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용규 씨(선교사)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고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용규 씨 추종자가 <바른믿음>의 이용규 씨에 관한 기사 밑에다 나를 악하게 욕하고 조롱하는 글을 남겨두어서 이용규 씨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최근 사랑의 교회가 이용규 씨를 특별집회에 강사로 초청하였던 모양이다. 이용규 씨는 영적으로 매우 불건전한 사람인데, 사랑의 교회가 그를 강사로 초청하였다는 것은 사랑의 교회의 영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운영되는데 깊이 관여된 사람 중에 이용규 씨와 같이 매우 불건전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내용이다. 

인터넷에 있는 이용규 씨의 설교 영상 하나를 또 들어보니 정말 심각했다. 아무리 바빠도 내년에는 각 교단의 이대위들이 이용규 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하도록 그의 신앙의 위험섬을 설명하는 자료들를 <바른믿음>에 많이 올려놓아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운받은 이용규 씨의 설교 영상 하나를 들어보았다. 이용규 씨는 정말 심각한 사람이다. 그의 실제 설교 영상을 들어보면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오기 전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의 방향을 바꾸셨어요, 저는 회개에 대해서 말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눈물이 안 터져요. 다 자기가 불쌍해서 울지 내 안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니까 변하다 만 그런 모습과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어요. 오면서 하나님이 말씀의 방향을 바꾸셨어요.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라시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으시잖아요? 그래도 모자라대요. 말해도 못 알아듣는대요. 오면서 첫 말씀을 뭘로 할까? 기도하는데, 탕자의 비유 이 이야기를 나무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 ”(이용규)

강사로 초청받아 가는 사람은 그 교회에서 전할 설교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설교 준비는 설교자의 신학과 지성과 인격의 기도의 산물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하여야 한다. 설교 준비는 결코 하나님의 직통의 가이드를 받아서 작성하는 신비적인 사역이 아니다.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러 오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설교 내용을 바꾸라고 하셨다!" ... 이렇게 말하는 설교자들은 매우 위험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통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사람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가만히 계셨을까?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으시잖아요. 그래도 모자라대요. 말해도 못 알아듣는대요"

성도들이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들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모자라다.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라고 하셨다는데, 도데체 이용규 씨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을까? 귀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일까? 이런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중에 이단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직접 음성을 주신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특별하여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어 음성이나 계시적 싸인을 주신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상이다.  

이용규 씨가 설교의 서두에서 자신이 설교하게 될 내용을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어 설교 직전에 그 내용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이용규 씨가 말하는 내용은 꼭 신령한(?) 박수무당이 하는 말과 같아 보인다. 그의 설명이 꼭 박수무당들이 자기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모습과 같다.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용규 씨가 경험한 방식으로 설교자들에게 설교할 내용을 직접 계시하는 분일까?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제 누구에게 더 이상 직통으로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직접 말씀의 계시를 주셨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구원자가 성육신하여 오시었고, 성경이 기록됨으로 모든 계시가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이 점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아들이 성육신하여 오심으로 예언의 말씀이 완성되었다고 명확하게 말씀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성경적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경의 완성으로 더 이상의 추가적인 말씀의 계시가 없음을 확신한다. 더 이상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특별계시는 교회에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부패하게 할 뿐이다. 개혁주의 교회들의 신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기를 기뻐하셨고,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기 위해, 또 육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惡意)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그 계시하신 내용을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

방언이나 음성이나 환상 등 구원을 위한 특벽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식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은 기록된 계시, 즉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고 깨닫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시대이다.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 기록자들에게 성령의 ‘영감’과 ‘감동’을 주심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이 기록되고 그 후부터는 그 말씀을 우리가 배우고 알도록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해석하여 주신다. 그것이 성령의 조명이다. 4,000 -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우리들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어떤 이단들은 자기에게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 환상, 방언을 통해 얻은 영감 등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우긴다. 성령의 조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래전 다른 시대의 다른 환경에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바르게 해석되고 적용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성령의 조명이다.

