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는 예장 합동의 신앙을 사랑하는 목사입니다. 예장 합동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장 합동에 속하였으면서 예장 합동의 신앙을 망치는 유명한 합동 목사들에 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보기도 운동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토론이 일어나야 한다. 중보기도 사상은 무슨 변명과 핑계를 댈지라도 비성경적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교회 1/5이 소속해있는 가장 대표적인 교단 예장 합동에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더 이상 교회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두 번이나 결의하였다. 그러니 '중보기도 신학', '중보기도 운동', '중보기도 컨퍼런스' ... 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85회 총회, 89회 총회에서 예장 합동은 두 번이나 소속 교회들에게 더 이상 '중보기도'라는 말도 쓰지 말라고 분명히 결의하였다. 그러나 예장 합동 교회들의 현실은 엉망이다. 신학교는 다녔으나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목사가 되고, 더우기 합동에 가입한 오정현 목사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정현 목사는 사랑의 교회 담임 목회자로 청빙되는 과정에서 합동 총회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절차를 거쳤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당시 그 과정의 시험도 다른 사람이 대신 팩스로 보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는 편목 과정을 거치면서 예장 합동의 교리와 가르침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는 과정을 분명히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랑의 교회의 실상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 사랑의 교회에서는 ‘중보기도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어떤 분이 보내주신 사랑의 교회 중보기도 학교의 교제를 보았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은 물론이고, 피터 와그너가 시작한 중보기도 사상과 운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신자들이 사는 아파트 주변을 걸어다니면서 그 지역의 영적인 상황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영들의 특성을 파악하라는 등의 제대로 된 신사도 중보기도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랑의 교회 중보기도학교가 총회의 신학에 위배되는지를 조사하여 달라고 합동 총회의 어떤 노회에서 청원하였다는 말도 들려온다.

정상적인 신앙 노선과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다가도 과연 ‘중보기도’라는 말을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자성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중보기도라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예장 합동 총회가 이미 두 번이나 중보기도라는 용어조차도 쓰지 말도록 결의하였다는 것을 다른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도 알고 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공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장 합동 총회에 소속한 오정현 목사가 부득불 총회 결의사항을 무시하고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교회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중보기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신학을 가르치는 ‘중보기도학교’를 교회에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결코 정상적인 목회 행태가 아니다. 이것을 보면 오정현 목사가 얼마나 신앙개념이 없고 불건전성이 넘치는 목회자인지 느낄 수 있다.

최근 사랑의 교회는 ‘선교사의 탈을 쓴 고학력 박수무당’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은 이용규 씨(선교사, 인도네시아)를 강사로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했다. 이용규 씨는 수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박수무당과 고학력 엘리트이다. 이 사실에 대해 더 이상의 논란은 필요하지 않다. 만일 논란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용규 씨의 이단성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므로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바란다.

한국의 일부 목회자들과 다수의 평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이용규 씨와 같은 사람은 기독교 속으로 가만히 무속의 영들을 끌어오는 사람이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는 것을 보면 꼭 박수무당이 신에게서 하루 일정을 지시받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을 초대하여 특별집회를 연다는 것은 사랑의 교회가 이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건강한 신앙의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한국 교회를 영적으로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 버렸다. 사랑의 교회는 전혀 한국 교회에 도움이 안되는 거대한 종양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최근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전체 신자들이 합창하는 다음의 영상을 보았다.
 

 

“1절>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으니 십자가 제단에 나아가 우리 모두 죄를 씻어버리고 단상의 생활을 보내자 하늘의 불로써 이 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2절>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서 기도의 향불을 올리자 제사장의 큰 사명을 위하여 기도의 전력을 바치자 하늘의 불로써 이 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3절>십자가로 참사랑 알게되니 그 사랑 내게도 주시사 원수위해 달게 죽을 수 있는 끓는 가삼을 주옵소서 하늘의 불로써 이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4절>오순절에 불로오신 성령이여 우리교회 지금 태우사 모든 성도 남김없이 녹이어 부흥의 역사 주옵소서 하늘의 불로써 이 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5절>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 믿-고 구하면 주시네 바알신을 믿는 저이들에게 살아계신 주를 보이자 하늘의 불로써 이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6절>이불이 붙었으면 좋겠다고 탄식을 하시던 주시여 이교회에 그불을 던지시사 영광이 충천케 합소서 하늘의 불로써 이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7절>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 말라 아침 저녁 제단에 나가 신앙의 나무들을 벌려 놓고 기도의 바람을 불어라 하늘의 불로써 이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다. 신앙표현이 노래의 형식으로 나타날 때 찬송이 된다. 위 노래는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의 신자들이 특별행사에서 부르는 일종의 교가(church song), 즉 사랑의 교회의 대표적 찬송인 것 같다. 이 노래를 부면서 오정현과 사랑의 교회의 신자들은 일체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 사랑의 교회의 위대함을 뿌듯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위험성이 많아 보인다. 제단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특별한 곳이었고,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인 짐승이 불태워졌다. 아무나 함부로 제단을 쌓으면 이스라엘의 신앙의 일체감과 단일성을 훼손함으로 죽음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마지막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십자가의 피 제사 이후 더 이상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셨다.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도 계속 예루살렘에서 동물의 피 제사를 고집하자 하나님은 로마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이후 이슬람이 점령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여 더 이상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단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드셨다.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제단’이나 제단과 관련된 용어를 동원하여 신앙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제단과 관련된 것들의 역할과 기능을 이해하여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제사 안에서 어떻게 완성,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완전한 제단 십자가의 유일성, 완전성을 훼손할 수 있다.

