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침례신학대학, NOBTS) 한국인 담당 이덕재 교수님이 장경동 목사의 성령사상과 안수행위에 대해 비판한 글을 보시고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신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바른믿음>의 독자들에게도 유익하겠다 싶어 여기에 소개한다.) 

이덕재 교수(뉴올리언즈침례신학교 한국인 담당)

"우선 장경동 목사의 성령론에 대하여 비판한 정이철 목사의 글을 이 곳에 옮겨준 노준엽 목사에게 감사한다.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 누구나가, 특히 주님의 일군이라면 누구나가 성실하게 계속해야 한다. 우선 정이철의 목사의 글에 일부 일리가 있고 동의하는 점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정이철 목사가 지적하기를 "성령세례와 관련없이 물세례를 받게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장경동 목사의 성령세례 사상의 핵심이다." 라고 했다. 필자는 아직 장경동 목사의 성령론 가르침에 대하여 연구해볼 기회가 없었고, 또 이 문제에 관련된 장 목사의 설교들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장경동 목사의 여러 설교들을 듣고 종합하여 내린 결론이라면 정이철 목사의 판단대로 문제가 된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즉 구원받은 자도 성령침례("성령세례"를 필자는 그렇게 부른다)를 받지 못할 수 있고, 믿고 난 후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사도행전의 증거를 들이댄다.

"봐라 120 문도가 성령강림을 기다릴 때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었겠느냐? 성령 받는 것과 믿고 구원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사도행전 8:16-17을 봐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물세례만 받았지 성령세례가 없었지 않는가? 그리고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지 않느냐? 사도행전 10장에 고녤료??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지만("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했으니 행10:4) 성령을 못 받았지 않는가? 그후에 성령을 받지 않았는가? (10:45)..." 

마치 예수님 믿는 것과 성령침례 받는 것이 별개의 것인듯이 말한다. 그리고 마치 성경의 가르침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 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성령론 이해이다. 지면의 제약상 자세히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핵심만 집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성경의 가르침이나 판례가 규범으로 주신 것인가 혹은 특별한 예외로 주신 것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에서 여러번 예언하신대로(요엘 2:28-2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전적으로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역사적인 대 사건이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도(청각적),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는 것도(시각적),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일회성 표징으로 주신 것이다. 대대적으로 전폭적으로 믿는 자 개개인에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일하시는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성령님께서 각 개인에게 적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강력한 표식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다.

이는 역사상 단 한번의 일회적 사건으로 다시 반복되지 않을 사건이다. 사도행전 8장의 사건은 반(half) 유대인인 사마리아인에게도 똑 같이 성령님이 임하심을 안수할 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10장의 고넬료 경우는 이방인이지만 똑 같이 구원받는 자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을 보여주시기 위한 시범 케이스이었다. 꼭 안수해야만 성령님 받는 것이 아님을 고넬료의 경우를 통해 보여주셨다. 안수 없이 말씀을 들을 때 부어주셨다.

이러한 행2장, 8장, 10장의 사건들이 "이후로 대대로 후손들에게 믿는 것 따로 성령님 받는 것 따로다" 라고 규범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 이후로는 전혀 안수 받을 때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Transitional exception(과도기적 예외)" 이라고 한다.

구약의 성부 시대 이후에, 짧은 성자시대에 성자께서 지상 사역을 통해서 완성하신 구원사역을 각 영혼들에게 적용하여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시대가 도래하는 과도기에 표징으로 주셨던 예외적인 사건들인 것이다. 과도기적 예외 사건을 규범으로 여겨서 그 사건들을 종합하여 교리화하면 교리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10장 이후에는 사도행전에도 그리고 어떤 서신서에도 "믿고 구원받는 것 따로 성령님 받는 것 따로"라고 언급하거나 비슷한 언질 조차 주신 것이 없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대로 믿어도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 할 수 있고 성령님을 따로 받는 것이라면 그 중요한 것을 왜 이후의 신학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많이 더 강조해서 가르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이는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이를 "성령침례"라고 부른다.)가 있어야 한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다. (딛3:5, 요3:5) 그러므로 한 영혼이 정말 거듭났다면 그는 자신이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이미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정이철 목사는 "장 목사의 이 말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지금 교회의 물세례를 동일시 하는 관점에서 나온다." 라고 쓰고 있다. 정말 장경동 목사가 침례 요한의 물침례와 지금의 물침례를 동일시 하고 있다면 이는 오류이다. 침례요한의 침례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사역이었고 지금 실시하는 침례는 신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침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내가 죽고 장사지낸 바 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3-5)

