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8회)

오순절주의자들의 변태적인 ‘방언기도’가 거짓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메시지가 없는 영음(잡음)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음(잡음) 방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의 영음(잡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바울이 명령하고 있는 것도 방언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다. 그러나 김동수 교수는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울은 그 언어를 배우라고 하든지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초빙해서 방언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을 것이다.”2)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어쩌다가 고린도교회의 예배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국적을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미리 알아서 이들의 언어를 배워 준비할 수 있겠는가? 또 외국인들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아서 이들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자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겠는가?

김동수 교수는 “방언이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실제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다. 통역의 은사를 통해서 통역되려면 실제 인간이 쓰는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3)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국어 방언을 말할 때, 그곳에 그 외국어를 아는 자가 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아마 그는 방언의 은사가 고린도교회의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이 아니라 현지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웃지 못 할 상상을 한 것 같다.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 행해질 때 외국인들은 통역 없이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 신자들은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이 외국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예배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며, 통역의 은사는 외국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김동수 교수의 말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현대 교회의 방언처럼 영음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내용을 하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는 말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말한 것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영음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마귀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 즉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당연히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이었다. 성경에 언급된 방언이 외국어라는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헬라어 분문 자체로도 입증할 수 있다.

1.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aij, 글롯사이스)와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h|, 글롯세)의 헬라어 문구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4) 헬라어에서 어구가 같은 표현은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진다.5)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사도행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었다.6)

2. 방언을 뜻하는 헬라어 ‘글롯사’(glw/ssa)라는 명사는 성경에서 단 두 가지의 의미, 즉 입 안에 있는 혀(tongue)와 언어(language) 외에 다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7) 따라서 예언이 모든 교회에서 필요한 보편적인 은사라면8) 방언은 특수한 상황, 즉 고린도 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온 교회에서만 필요한 특별한 외국어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대 교회의 방언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한 번 주어지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때그때 성령의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방언은 방옹자들의 주장처럼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언제 어디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다. 이렇게 현대 교회의 방언이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는 상시적인 특성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주권적 역사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인간의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훈련하면 능숙해지는 인위적인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인위적인 것이므로 피방언자가 인간이 고안한 요령들을 잘 따라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방언을 할 수 있으며, 본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방언의 고수도 될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 받는 요령들은 놀랍게도 대단히 효과적이다. 왜 그럴까?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일까? 아니다. 성령이 역사한 오순절 날 예루살렘, 고넬료의 집, 에베소 지역의 방언 사건을 보면 방언을 말한 자들이 사전에 어떤 인위적인 요령들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방언이 있는 것조차도 몰랐다. 따라서 방언 받는 요령이 있는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성령이 주신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다른 종류의 방언임이 틀림없다.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요령의 존재는 그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실제로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요령이 있다면, 바울이 이 중요한 정보를 고린도교회에 말하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은사를 받는 요령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는 채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11)는 말로 성령의 주권만 강조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저마다 방언의 은사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요령들이 있다. 그런데 이 요령들은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원리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방언 받는 요령들이다.

1.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요령들 중 거의 모든 자들이 단연 첫 번째로 내세우는 것은 피방언자에게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틀림없다’와 ‘간절히 원하면 나도 방언기도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만약 피방언자가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이들에게 방언기도를 할 수 있는 절대 조건 중 하나인 ‘간절한 사모’를 이끌어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피방언자가 의심을 하면서 방언을 간절히 사모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까닭에 오순절주의자들은 피방언자가 방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9) 그래서 이들은 행2장과 고전14장 등을, 전후문맥 등 기본적인 해석 원리를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방언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맞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한다.

방언을 하는 데 또 다른 방해꾼은 피방언자가 ‘나 같은 자가 감히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다. 따라서 방언 받는 첫 번째 요령의 핵심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몰턴 켈시가 제시한 첫 번째 요령에서도 이 핵심 원리가 그대로 나타난다. 그의 첫 번째 요령을 다시 보면, “방언을 받고자 하는 성도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이미 주어졌으므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받는 것뿐’ 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10)

케네스 해긴은 사도행전 19장 16절의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를 내세워서 피방언자로 하여금 방언이 성령의 은사임을 믿도록 설득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38절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로 받으리니”를 내세워 피방언자에게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죄사함을 얻었으므로 방언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해줌으로11) 피방언자에게 나도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또 그는 노골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기대하라”고 말함으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에 대한 간절함을 갖게 한다.12) 심지어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받으려면 질투심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면서,13) “거듭나지 않으면 방언을 못 받는다”고 말하므로 방언 받을 자격이 피방언자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또 “신령한 것에 대해 무지하면 방언을 못 받는다”고 말하므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이 성령의 신령한 은사임을 각인시킨다.14)

이렇게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긍정적인 면을 피방언자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므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이 긍정적으로 세뇌되도록 힘쓴다. 그것은 피방언자에게 방언을 받고자하는 간절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며, 또 피방언자가 나중에 다른 요령 단계에서 이성이 마비되고 혀가 꼬일 때 ‘성령이 지금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고 계신다’라고 믿게 해서, 혀가 꼬이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꼬여가게 내버려 두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면 놀랍게도 피방언자는 대부분 방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방옹자들이 집회에서 회중에게 “오늘 이 사람이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방언을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자신 넘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단지 받게 해주겠다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닐 따름이다.

2. 두 번째로 중요한 요령은, 피방언자에게 방언이 얼마나 대단한 은사인가를 뼛속 깊이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자신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방언을 하는 자들에 대한 열등감, 시기심 등을 불러일으켜 방언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가슴이 터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15)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의 능력이라든지, 방언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침이 마르도록 피방언자에게 선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버츠 리어든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미리 알려주라. 그리고 입을 열어 실제로 방언을 말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 자신이라고 말하라.”16)라고 말함으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 은사의 필요성을 못 느끼면” 방언을 받을 수 없지만17) “방언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방언이 임한다”18)고 말함으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에 대한 간절함을 주문한다. 이 밖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능력과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부분은 다음 편에서 더욱 상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 각 주 --

1) 본문에서 ‘통역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에르메네이아’(e`rmhnei,a)의 동사 ‘디에르메뉴오’(diermhneu,w)는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2)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6.

3) 앞의 책, p.116.

4)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61.

5)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6) 그러나 김동수 교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음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오히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는데 의문을 제기하며 영음일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7)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8) 롬12:6; 고전11:4,5; 살전5:20; 딤전1:18; 4:14; 벧후1:19-21; 계1:3; 10:11; 11:3,6 등을 살펴보라.

9)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85.

10)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133.

11) 케네스 해긴, 성령 세례와 방언, 장혜영 옮김(서울: 베다니츨판사, 2011), pp.149-151.

12) 앞의 책, p.153.

13)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88.

14) 앞의 책, pp.82-83.

15) 앞의 책, p104.

16) 로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61.

17)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84.

18) 앞의 책, pp.89-90.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