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인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큰 토론이 일어났다. 이방인들도 유대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들에게 큰 멍에를 씌우려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굳이 할례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적인 연설이 큰 효과를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연설한 야고보에 의해 대세를 결정되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하면서 그 일이 지금 성취된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배려심이 많은 야고보는 단칼에 유대주의자들을 내리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몇몇 행위들, 즉, 우상에게 바진 고기를 먹는 것과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는 것, 또한 육체적 불결을 금하였다. 야고보는 이 결정을 시행한 후 교회에 서신을 보내었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행 15:23)

이 회의는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이십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며, 대부분의 사도가 생존해 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교회사 중 매우 중차대한 회의였다. 이런 중대한 회의에서 야고보, 베드로, 요한, 바울, 바나바는 “이 일에 대해서 성령께서 무엇이라 말하는지 들어봅시다”고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마리아 복음》이나 《요한 외경》 등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은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이 일로 더 이상 다투지 마시길 원하신다고 하십니다”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할 때도 사도들은 함께 모여 주의 뜻을 직접 듣고 결정하지 않는다.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일들을 듣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 15:26)

이렇게 기독교 이천년 역사상 최초의 총회가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정통 기독교는 합법적인 방법을 취했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런 정통 기독교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장 후대에 쓰여진 영지주의 서적《베드로묵시록》(200~300년경)에서는 ‘그들(정통파)은 신비를 이해하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이 진리의 신비를 알고 있다고 떠벌린다고 하였다. 정통 사제들의 가르침조차도 영지를 부여 받은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교회의 가르침을 뛰어 넘어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살아계신 성령’과 직접 접촉한 사람과 그의 경험이 진리의 궁극적 판단 기준이며 간접적으로 전달된 증언과 전통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권위의 구조는 제도적 틀에 결코 짜 맞추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 발생적이고, 카리스마적이며, 개방적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 는 명백히 이방적이다. 육체 부활을 비웃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육신을 비하하며 육체적 행위(성 행위 등)가 “영적인” 사람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마 복음서》에서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다음의 말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힌두교적이며 그리스적이다.

“영혼이 육신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다면, 이는 경이중의 경이이다. 도대체 이처럼 위대한 풍요로움(영혼)이 어떻게 이 빈곤함(육신)을 찾아 안주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육신 ‘안’에 머문다고 믿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또는 힌두교)을 신봉했다. 정통 교리는 육신을 의미 없게 여기지 않으며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여성적 영성의 영지주의

고대 근동 지역에서 섬겨왔던 수많은 신들과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떠한 여성적 신성과도 권능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다른 신의 남편이나 연인이었던 적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왕, 군주, 주인, 심판자, 아버지와 같은 남성적 칭호로만 표현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여성적 상징이 없다는 점에서, 신과 관련된 여성적 상징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전통적 종교와 뚜렷이 대조된다.

지금도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아버지 즉, 남성이란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는 어머니, 여신의 사용이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고대 근동 이교의 영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남성적 이미지 보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부 영지주의 집단은 예수로부터, 야고보, 막달라, 마리아로 이어지는 비밀 전통을 계승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집단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버지 당신으로부터, 그리고 어머니 당신에 이르기까지, 영원불멸한 두 이름이자, 신성한 부모이자, 천국에 거하시는 전능한 이름...”

그러면 이들은 하나님 어머니의 특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문서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많은 영지주의 집단에서 하나님 어머니가 애초 한 쌍을 이루는 일부였다고 본다. 양성의 한쪽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심오한 이, 아버지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은총, 침묵, 모태, 그리고 삼라만상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영지주의 문헌 《위대한 선언 Great Announcement》을 보면, 우주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침묵의 권능으로부터 남성으로서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위대한 권능, 우주의 정신이 나왔고 ... 또 하나 삼라만상을 만들어 내는 여성 ... 위대한 지성이 나왔다.”

극과 극이 만나 역동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신성을 이해하려 하였다. 이는 동양의 음양사상과 비슷하며 유대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하나님 어머니는 성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요한 외경》에서는 예수가 처형되고 나서 “큰 슬픔에” 잠긴 요한이 밖으로 나갔을 때, 신비스런 삼위일체의 환상을 보았다고 되어 있다. 요한은 비탄에 잠겨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이 빛났으며 세상이 요동쳤다. 나는 두려웠고, 또한 나는 빛 속에서...갖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는 나와 비슷한 존재를 보았으며...”