그러나 장경동 목사에게 일부 잘못된 성령론 이해가 있었다고 해도 장 목사의 사역을 "악한 영의 장난," "영혼을 저주하는 사탄의 기계들"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논리비약이고 마녀사냥식 사고방식이다.

필자는 미국의 남침례교 6대 신학교 중 하나인 뉴올리언즈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에서 "성령론"을 한 과목으로 한 학기 내내 혹은 워크샵으로 한 주간 내내 가르친 적이 여러 번 있다. 이때 학생들에게 읽을 과제를 주고 토론하게 하며 무엇이 성경의 참된 가르침인가를 찾아가려 애썼다. 그리고 단일 교회로서 역사상 가장 큰 교회 목회자로 회자되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 가르침도,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설교 준비하면서 벤치마킹하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령론도 "믿는 것 따로 성령님 받는 것 따로" 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토론했었다.

그러나 누가 조용기 목사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를 "악한 영의 장난," "영혼을 저주하는 사탄의 기계"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믿고 가르쳤던 것들이 다 바르고 다 옳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교회사에서 정말 귀한 가르침을 폈던 자들도 한 구석에서는 잘못된 교리, 잘못된 이해를 가졌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프라기 서신이라고 냉대(?) 하지 않았는가? 칼빈은 재침례교도들을 사냥하여(?) 잡아 돌을 매달아 겨울 얼음 물속에 집어 넣어 수 많은 신실한 믿는 사람들을 살해하지 않았던가? 당시 재침례교도들은 한편으로는 로만 카톨릭 교도를로부터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신교도들로부터 공격받고 순교당하여 그들의 후예가 대가 끊겼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루터와 칼빈의 잘못된 점 만을 보고 그들을 악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장경동 목사에게도 일부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장경동 목사 만큼 불신자들에게나 타 종교인들에게 부담없이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그의 설교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참되고 바른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대안으로 내놓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에 서도록 애쓰는 것이 비판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 태도가 아닐까?" (이덕재 교수) 

 

이덕재 교수님은 서두에서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 누구나가, 특히 주님의 일군이라면 누구나가 성실하게 계속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장경동 목사의 성령사상과 안수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전반적으로 이덕재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다음의 말씀에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단일 교회로서 역사상 가장 큰 교회 목회자로 회자되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 가르침도,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설교 준비하면서 벤치마킹하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령론도 ‘믿는 것 따로 성령님 받는 것 따로’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토론했었다. 그러나 누가 조용기 목사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를 ‘악한 영의 장난’, ‘영혼을 저주하는 사탄의 기계’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이덕재 교수)

이덕재 교수님은 조용기 목사의 사상에 대해 전혀 심각성을 느끼시지 못하시는 것 같다. 조용기 목사의 성령사상이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났는지 그 심각성을 모르면서 이런 순진한 말씀을 하시면 여러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90년대 초 조용기 목사는 미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미국의 지도를 가져오게하고 플로리다의 펜사콜라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그곳에서 장차 큰 부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조용기 목사가 지도상에서 지시한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신사도운동이라고 불리우는 마귀의 거짓 부흥이 뜨겁게 일어났다. 이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진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조용기 목사가 그러한 일을 했다는 것은 어떤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신앙과 사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영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조용기 목사가 거짓 영의 부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 당시 플로리다 펜사콜라에서 일어난 부흥을 성령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다. 펜사콜라 부흥은 거짓 영들의 부흥이었다. 마귀의 거짓  부흥을 하나님의 부흥으로 예언하였던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이덕재 교수는 좀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했을까? 하나님도 아니고 조용기 목사 자신도 아닌 어떤 영이 조용기 목사를 통해서 했다는 것이다. 누구일까? 하나님으로 위장하는 마귀의 영이 조용기 목사를 통해 장난했던 것이다. 그것 외에 무슨 다른 결론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조용기 목사는 사탄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교 교수들은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또한 누구에 대해서도 실날한 말을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이론으로 시작하여 이론으로 마치는 경향이 많다. 조용기 목사는 기독교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파괴하는 '4차원의 영성'을 퍼뜨린 사람이다. 4차원의 영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언어와 생각을 조절하여 자신을 감싸고 있는 4차원의 영적 세례를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4차원 세계의 지배를 받는 3차원적 존재인 인간의 실제 상황과 미래를 인간이 만들고 뜻대로 열어갈 수 있다는 비성경적인 이론이다. 