그러면 설교하러 올 때 하나님께서 부랴부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바꾸게하셨다는 이용규 씨의 경험은 하나님의 계시인가? 성령의 조명하심인가? 이용규 씨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결코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활동이다. 그러므로 이용규 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이날 했던 이용규 씨의 설교를 들어보니 잠시도 성경 어느 부분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신이 자신에게 준 계시들을 풀어놓고 설명하였다. 이런 사람의 설교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용규 씨는 설교하러 오는 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화를 하시면서 설교할 내용을 바꾸라고 했다는데, 그렇게 일하는 신이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마치 무속인들에게 신의 계시가 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어느 잡신이 부채도사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과 뭐가 다른가? 이용규 씨는 순수한 사람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이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신의 계시를 받는 이용규 씨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교사의 탈을 쓴 고학력 박수무당”

이용규 씨는 선교사로 위장한 고학력 박수무당이라고 여겨진다. 과연 이용규 씨는 어떤 신으로부터 박수무당의 거짓 영성을 전수받았을까? 이용규 씨의 설교를 더 들어보자.

“바닥에 내려 앉아가지고요 옆으로 드러누운 다음에 (하나님께)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그냥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 그 순간 하나님이 너무도 나를 기뻐하시면 나를 안으신다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저는 그때 동연(이용규 씨의 아들)이가 되었어요. 그때 아빠를 껴안고 오랜 시간 있었어요. 더 말도 필요가 없었어요.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어요. 이것이 우리 아버지(하나님)의 모습이예요.”(이용규)

이용규 씨는 하나님이 찾아오시어 자신을 껴 안아주셨고, 자신의 어린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을 껴안고 황홀한 시간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용규 씨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을 안으신다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이지, 단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할 때, 이용규 씨는 다시 그 때의 감동에 젖어들면서 울먹이려고 했다. 하나님이 친히 오시어 이용규 씨를 다정하게 껴 안아주셨다니 ... 정말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참으로 딱하고 난감하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이런 일을 하시어 황홀한 신비감을 주시는 분일까? 왜? 무엇을 위해 이러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 단지 그 한 사람에게 행복과 영적인 즐거움을 위해 찾아와서 껴안아 주시는 하나님이신가? 그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일까? 아마 이러한 질문이 주어지면 이용규 씨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어 껴 안아주셨다"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 성경의 말씀이 턱 없이 부족하여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서 이용규 씨를 껴안아 주셨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는 성경의 내용들이 부족하니 하나님이 찾아와서 이용규 씨가 느끼도록 허그해 주셨다는 것인가? 헐! .... 꼭 이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용규 씨의 이런 설교의 밑에는 자신이 이 정도로 하나님에게 더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짓된 자만이 깔려있음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이용규 씨가 사도 바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경을 13권이나 쓴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성경을 13권이나 쓰셨다. 먼저 하나님은 바울에게 자신을 풍성하게 계시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바울에게 먼저 알게하시어 성경에 표현하게 하셨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바울에게 찾아가서 살포시 껴안아주셨다는 내용을 전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용규 씨보다 백배로 복음을 위해 고생하고, 이용규 씨보다 천배로 복음을 위해 중요한 일을 했던 바울 사도에게는 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핍박과 환난 가운데 전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찾아가시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말씀으로 격려하셨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다. 그러나 고생하는 바울을 껴안아 주시면서 자기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바울이 한동안 황홀경에 빠지게 한 적은 없으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이용규 씨에게서 일어나는 이런 일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신비주의는 없는 것을 있다고 사기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들을 중심으로 신앙이 셋업(set up)되고 발전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용규 씨처럼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어 껴안아 주신다는 등 ...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비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신비주의 세계의 분명한 특징이다.

그러나 그 일을 정말 성경의 하나님이 하셨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오직 그 사람의 느낌과 경험이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셔야 할 성경적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계속 체험한다. 이런 일들을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어우러지는 현상이다. 즉, 접신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짜릿하고 황홀한 귀신의 일인 것이다.

이용규 씨에게 찾아와서 껴안아 주었다는 그 신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앞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 또 어떤 일을 하실까? 화장대에 앞에서 앉은 여신도 뒤로 다가와서 “오늘 화장이 잘 되었다! 나에게 너는 언제나 예쁘다!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하지 않아도 돼!”라며 그 여신도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실까?

이용규 씨는 박수무당의 영을 받은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의 인간적 재능이 탁월하니 마귀가 그를 더 높이고 귀하게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규장출판사라는 마귀 운동의 발전소 역할을 하는 곳을 통해 여러 권의 베스트 셀러를 냈고, 젊은이들에게 변질된 신앙을 주입하는 코스타에도 강사로도 불려갔고, 복음에서 떠난 혼탁한 사랑의 교회 등의 여러 교회들에서 초청받는 인기 강사가 되었다. 이용규 씨에게 다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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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