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대운 목사

1. 영지주의 vs 이레니우스

처음 2세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이들은 3세기에도 존재하였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

당시 이교에서 발생한 영지주의는 기독교 내에 들어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하였다. 고대의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극심한 기근, 구원의 결핍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가 보여주는 갱생과 감화력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교의 정교한 예배 의식에 친숙했던 이들은 교회의 예배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당시의 이러한 모든 형편을 타개해 보려고 하였다. 이 노력은 철저히 정신적, 육신적으로 피폐한 것을 회생시켜 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혼합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계시는 세상의 지혜와 결합되어야 했으며, 기독교는 시대적 종교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당시 혼합주의 풍조와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 절충주의적 운동에는 동양의 철학, 바벨로니아,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심지어 인도 등의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결국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 도가니 속으로 들어 오게 되었고 그 속에서 융합되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예컨대, 신적 구원의 계획, 기독교적 전통, 그리스도의 중심됨 등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왜곡된 형태로 구현되었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 보지만 영지주의자들은 ‘높은 지식’을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겼다. ‘높은 지식’이라 함은 이성적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계시’와 같은 초자연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리켜 gnostikoi(아는 자들)라고 불렀다. 이런 신비한 것은 당연히 대중적 신조를 가진 당시의 기독교보다 더 심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구원론은 사후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사실 현실의 축복에 관점을 두고 있었다.

그노스틱주의의 기초가 된 관념은 병든 세상에 대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구속의 관념에 보조가 된다”고 하였다. 그노스틱주의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구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종교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보편종교는 기독교를 의미한다-저자)를 세우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그노스틱 주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적 계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조로아스터 종교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물질의 세계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는 태초부터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속의 문제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물질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빛의 세계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무지를 쫓아 버리고, 죽음을 철폐하는 것을 가르치는 선생’일 뿐이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의미가 없었다. 이들의 목적은 금욕주의를 통해서나 육욕적 방탕을 통해서 물질적 세계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들은 가현설(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지 않았다)을 믿었으며 부활과 최후의 심판도 부정하였다. 성경을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쪽으로만 해석하였으므로 정통 교회에서는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지주의는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다가 신실한 교부들의 노력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은 신비주의와 금욕적 수도원주의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계속되었다.
 

2. 몬타누스주의

영지주의자들의 변성기가 끝나갈 즈음 또 다른 대형 이단인 ‘몬타누스주의’가 등장하였다. 몬타누스는 원래 이교의 사제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150년경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가 예언자의 영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요한복음 14장에 약속된 보혜사 성신이 자기에게 나타났으며 따라서 자기는 특별한 예언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이 시작되자 프리지아(Phrygia, 현재의 터키)에서 맥시밀라와 프리스킬라라는 두 여선지자가 참가하여 몬타누스주의를 확대시켰다. 다른 이단들과는 달리 몬타나누스주의자들은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을 주장하였으며 재혼은커녕 결혼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앙적으로는 철저한 순교를 각오하는 자들이었다

이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다. 교회를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초대교회로의 회귀’이다. 초대교회로의 회귀 운동은 종종 성령님과 직접 교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지주의로 빠질 위험이 매우 많다. 몬타누스주의의 영향은 종교개혁 당시의 광신자들과 현대의 성결운동자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가 진행하는 이러한 사역들이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초대교회로의 회귀’, ‘순수한 믿음의 소유’ 같은 생각들은 이미 교회사 속에 분명히 등장하였으며, 계속적으로 되풀이 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들은 깊은 숙고에 의해서 나왔다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흘러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들을 실험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과 교회사에 비추어 상고해야만 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이런 역사를 망각한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이 최초이거나, 뭔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선구자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손기철의 《고맙습니다 성령님》의 표지에 ‘중세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의 재발견에 있었다면, 현대의 종교개혁은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재발견에 있을 것이다’라고 써 있다. 이처럼 자신들을 새로운 시대의 개척자로 여기는 자들은 항상 있었다.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할 만큼 대대적인 것을 발견한 것으로 착각한다. 김홍만은 그의 책 「영적바이러스를 치료하라」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 개혁신학의 교수로 있었던 해롤드 브라운은 19세기 말의 오순절주의의 발생은 몬타누스의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물론 오늘날도 은사운동에서 이러한 직접 게시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몬타누스의 재현이다....(중략) 존 백아더 목사는 “카리스마 운동, 반지성적 복음주의, 성령의 제3의 물결(이적과 기사 및 개인적 예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 카리스마 운동), 레노바레(수도원제도, 고대 가톨릭 신비주의, 동방 종교 및 다른 신비주의적인 전통들이 모두 합쳐서 만들어진 단체), 영적 전쟁운동, 및 현대의 예언운동 등이 신비주의 운동으로 보고 그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맥아더 목사가 언급한 것들은 몬타누스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운동들이다."
 