조용기 목사가 이러한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덕재 교수님은 너무 순진한 것 같다. 자기 자식을 유괴하거나 가족을 겁탈하는 사람에게도 가급적 좋은 말을 하실 분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조용기 목사 같은 사람을 사탄의 장난의 도구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창검을 상대하는 영적인 싸움터에서는 순진한 것은 장점이 아니라는 것을 이덕재 교수님이 알면 좋겠다. 교회를 넘어뜨리는 간교한 마귀와의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 순진한 사람이 어중간히 끼어들면, 결국 자신만 다치게 된다는 것을 이덕재 교수님이 아시면 좋겠다.

이덕재 교수님은 로이드 존스의 그릇된 성령사상을 언급하시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의 그릇된 성령사상을 한 문장으로 꿰시는 것을 보니 이덕재 교수님의 성령신학이 매우 훌륭해 인다.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 이덕재 교수님같이 말씀하시는 분 보기도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로이드 존스의 성령사상의 오류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그것을 요약하여 책으로 낸 것에 대해 “정이철 목사가 로이드 존스까지 비판하고 있다”라고 비아냥하고 있는 실정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은 성경에서 크게 빗나갔으나, 조금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이론의 영역에서만 머물렀다는 것이다. 물론 후대의 불건전한 자들에게 로이드 존스의 이론이 크게 이용되어 더 심각한 사상들과 거짓 운동들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직접 거짓 영의 도구로 쓰여지면서 거짓 부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로이드 존스의 최대의 허물은 웨일즈 부흥에서 나타난 거짓 영의 역사를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때 일어났던 거짓 부흥의 현상들을 성령의 참 부흥의 특별한 현상으로 이해하였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부흥운동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로이드 존스는 자신이 다른 신학 영역에서 전개하였던 위대한 진술들을 스스로 반박하고 부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이 실수를 바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가 다른 부분에서 너무나도 위대한 업적들을 많이 이루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령신학 부분에서 로이드 존스의 많은 오류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가 악한 영의 도구가 되었다고 실날하게 비판을 당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다른 더 많은 부분에서 위대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악한 영의 도구였다고 비판을 당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가 현대의 거짓 영의 부림을 받는 불건전한자들이 좋아하는 안수 등의 방식으로 거짓 영의 역사를 일으킨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이드 존스는 안수 등의 방식으로 성령을 조종하고 유도하려는 사람들을 심히 비판했다. 안수 행위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유도하려는 사람들을 대해 로이드 존스는 철저하게 경계했고, 실날하게 비판했다. 이 점이 로이드 존스가 악한 영의 도구가 되었다고 비판을 받지 않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장경동 목사는 어떠하였는가? 그는 자신에게 성령을 부리는 능력이라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가면 마지막 날에 의례히 신자들을 길게 줄 서게하고 자신의 솥 뚜껑 같이 큰 손으로 안수를 시행하였다. 그것은 성령을 분배하거나, 성령의 능력을 더 크게 지피려는 의도로 행해지는 일이다. 대체 장경동 목사는 자신에게 무슨 능이 있어서 성령을 나누어주거나 성령의 임재를 유도하려는 그런 못된 안수를 감히 아무에게도 해 댄다는 것인가? 대체 누구에게 그런 것을 배웠을까?

