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이 영적 진보와 훈련에 추가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도는 대표적인 영적 훈련이다. 영적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인간적인 수단을 첨가시키는 것은 육적이고 영적이지 않다. 육적인 수단의 대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말과 외형은 매우 경건하지만, 내면은 불신으로 가득 차있어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유형이다.

거룩한 기도에 인간의 탐욕이 침투했는데, 그것은 ‘많은 시간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의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지하지 않는 인간의 독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룩하고 정결하라고 명령하신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을 규례로 삼았는데,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응하는 이슬람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루 세 번, 다섯 번 등으로 규례를 근거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도에 많은 시간이나 횟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추구하도록 훈련한다. 율법종교는 횟수나 외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횟수나 외형이 많으면 의로운 것으로 자부한다. 바리새인이 네거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긍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많은 시간을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고 오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 ‘다니엘의 기도’를 모범으로 삼으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고 ‘노력’했을 때 기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필수 덕목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의 기도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거룩한 성품의 유익은 모든 사안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닥치고 믿어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앙을 거부한다.

중세 로마 교회는 많은 기도를 원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러 가지 대안을 만들었다. 마니또(manito, 비밀친구, 수호천사)를 창안했다. 수호천사가 자기를 보호하고 간구하는 것으로 창안했다. 그리고 성자숭배(도시수호천사, 직업수호천사)를 창안했다. 마리아 중보도 창안했다. 많은 수단에서 많이 기도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많은 기도 거리들은 혹시 기도하지 않더라도 수호신(수호천사)들이 기도할 것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적절한 헌납을 구조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들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거부했다. 개신교에서 수호천사, 성자숭배, 마리아 중보 사상은 없다. 그러나 ‘많은 기도’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많은 기도를 위해서 ‘성령이 하는 기도’ 방법을 창안했다. 롬 8:26-27절을 근거로 성령이 자기 뜻대로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는 것과 성령이 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방언(고린도전서 12장, 14장)을 연합시켰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으로는 많은 기도를 할 수 없지만, 성령으로 방언으로 많이 기도하는 것을 자랑한다. 방언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한다고 자부한다. 방향없는 공격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전 9:19-10:13).

많은 기도가 자랑이 되고 능력이 되어서 오순절종파가 5억으로 확산되었는가? 그렇다면 더 많이 기도하는 이슬람교가 세계 종교로 확산되는 이유도 동일한가? 하루 종일 불경을 독경하고 염불하는 불교도 많은 기도로 성장하는가? 그렇다면 기도가 세력 확산을 위한 도구인가? 하나님께서 무슬림의 기도, 불교도의 기도를 응답해서 기독교가 축소되는 것인가? 그들과 동일하게 알지 못하는 기도로 대결을 펼쳐야 하는가?

기도는 성도가 믿음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경건 훈련이다. 믿는 자는 한 사람이 천과 만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고 정결한 자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서는 것이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성도가 이 세대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자가 되도록 하는 탄식이다. 이 세대에서 정결한 자가 되려면, 반드시 이 세대를 분별해야 한다(롬 12장). 이 시대, 욕망의 시대, 많은 것을 좋아하는 시대, 기도까지 많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의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내가 기도하지 않고 성령께 내 기도를 위탁하는 ‘신령하게 악한 게으름’이다(마 25:26). 내가 심지 않고 성령이 심어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내가 기도할 분량을 성령께 위탁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령께서 내가 할 기도 분량을 대행하는 대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을 내가 기도하도록 탄식하는 하나님이시지, 내 기도를 대신하는 대행자가 아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셔서, 반드시 내가 명확하게 기도하도록 하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이용해서 대신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녀에게 알려주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결산대에서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야 한다. 나는 하나도 심지 않고 성령이 많이 심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것은 아니다. 결코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많은 시간을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아는 정확한 기도를 하자.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주의해보자. 기도하는 제목들을 소소하게 이루기도하시고, 거절하기도 하는 아버지와 기도의 쟁투를 벌려보자.

기도하는 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욕망의 산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도 자랑하거나 추구할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자는 거룩을 원하고 영적 성숙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도 제목은 세속적인 전부일 것이다.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기도 제목도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그 자비로움을 믿고, 기쁘게 힘껏 원하는 제목을 기도하자. 결국 그나라와 그의를 구할 수 있는 자랑이 없는 탁월한 영적 수준까지 가게 될 것이다. 골방에서 기뻐하고 밖에서 온유와 사랑이 풍성한 기도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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