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는 1차 대각성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인에게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다음은 로이드 존스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인에게서 나타난 특이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한 말이다.

“한번은 에드워즈의 부인이 공중에 붕 뜨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 없이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졌습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가 이러한 신체적 현상에 대해서 개방된 자세를 보였다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가 부흥의 때에 나타나기도 하는 특이한 신체적인 현상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에드워즈) 1740년대의 부흥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하고 비상한 현상들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즉, 몸 마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변호해야 했고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 (중략)  때로 어떤 사람들은 기절을 하고 집회 때 무의식 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상들이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로이드 존스)

부흥의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신체적 특이 현상에 대해 에드워즈가 취했던 태도에 대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내용은 이전에 내가 읽었던 에드워즈의 책에서 보았던 내용과는 좀 다른 논조인 것 같다. 에드워즈는 감정과 신체적 현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심하게 책망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사실 에드워즈나 로이드 존스가 부흥의 때에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하는 특이한 신체적 현상에 대해서 어찌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올바른 일들을 많이 했던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여 항상 옳을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나 로이드 존스도 얼마든지 오판할 수 있고, 특히 에드워즈는 자신의 부인에게서 나타나는 일이므로 더 관대했을 수도 있다.

은혜를 받은 에드워즈 부인의 몸이 붕붕 떠올랐고, 힘들이지 않고 이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녔다는 이야기는 특별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불의 종’이라고 불리우던 능력의 부흥사들이 많이 활약했던 이전의 한국 교회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자주 회자되었다. 떼굴떼굴 굴러다녔다는 것은 보통 수준이었고, 축구공처럼 퉁퉁 튀기도 했고, 어떤 부흥사가 기도하던 자리에서 연기 같은 것이 천정으로 올라갔는데, 나중에 보니 천정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무슨 성령의 열매가 있었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부흥회 강사로 초대받은 목사가 기도할 때 연기 같은 것이 천정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나중에 천정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것을 본 목회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부흥사가 왔다간 후에 교회에 전도가 크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 성도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이상한 것에 관심을 두는 안 좋은 분위기만 생겨났습니다”

어떤 사람의 몸이 성령(?)의 역사로 공처럼 퉁퉁 튀어 올랐던 현상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신뢰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이다. 이런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무병장수하였을까? 하루에 걸어서 천리를 가도 피곤치 않는 몸이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이런 일을 “교회에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에 해가 되지 않으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고 교회에 해가되면 사탄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얌전하게 교회에 다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이었고 교회에 얌전하게 다니지 않으면 사탄의 역사로 규명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판단 방식이 옳을까? 사탄의 수작이 그렇게 단순하면 세상에 사탄에게 속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에드워즈의 부인의 몸이 붕붕 뜨고, 이방 저방으로 옮겨다녔다는 것과 성령의 사역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무엇이 어찌되었다는 것인가? 성령이 오신 목적을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적용하시어 하나님 백성을 생산'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목적과 그 여인의 몸이 퉁퉁 튀어오르는 것은 대체 무관 관련이 있었을까?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생겼을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루살렘에 왔다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빌립 집사를 들어 시원하게 공간을 이동하게하신 것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방 안에서 퉁퉁거리고, 기껏해야 애들의 ‘스카이 콩콩’ 같은 모양새로 옆방으로 옮겨다니게 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벌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할 일 없는 성령(?)의 이상한 짓거리가 아닌가?

로이드 존스가 이런 말을 하면서 부흥의 때에는 이상한 신체적인 현상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은 그가 이상한 데에 마음이 꽂혔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마음이 꽂히면 그 부분에 관하여 비정상으로 변해버린다. 쉽게 말하면 '미치는 것'이다. '미친다'는 것은 실제로 crazy해 진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스스로 속기도 하고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게 된다는 뜻이다. 성령의 부흥의 때에 신체적인 특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는 로이드 존스의 또 다른 말을 읽어보라!

“부흥의 때에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흥의 시기에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격렬히 반응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일정 유형의 사람들이 다른 유형의 사람들보다 더 격렬히 반응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 너무 강렬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체에 까지 그 영향이 나타납니다 ... 부흥이 일어나면 히스테리에 빠지는 이들, 실제로 히스테리에 빠지는 이들이 생깁니다. 또 다른 신체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강력한 영적 능력이 임할 때 어떤 몸에는 이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자 반의학적인 대처가 필요한 상황으로서 옆에서 기도해 주면 진정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부흥의 지도자들은 항상 그렇게 대처했습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부흥에 대한 이러한 말을 성령에 대한 심각한 모욕 수준에 이르고 있다. 부흥이 임하면 어른들보다 아이들에게서 더 신체적 반응이 격렬하게 나타난다는 말은 대체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일까? 성경에 근거하는 말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심신의 발달이 미약하여 더 쉽게 감정에 지배당하고, 악한 영의 공격에 더 쉽게 무너지는 아이들에게서 더 혼미한 일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석해야 맞지 않을까?