장경동 목사가 신자들에게 안수하였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장경동 목사의 안수를 통해 괴이한 거짓 능력이 실제로 그의 안수를 받는 신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내가 장경동 목사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가 안수하자 어떤 신자에게서 몸이 마비되는 괴현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직접 제보받았다. 당시 내가 썼던 글을 다시 보자.

“개그맨보다 더 사람들을 웃기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장경동 목사가 지난 해 아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어떤 한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때 장경동 목사는 설교를 마친 후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안수기도를 시행하였다. 나는 오래 전 한국에서 장경동 목사가 사람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는 모습을 보았다. 장경동 목사는 안수를 받으려고 강대상 주변과 복도에 줄을 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의 머리를 솥뚜껑같이 큰 손바닥으로 탁탁치고 지나갔다.

대체 그런 행동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런 경박스러운 행동과 더불어 나타나는 영적인 일들이 과연 성령의 역사일까? 아리조나주의 그 교회에서는 장경동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은 사람이 바닥에 누워 한 동안 꼼짝하지 못하는 특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있었으나,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일부러 장경동 목사의 안수를 피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장경동 목사에게 안수받고 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었던 사람에게 왜 그대로 누워있었는지 물었더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하였다.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성령의 임재나 성령의 은사가 임하시므로 나타나는 현상일까? 그때 장경동 목사의 안수가 그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을 밀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마치 공중급유기로부터 기름을 보충받는 전투기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일까? 악한 영의 장난 등으로 인한 가위눌림에서 그러한 현상이 동반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께서도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인가? 대체 장경동 목사와 함께하는 성령은 어디서 온 성령이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성령이 신자들을 강제로 잡아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성령이라고 성경 어디에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괴이한 현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정이철, "개그맨보다 웃기는 장경동의 성령세례" <바른믿음>, 2015.7.24)

내가 장경동 목사를 비판하는 글에서 "악한 영의 장난," "영혼을 저주하는 사탄의 기계들" ...라는 표현까지 동원했던 이유는 바로 악한 영의 역사가 실제로 장경동 목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상의 문제로 그렇게 비판한 것이 아니다. 장경동 목사의 안수를 받은 그 성도에게 몸의 마비현상이 나타나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있었다고 했다. 거짓 영들의 부림을 받는 악한 사탄의 거짓 부흥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그 어떤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안수를 받은 그 사람이 일부러 누워서 시간을 보냈던 것도 아니다. 어떤 힘이 그 사람에게 임하여, 그 사람의 몸을 강간하듯이 유린하는 아주 더럽고 가증한 현상이었다. 성령이 그러한 일을 하시겠는가? 장경동 목사에게 그러한 힘이 있겠는가? 아니면 안수를 받았던 그 신자가 일부러 그리하였던 것일까?

답은 하나이다. 장경동 목사가 거짓 영의 부림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면 무슨 말로 설명을 할 것인가? 이덕재 교수는 왜 이런 무서운 사실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알면서도 같은 침례교단 사람이라고 적절히 거들어 주려고 하는 것인가? 장경동 목사는 자신을 통해 사람을 쓰러뜨리고 몸을 마비시키는 괴이한 영을 물리쳐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이단끼', '사이비 끼', '사악한 영의 기운'을 자신에게서 빼야 한다는 것이다. 장경동 목사가 일찌기 김기동 베뢰아 아카데미를 수료하였던 것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것의 부림을 받는 목사는 영혼을 저주하는 기계이고, 악한 영의 장난의 도구라고 비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그러면서 '국민목사'라며 갈채를 받고, 여러 방송국에 나가서 개그맨들처럼 웃기는 소리를 하면서 인기를 누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부흥집회를 열고 안수를 해 댄다는 것은 장래에 경험할 하나님의 심판의 불의 온도를 더 올리려고 장작을 더 많이 준비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장경동 목사에게도 일부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장경동 목사 만큼 불신자들에게나 타 종교인들에게 부담없이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이덕재 교수)

불건전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광명의 천사'를 높이고, 따르고, 존경하면서 더 귀하게 여기자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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