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의 로이드존스 성령론 연구 2

로이드 존스는 믿는 자들에게 위로부터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이 곧 ‘부흥’이라고 늘 강조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을 동일시하지 않는 매유 치명적인 로이드 존스의 신학의 약점이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가 곧 성령을 받아서 모시기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한번 성령이 오시면 그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신격이시고, 한 실체이시고,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독립적인 세 인격이시나 서로 항상 연합되어계시므로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지 아니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받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친히 임재하시어 친히 자기 백성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로서 구약의 돌로지었던 옛 성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성전이 들어섰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성령받음'이고 '성령의 세례'이다. 신자에게 성령이 오셨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하게 오신 것이고, 이후 더 많은 성령이 또 오신다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아파트를 짓는 공사판에서 먼저 놓인 벽돌위로 인부가 다른 벽돌을 올려서 쌓듯이, 물동이에 물을 담는 여인이 두 바가지의 물을 더 퍼서 물동이에 붓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더 부어주신다고 설명하면 하나님을 왜곡하는 실수이다.

그런데 로이드존스는 처음 믿을 때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부터 또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을 성령의 부흥이라고 매우 강조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부흥’ 이론은 결과적으로 오순절 신학사상이 강조하는 ‘성령세례의 물결’로 귀결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책 <부흥>에서 이미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이 부흥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전도운동은 주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나 부흥의 전체적인 본질은 그 일이 교회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으며 감동을 받으며, 그들 가운데 굉장한 일이 일어납니다 ... 이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하는 길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을 필연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되새기게 됩니다. 이 일의 일반적인 특징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흥의 본질은 함께 모인 다수의 사람들, 교회 전체, 또는 다수의 교회, 지역, 나라 전체에 성령이 임하신다는데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또는 성령의 찾아오심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종종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합니다.”(로이드 존스)

성령의 부흥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이런 사상은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고 가르치는 오순절 운동 신학과 전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오순절 운동 신학은 빈 물동이에 바가지로 물이 자꾸 퍼부어서 물이 채워지고 나중에 흘러넘치게 되는 것처럼, 이미 거듭날 때 성령을 받은 신자에게 하나님이 나중에 더 성령을 부으시니 그 결과로서 부흥과 성령충만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부흥 이론은 성경적이지 못하고, 특히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달라서 개혁교회에서는 수용되기 어렵다. 부흥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에게 성령의 인격적인 다스리심이 더 강력해지므로 신자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형상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죄악된 행실을 회개케하는 성령의 역사가 넘친다. 또한 성령의 부흥은 더 많은 불신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이전파되어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현상이다. 초대교회 당시 나타난 성령의 부흥을 말해주는 성경 말씀들을 보자.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42)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초대교회의 엄청난 부흥을 말해주는 이 말씀에서 성경이 말하는 부흥의 성격과 특징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하나님 백성된 사람에게 임하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신자들을 통해 성령의 다스리심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사도행전의 부흥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구원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지 동시에 듣는 불신자들의 마음에서도 성령이 역사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영혼으로 고뇌하다가 성령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전도의 대부흥이 일어났다.

신자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격적 통치하심이 강력해지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자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선언하는 특별한 이적들을 더불어서 베푸심으로 불신자들의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복음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만으로 초대교회에 성령의 대부흥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성령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먼저 믿는 자들의 삶과 행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지 특별한 이적을 보아서 불신자들이 복음을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인격적인 통치하심을 받는 믿는 자들의 삶과 행실에서 나타나는 열매로 인하여 교회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성령의 부흥이었다.

초대교회가 성령을 더 받아서 부흥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신자에게 오신 성령이 더욱 풍성하게 다스리시고 인격적으로 지배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부흥을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성령을 더 부어주심으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무력해진 장난감 로봇에 더 강한 새 베터리(battery)가 장착하여 활력을 주는 이치, 즉 물질세계의 에너지 법칙과 같은 수준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격하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오순절 운동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식인데, 불행하게도 로이드 존스도 같은 방식으로 성령의 부흥을 설명하였다. 로이드 존스의 다음의 말들을 읽어보자.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성령을 더 부어주시는 것이 곧 성령의 부흥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컨대 성령이 오순절 날에만 홀연히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날에도 교회에 임하셨다는 점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4장에서 그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온 교인이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홀연히 임하셨고 그들이 모인 건물이 진동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로이드존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로이드존스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오셨고 그 다음에도 또 성령이 오셨다고 한다. 특히 사도행전 4장에서 성령이 더욱 더 강하게 많이 오셨다고 한다. 이미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이 더욱 강력하게 인격적으로 다스리심을 부흥이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적적으로 오순절 성령신확과 궤를 같이하여 마치 아낙네들이 물동이에 물을 몇 바가지 더 퍼부어 가득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성령을 모시고 있는 교회에 새로이 더 넘치도록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한 두번 성령이 또 다시 부어지는 것이 부흥이라고 했다면, 표현상의 오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불행히도 그렇지가 않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이 다시 더 많이 부어지는 것,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로 반복적으로 더 많이 찾아오시는 것을 부흥이라고 수 없이 말했다.    

“부흥은 문자 그대로 성령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임하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지만, 바로 이것이 성령이 찾아오셨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교회의 일상적인 삶과 사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문득 누군가 자신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 영광을 인식하며 임재를 인식합니다. 뭐라고 정의할 수도, 묘사할 수도, 말로 옮길 수도 없지만,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로이드존스)

“오랜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이렇게 성령이 찾아오시고 부어지시는 경우가 때때로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상 이보다 명백한 사실은 없습니다. 실로 그 자체가 교회의 역사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큰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 찾아오심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점점 스러져 마침내 소멸되었습니다. 교회는 무기력한 상태로 돌입했고, 이제 끝이 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심각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갑자기 성령을 부어 주시자 다시 한번 정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또 점차 사라졌습니다.”(로이드존스)

위 글에서도 로이드존스는 교회에 먼저 임하시 성령이 거의 소멸되려고 하자 하나님이 더 많은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주심으로 사도행전 4장의 부흥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분명히 로이드존스의 글인데, 그가 정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웨일즈 태생으로 웨일즈 부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로이드존스가 웨일즈 부흥의 불건전한 요소를 불별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다보니, 다른 부분에서는 보석같은 사상과 글을 남겼으나 부흥에 관하여서는 비뚤어지고 왜곡된 성령론을 정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기가 강하게 들어올 때 전구에서 밝은 빛이 나타나지만, 전기가 점차 약해지고 사라지면 동시에 전구에서도 빛이 사라진다. 그러나 어느 때 다시 전기가 강하게 공급되면 또 다시 전구는 밝은 빛을 띠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로이드 존스가 성령의 부흥을 설명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사람이 예측할 수 없고 계획하거나 유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목적과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이 여기시는 은혜를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강하게 선포하게되고, 더불어 기도와 회개가 뜨거워지면서 신자들을 다스리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부흥이라고 설명해야만 성경적이다.

안타깝게도 로이드 존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이 부흥이라고 가르침으로 현대의 비성경적인 성령사역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었다. 복음을 온전하게 선포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을 부흥의 요건으로 가르치지 않고 새로운 성령(?)을 더 얻으려고 예배 중에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소서!”라고 말하는 불량스러운 은사주의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말을 이용하여 날개를 달게 되었다. 청교도 개혁신학의 거장 로이드 존수가 ‘성령을 더 부어주심이 곧 부흥’이라는 가르친 내용을 저들이 어깨너머로 곁눈질하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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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