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하는 믿음은 오직 살아 있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죄인이 의롭다고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2항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믿음은 다른 모든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있으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가? 세대주의자들 가운데 반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이 질문에 충분히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의롭다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비유를 들어보면 이러한 말씀은 아주 쉽게 이해된다. 인간은 다 죽은 존재이다. 만약 죽은 무화과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이 나무에서 열매가 맺어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나무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면 그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시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열매를 맺는 것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론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잎이 나고 움이 나는 것을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을 기다린다. 그러나 살아있지 않는 나무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믿음으로 칭의 되었다면 바로 살아 있는 나무처럼 그런 과정이 있다. 그것이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포도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다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기다렸지만 그 해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리고 몇 해 더 기다려 본다고 한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나무를 심어 바로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심겨진 나무는 살아 있다. 이때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잎이 나고 움이 나면서 아주 부족한 열매를 맺는다. 몇 해가 지나면서 계속 건강한 나무로 성장하고 열매를 아주 잘 맺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연약한 나무라고 해서, 연약한 믿음이라고 해서 참된 믿음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연약해도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잎도 나지 않고, 다음에 움도 없고 결국 기다려도 열매가 없다면 죽은 나무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믿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믿음은 단지 도구, 또는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다. 그러면 믿음으로 죄인이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죄인이 무엇을 믿고 의롭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스께서 속죄사역을 통해 이루신 모든 의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치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나는 죄인인데 의인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내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믿음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 그것도 내가 이룬 것으로 여겨주신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이룰 수가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로운 행위(롬5:18)로만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 가운데 새 관점은 인간의 행위를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김세윤도 인간이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을 최종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칭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구원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유보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하지 않고 부족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들의 가르침은 결국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칭의에 대한 논쟁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에 대한 유익들을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종교개혁당시부터 이러한 논의가 계속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칭의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무지함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부인하는 자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가르친 칭의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을 듣지 못한 자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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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