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4 23:28 (수)
이동원 목사는 여전히 관상에 매료되어 있다
상태바
이동원 목사는 여전히 관상에 매료되어 있다
  • 림헌원
  • 승인 2016.12.12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부요층과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고급신비주의 영성운동일 일어나고 있다. 일부 영성신학 운동가들의 진행하고 있는 ‘웰빙 수도원 운동’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영성운동의 중심에는 관상기도가 있고, 관상기도의 핵심적인 요소는 침묵이다. 이미 수년 전에 관상기도는 한국교회에서 거의 이단으로 정죄받기 직전까지 갔었던 적이 있다. 그때 관상기도 운동을 도입하여 활발하게 전개하던 이동원 목사가 더 이상 관상기도 운동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서 이동원 목사는 이단시비에서 놓여났었다.

필자는 2016년 11월 8일 미국의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 <창조신학대표> 대표 조덕영 박사, 그리고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 이창모 목사와 함께 경기도 가평의 필그림 하우스를 탐방했다.

불행히도 수년 전에 다시는 관상기도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만 침묵훈련만 한다며 한국교회 앞에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경기도 가평 산골의 필그림 하우스로 들어갔던 이동원 목사의 거짓된 실체를 필자는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관상’이라는 말(contemplatio)이 이동원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필그림 하우스에서 버젓이 쓰여지고 있는 것을 직접보았다.

‘관상’이란 한글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관상이라는 뜻의 외국어 ‘contemplatio’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그리도 관상의 핵심적인 요소인 ‘침묵’을 강조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버렸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필그림 하우스에서 ‘contemplatio’(관상)라는 단어와 그 개념을 실행하고 있으면서, 한국어 ‘관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니 필그림 하우스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contemplatio’(관상)라는 용어를 잘 모르고 필그림 하우스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한국교회를 조롱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contemplatio’가 곧 ‘관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동원 목사의 비서는 질문하는 필자와 정이철 목사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수 년 전 예장 합동과 예장 합신으로부터 이동원 목사가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여 정치적인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다. 그 때문에 관상기도가 도마에 올라 수난을 받았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고, 지금은 관계가 회복되어 필그림 하우스를 무탈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관상기도(觀想祈禱, contemplation)

‘관상’이란 ‘함께’라는 뜻의 ‘con’과 이교의 성소, 혹은 후대의 기독교 성소를 뜻하는 ‘templum’의 합성어로서 ‘사물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인 성소에서 사물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 교부들 중 일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 경험을 ‘떼오로기아’(Theologia)라고 했다. 오늘날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말로 하는 기도는 깊이 있는 기도가 아니다”(Thomas Keating)라고 말하면서 “우연적인 실체들 안에서 모든 실체의 근거이며, 참된 실체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Thomas Merton)을 관상기도라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는 언어나 심지어 마음속의 심상들(images)도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말을 한다. 즉, ‘관상기도’는 주 앞에서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곧, 침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품안에서 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는 결국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심지어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 머무르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를 말하는 상당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 및 천주교의 전통과 동양 종교들의 수행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곤 한다. 그들은 생각과 의식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종교적 명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즉,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제시하곤 한다: 시19:14; 46:10; 116:9; 145:5; 마5:8; 계1:7; 3:20 등

그러나 위의 성경 내용들은 관상기도 주장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에 대입시키기에는 부적합하다. 문맥과 원문 분석을 해 보면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문맥해석이 아니라 합리화를 위한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주도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사람이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고요와 침묵을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고자 하는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이 합하여 ‘정화’, ‘주입’, ‘합일’의 단계로 나아가려는 반펠라기우스적인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의존하여 성령님의 감화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종교혼합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기도로 개인 및 집단 최면술이 포함된 자기 확신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를 제한하는 것이다. 또한 관상기도 주장자들은 ‘관상’이라는 용어가 주는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영성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마음기도’, ‘향심기도’, ‘경청기도’, ‘호흡(숨)기도’ 등의 다양한 말로 위장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용어들로 표현되고 있는 것들 속에는 침묵 가운데 어느 한곳을 집중하고 응시(바라봄의 영성, 즉 관상) 하면서 자신이 상상하는 어떤 신으로부터의 음성 곧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깊은 울림을 들으며 영적 황홀경으로 들어감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교도들의 인간과 자연에 내재된 진리를 찾기 위해 수행하는 방식이다. 성경은 결코 이교도들의 무념무상의 경지를 추구하는 침묵행위를 허용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영성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관상’(contemplatio)과 ‘침묵훈련’은 이교도들이 구도의 길을 찾는 방식이지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림헌원 목사 /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예장 합동 한돌교회 담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