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통상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하는 말하는 행위”로 한다. 그러나 다양한 어휘가 있다. ‘말씀강론’, ‘말씀선포’, ‘복음선포’, ‘복음강론’, 등이다. 영어로는 sermon, preaching을 사용한다. ‘설교학’은 ‘homiletics’이다.

‘설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설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도들은 다양한 이론을 발표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목사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오래 동안 반복된 자기 행위에서 설교에 대해서 자기 정립을 할 수 있다. 목사 리더십의 근원은 설교에 있다. 물론 설교와 인격은 분리되지 않는다.

‘설교’란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다. ‘설교하는 하는 자’와 ‘설교를 듣는 자’는 ‘복음’에서 ‘공통분모’가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 전함과 성령의 역할이 함께 있어야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개혁파는 복음 전함 없이 성령이 스스로 복음 전하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교회는 복음 전달과 성례(세례와 성찬)으로 은혜를 전달한다. 개혁파는 은혜 전달 방편에 일반적인 방편을 인정하지 않는다. 은혜 방편은 복음 전함(말씀)과 성례에 있다. 복음 전함은 52주에 2회를 기본으로 진행하고, 성찬은 각 교회마다 형편에 따라서 다르게 진행한다.

우리는 아직도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와 ‘말씀과 함께(cum Verbo)’에 대해서 명료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자가 성령의 감화로 성경 본문을 근거로 설교문을 작성하고, 약속된 주의 날에 강단에서 성령으로 복음 전함을 통해서, 주의 날에 모인 주의 백성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복음을 수용하면서 복음이 전달되는 구조”를 제안한다. 반드시 설교자는 ‘복음을 전할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혹 복음 문장을 만들었어도 청중 상황을 염려해서 전하지 못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청중은 전달된 복음만을 수용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가 ‘언설(Speech)’만 하는 끝인가? 그렇지 않다. 설교자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수용 정도를 파악(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청중들의 수용 정도를 파악해서 다음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좀 황당한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복음은 여러 주제와 한 주제에도 깊이와 높이가 다르다. 그래서 설교자는 복음의 모든 분야에 위치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전달한 복음을 수용하는 정도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자가 ‘복음A’를 말했는데, 수용자가 ‘복음B’로 착각했을 때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복음B’도 ‘복음’이니 성공한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혹 ‘복음A’를 ‘복음A´’로 수용하는 것은 그래도 수용할 수 있겠지만, ‘복음A’를 ‘복음B’로 받아드리는 것은 전달과 수용의 실패, 즉 ‘성도의 교통(communication)’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강단은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데도,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하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목사는 당연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고 당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면 당연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대학원에서는 복음의 요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대 신학 조류에 편승해서 탐구하고 미래 지향적인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다. 그런 복음과 상관없는 학문 기관인 모판(seminary)에서 나온 과목(果木)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겠는가? 당연히 복음 전함에 관심 없고, ‘바른 목사?’가 배출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목사에게 수 많은 설교 수행을 부여하는 것을 보면 더 복음 전함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복음 전함을 가볍게 여기는 교회 풍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복음이 아닌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면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발생할까? 믿음으로 다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독약을 보약으로 믿고 드시라고 방임하거나 주장하라고 압박을 주는 것과 같다. ‘설교’는 보약(복음)일 수도 있고, 독약(거짓 복음)일 수도 있다. 설교자는 보약(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청중은 독약(거짓 복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목사’지만, 거짓 복음을 복음으로 수용하는 것은 수용자의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더 명료하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의 책임이 아니라, 수용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받을 형벌은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복음 문장을 쉽게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경박스러운지 알 수 없다. 목사는 자기가 전한 문장을 알아야 하고, 청중이 전한 문장의 수용 정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 복음 사역에 동역자가 ‘장로’이다. 목사와 장로는 동역하여 성도들의 복음 수용 정도를 잘 파악해서 교회를 이끄는 것이 ‘치리(治理)’이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으로 운영된다.

‘설교’는 다양한 전달 기법 이전에 ‘복음 문장’을 작성하고, ‘복음 문장을 전달’하고, ‘전달된 문장의 수용 정도’까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가능한 사람은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 없는 웅변’에서 ‘얻는 감동’은 절대 은혜라고 말할 수 없다. 청중이 스스로 만들어낸 복음을 수용하는 방식도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은혜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성령으로 하나되어 소통하는 그 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사모한다. 전하는 자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상을 받을 것이고, 듣는 자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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