요한의 질문에 그 환상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존재가 나에게 말했다. 요한, 요한, 너는 왜 의심하고, 또 왜 두려워 하느냐?...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나는 성부이고, 나는 성모이며, 나는 성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부, 성모, 성자로 표현한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지상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을 하나님 아버지, 곧 진리의 아버지 및 하나님 어머니, 곧 성령과 대비하였다.

셋째, ‘지혜’이다. 인간을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지혜이다.

영지주의 교사 시몬 마구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낙원을 모태로 받아 들이라. 성서를 보면 ‘나는 너의 어머니의 모태 안에 너를 만든 하나님(He)이다(사 44:2)라고 나와 있고, 이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가르친다 ... 에덴을 태반이라..,낙원을 모태라 선언했다”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태아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탯줄을 상징한다고 한다. 시몬은 출애굽이 결국 모태로부터 나오는 과정을 의미하고, 홍해는 피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 집단들이 신봉한 이와 같은 모든 내용은 신약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영지주의에는 여자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교부 이레네우스도 ‘영지주의가 수많은 어리석은 여인들을 미혹했다’고 하였다.

정통파 교회에서는 여성들의 예언이 엄격히 금지 되었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여성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부추겼다. 정통 교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였으나 속으로는 전혀 순종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이 정통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당신은 체험해 보지 않아서 몰라’라는 강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여인들은 자기들을 예언자라 생각했고, 이들은 아무것이나 내뱉었다. 이들은 성찬식의 사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여인들이 가르치고, 악령을 쫓는 의식을 행하고, 치료를 행하였다. 영지주의 분파 이단자 말시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사제나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동시대 정통파 공동체를 발칵 뒤집어 버렸다. 또한 급진적 예언파 몬타누스파는 프리스카와 막시밀리라는 두 여인을 예언운동의 창시자로 숭배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전 14:34에서는 여성들은 교회에서 침묵을 지켜야 하며,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오직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교회에서 여자가 말하는 것은 수치라 하였다.

이 부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사역하는 당시에도 영지주의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영지주의적 성향이 강한 곳에서는 언제나 여 사제들이 넘쳐났다. 고린도 교회를 살펴보면 여자들이 득세하였고 영지주의적 성향이 깊었다.

“...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당시 헬라의 문화를 많이 받았던 고린도는 영지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뿐이었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지혜를 구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23절). 고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종교 행사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위대한 어머니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위한 제사에서는 여 사제들이 있는 곳이나 득세하는 곳마다 영지주의가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감독의 자격을 정할 때도 분명히 남자로 한정하고 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2)

디도서에서는 주교 선출시 여성을 고려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해야 하며, 주교는 그 아내와 아이를 복종하도록 만든 남자여야 한다고 했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낸다고 하였다(딛 1:6). 바울이 감독의 자격을 이야기하며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낼 때에 디모데가 사역하는 곳에도 영지주의의 영향이 강했다. 이들은 아무 것이나 내뱉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knowledge)의 반론을 피함으로 내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딤전 6:20)

영지주의자들은 기록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이들의 이야기는 허망하고 허탄한 것이지 성경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성육신도 믿지 않지만 육체적 부활도 믿지 않는다. 깨끗한 영이 다시 더러운 육체에 들어갈 리 없다는 것이다. 디모데의 사역 현장에 여전히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으므로 바울은 다시 이야기한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리라”(딤후 2:18)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여성의 지위를 정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이곳도 영지주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1:14)

특별히 골로새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로 영지주의가 매우 많이 퍼져 있었다. 각종 천사 숭배, 신비주의, 금욕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지역이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골 2:4)

골로새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교훈(교리)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

이런 상태에 있으면 어떤 꾸며낸 이야기로도 성도를 넘어지게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8-19)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헛된 속임수는(골 2:8) 영지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지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어떤 영적인 것과 접신하여 독특한 지식을 얻어 내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좆아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영지주의로 가득찬 교회를 향해 바울은 여자의 위치를 다 시 한번 이야기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여자의 위치를 다시금 보여주는 곳이 에베소서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앱 5:22)

역시 에베소 교회도 영지주의적 이단이 침투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은 니골라당을 책망하였다는 것이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하르낙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은 니골라 당을 그노시스파로 본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 중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책망하였다. 이세벨을 용납한 이들은 행음하였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계 2:20). 이세벨도 영지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은 자들과 같은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즉,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은 자들이 하는 행위도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뭔가 깊은 영적인 세계를 깨닫기 원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탄으로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이 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을 것은 없노라”(계 2:24)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탄의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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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