로이드 존스는 히스테리 증상도 부흥의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인격적이신 성령이 왜 자기 백성을 그리 괴상하게 만드시겠는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데, 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포로되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진한 짐승처럼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고, 쓰러지고 뒤집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등의 신체적 증상을 보이게 한다는 것일까? 로이드 존스의 말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로이드 존스는 과거의 위대한 부흥의 지도자들이 마치 그런 괴이한 신체적 현상들을 성령의 부흥의 정당한 증상으로 여기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 다른 책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자신의 부흥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특이하게 웃는 등의 신체적 현상을 보이는 것을 보고서 전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간주하지 않고 책망하였다는 내용을 분명히 보았다. 웨슬리는 비정상적으로 웃으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우려하였다.

조나단 에드워도 대각성 운동 당시 은혜를 받았다면서 경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나 그들의 행동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가 누구를 염두하고서 유명한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괴이한 신체적 반응과 현상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도왔다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자기 백성들에게 ‘망가짐’과 ‘흐트러짐’을 유발하며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앞에서 아담의 반역죄에 하나로 묶여진 죄인의 불행한 운명으로 인해 창조주를 감히 보지 못하고 두려워서 떨며 엎드리는 장면은 성경에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실신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말들 속에는 그런 과장과 왜곡이 너무도 많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흥의 때에는 종종 물리적인 현상이 나타나곤 합니다. 여러분은 부흥에 관한 이야기와 기록들을 통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 매번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영광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 나머지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로이드 존스)

“여러분은 이 같은 기록을 자주 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이들, 그 영광을 가까이 했던 이들은 땅에 엎드려지거나 실신해 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아, 그런 건 진기한 현상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흥미롭게 여기거나 깜짝 놀랄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지적해 드리고 싶은 점은, 이 영광이 사람의 신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것임을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부흥의 시기에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므로 사람들이 쓰러지고 실신하게 된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은 정말 위험스럽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으로 말에서 떨어졌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다. 혹 이 내용을 근거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다. 그것은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구세주이심을 보이시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계시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그러한 특별계시 체험을 주신 것은 장차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자 하심이다. 이제는 그런 방식의 특별계시를 경험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내용들이 성경으로 기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심이 완전하게 계시되고 확정되었으니, 그 일이 또 다시 다른 누구에게 또 반복되지도 않는다.

부흥의 시기에는 성경의 그런 일들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틀렸다. 로이드 존스의 위험한 부흥 사상으로 인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있었고 신약의 사도들에게 있었던 계시현상이 지금도 부흥의 때에 반복되는 것 같은 오해가 일어났고, 그것을 불량한 성령운동 패거리들이 너무도 즐거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현상은 특별계시의 완성 이후 다시 일어나지 않으며, 그런 방식의 특별계시를 체험했던 선지자와 사도들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부흥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이런 사상 때문에 불량한 은사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의 신학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만만하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름부으심’, ‘성령세례’, ‘성령체험’ 등의 다양한 말로 표현하는 변태적인 행각과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 로이드 존스는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이미 오신 성령의 인격적인 다스리심이 더 충만해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반대로 성령의 새로운 강림, 즉 하나님이 성령을 더 많이 부어주심이 곧 부흥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의 책 <부흥>을 보면 부흥을 설명하는 내용들 가운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허락되었던 특별한 계시 사건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 나타나신 사건을 예로 들면서 부흥은 ‘하나님의 강림’이고, ‘하나님이 지나가심’이라고 설명하였다. 만일 모세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모세에게 다 보여주었다면 모세는 그 넘치도록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나, 하나님이 모세를 덮으시고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지나가신 후 얼굴 대신에 등을 보여주신 것처럼, 부흥은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조금만 맛보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부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 그가 지나가신다는 이것이야말로 부흥을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모습, 그의 영광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얼핏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다시 올라가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신들 옆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만 그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며 등을 보는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부흥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동시에 개인적 성령강림을 중시하는 오순절 운동 신학에 근본을 두고 있는 모든 불량스러운 성령운동 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 믿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격적인 다스림과 통치하심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이 계속 더 오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령이 더 오실 때 사도행전 2장의 특별한 현상들처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은 역사상 단 한 번의 사건이고 사도행전 2장의 성령현상은 이후 어디에서도 반복되지 않았다. 지금 그런 성령의 더 부어주심의 부흥을 체험한다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유사 성령의 거짓 속임수일 뿐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방언, 예언, 쓰러짐, 실신 등의 현상이 있을지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므로 성령의 열매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러운 일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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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