제자는 고집(몰입)과 열정으로 사상을 증진한다. 인간의 열심과 성령이 주신 믿음이 대결할 때, 육적 인간은 반드시 인간의 열심을 옳다고 선택한다. 믿는 자니 소수이고 인간에게 인기가 없으니, 하늘이 주신 믿음의 담력이 아니고서는 이단과 바로 설 수 없다.(사 60:22).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