구약의 제단 등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노래가 십자가 제단의 유일성, 완전성을 교리적으로 훼손하는데까지 나아가지 않을지라도 기독교 신앙에 부적합한 감성을 형성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신앙의 핵심 요소는 신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즉 성경적 교리이다. 교리가 부패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건강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예를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으로 하나님과 동일본성이고 인성으로 (죄를 제외하고) 우리 모든 인간과 동일실체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분리, 혼합되지도 않고 연합되시었다는 성경적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이 그 무슨 다른 노력을 더 한다고 하여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건강한 교리는 신앙의 생명이다. 또한 건강한 교리에 적합한 감성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미건조한 이론일 뿐이다. 감성이 없으면서 확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리에 우리의 감성, 즉 마음이 따라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건강한 신앙이 될 수 있다. 노래는 감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신앙을 표현하는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에게는 신앙에 관한 감성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사탄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교회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신자들이 부르는 이 노래는 매우 그릇된 신앙 감성을 퍼뜨릴 수 있다.

“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으니 십자가에 제단에 나아가”

1절에서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신자들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십자가를 제단으로 표현하는 것은 맞으나, 신자들이 계속 십자가 제단으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으므로 그릇된 신앙 이론과 감성을 촉진하는 위험스러운 노래이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십자가 제단이 연장되고 반복된다고 가르친다.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성변화시킨 후 신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이후 신자들의 입에다 넣어줌으로 신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공급한다.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단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구약의 제단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속한 제단, 그리스도의 피 제사가 드려진 십자가로 종결되었는데, 천주교는 이것을 무너뜨렸다.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신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이와 같은 느낌을 조장하고 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서 기도의 향불을 올리자”

대체 왜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신자들은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제단을 다시 쌓는 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십자가를 제단으로 표현하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참으로 망령된 노래이다. 십자가 제단은 사람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제단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신 하늘에 속한 제단이다. 대체 어디에서 무슨 제단을 쌓겠다는 것일까? 다시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구약의 제단들은 참 하늘의 제단인 하나님의 십자가 제단의 그림자들이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참 하늘의 제단, 십자가의 피로서 제사가 완성되었다. 누가 다시 무슨 제단을 쌓는다는 것인가? 기도의 향불을 어느 제단에서 올린다는 것인가? 그곳은 바로 사랑의 교회 강대상인가?

제단을 다시 쌓자고 하는데, 그 제단은 언제 무너진 상태가 되었었는가? 이전의 옥한흠 목사 시절이었나? 오정현의 논문 표절시비가 일기 시작한 때였나? 이제 다 털고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제단을 다시 쌓다고 하는 것인가?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특히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강대상까지 올라와서 기도하면 기도의 향불이 제단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가? 소중한 예배 시간에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마귀가 얼마나 재미있어 하겠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하늘의 불로써 이 제단 태워주옵소서 엘리야의 때와 같이 지금도 돌과 흙까지 태우소서”

구약 시대에 제단을 세우고 동물을 불태울 때에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불을 내려 태우신 적은 불과 몇 번이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계시하실 때, 언약을 맺으실 때에 직접 불을 내리시어 제단의 제물을 태우셨다. 대부분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의해 불태워졌다. 하나님이 직접 불을 내리시어 제물을 불태우신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약의 제단의 기능이 종결된 시대에 왜 이런 식으로 찬송을 불러야 하나? 

물론 오정현 목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은유적인 가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래를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를 때 어떤 느낌이, 어떤 감성이 형성되겠는가? 성령의 불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성령의 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이 곧 불인가? 성령이 죄를 태우는 불인가?

“오순절에 불로오신 성령이여 우리교회 지금 태우사”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 말라”

오정현 목사가 이런 노래를 강대상에서 앞장서 부르고 신자들은 따라서 부르는 모습은 거대한 바알 신전을 연상하게 한다. 신종 바알 종교에 빠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을 모두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노래를 부르면 이상한 신앙감성을 형성한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피해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의 가사는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 신자들이 스스로를 대상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

“바알 신을 믿는 저이들에게 살아계신 주를 보이자”
 

 

오정현 목사가 인도하는 이 노래 영상을 보니 “오정현 목사가 여러 가지를 참 잘 한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을 모아 여름성경학교 하는 줄 알았다. 모든 목사가 저렇게 음악성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재능이 있는 목사들이라면 꼭 저래야 할까? 오정현 목사에게는 음악재능 외에도 탁월한 쇼맨쉽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여러 가지를 참 잘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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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