3. 아리우스 vs 아타나시우스(삼위일체 논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실 수 있는가? 이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이다. 이 논쟁은 318년부터 381년까지 6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논쟁을 유발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였다. 아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정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피조물로 보았다. 이 논쟁은 둘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더를 지지하는 오리게네스우파와 서방교회 그리고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개입되었다. 이 싸움이 지속되면서 여러 모양의 이합집산이 계속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흥미를 줄 수 있지만 ‘구속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적인 성격을 퇴색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정통파는 이 점 때문에 아리우스파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아리우스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상 안디옥학파에 속했던 사람이다. 아리우스는 ‘ 로고스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고, 로고스가 ‘피조물’이라는 말도 하였다. 로고스는 모든 점에서 성부와 본질과 본성이 다르다고 하였다. 아리우스는 안디옥학파의 수장인 루키안의 제자답게 히브리적 유일신 사상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성자를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라 하였다. 성부는 비출생자이며,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 없으신 분이지만, 성자는 태어난 때가 있었고, 시작이 있었으며,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알렉산드리 아의 감독 알렉산더(재직 312-328)가 보기에 성자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성부와 성자는 ‘유사한 분’(동일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동일 본질이었다.)이라고 말했다.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문제로 애굽과 리비아 교회 감독 약 100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신학 토론이 벌어졌는데, 아리우스는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성직자도 적지 않았다. 결국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들도 출교 처분에 굴복하지 않았고, 애굽과 리비아 교회 밖의 다른 지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여러 유력자들의 지지를 얻은 아리우스는 애굽으로 돌아가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더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지 세력이 적지 않아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이 논쟁은 정치적으로 번지나갔다. 이때 황제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의 통합에 기여해야 될 기독교가 교리상의 문제 때문에, 혹은 당파 싸움 때문에 자체 분열을 일으켜 로마 제국의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콘스탄틴은 신자이기 이전에 냉엄한 정치적 현실을 보는 황제였다. 그의 눈에는 교리 싸움은 중요한 것이 아니 있으므로 교리 싸움을 멈추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각각 한 통씩의 편지를 써서, 교리상의 논쟁을 이제 중단하고, 서로 화해할 것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견해로는 이들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 상의 차이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항상 성 경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많은 교리상의 문제들을 ‘지엽적’인 것으로 본다는데 있다. 콘스탄틴의 생각과는 달리 그 둘은 편지를 받고서도 교리적 논쟁에 관한 종래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4. 니케아 회의

콘스탄틴 대제는 일반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일반교회회의였다. 이들은 세 개파로 나눠졌다. 첫째 아리우스파(대표: 에우세비오스), 둘째 오리게네스좌파(대표: 유세비우스), 마지막으로 정통파(대표: 알렉산더)였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의 신조는 거부되었고 유세비우스 신조는 부분적으로 받아 들여졌다. 대신 정통파가 주장하던 대로 ‘니케아 신경’이 325년 6월 19일에 채택되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파를 즉각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추방하였다.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보편교회의 신앙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편교회의 성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니케아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채택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초대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교부가 등장하게 된다. 니케아 회의가 열린 325년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한 젊은 장로였으나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아타나시우스를 자기의 후계자로 추천했다. 이때부터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 논쟁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된다. 아타나시우스가 생을 마감한 373년까지, 즉, 그가 감독직을 수행했던 46년 동안 끈기 있게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며 싸웠다. 그는 다섯 번이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는데 네 번은 아리우스파인 치리자에게, 한번은 배교자 줄리안에 의하여 결국 2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가 일생동안 걱정하고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의 머릿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삼위일체론을 거부하는 아리우스파를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신앙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 콘스탄틴 황제의 처음 의도대로 아리우스와 알렉산더가 화해하고 서로를 포용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본성은 완벽히 성부와 동일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성부와는 조금 차이가 나는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도 큰 차이란 말인가? 이런 미미한 차이가 매우 경건했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남달랐던 아리우스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추방할 정도란 말인가? 황제의 말대로 하나님을 믿는 본질은 변하지 않고 이런 것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근간으로 연합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을 포용했다면 그들에게 승리를 내주었을 지도 모른다. 아리우스주의를 추종하던 감독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서 보여지듯이 이론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요소가 많고, 더욱이 성부와 성자가 완벽히 동일하다고 하는 주장보다 성자가 성부에 비해서 조금 열등하다는 주장이 인간적인 사고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이 두 교리가 하나가 되었다면 기독교는 이미 아리우스주의로 변해있을 것이다. 겨울에 창문을 완전히 열어 놓은 것과 아주 조금 열어 놓은 것에는 차이가 없다. 결국 방의 온도는 밖의 온도와 같아지게 된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작은 틈으로 붙어오는 바람은 오래지 않아 그 방의 온도를 밖의 온도와 똑같이 만들어 놓는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에서 아주 조금 양보하여 매우 비슷하지만 매우 작은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거나,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성자 하나님은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라고 조금만 양보했다면, 모든 것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00% 동일하다는 것과 99.9% 동일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일단 99.9%가 동일하다고 결정되고 나면 99.9%인지 99%인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99.9%나 99%나 사실 비슷한 것이다. 이것 또한 포용될 것이다. 이제 90%를 주장하는 이들은 어디까지 성자와 성부가 구별되는 선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90%를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80%를 주장하는 사람의 논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지금쯤 기독교는 자력종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승리한 것과 아리우스주의를 소수 의견으로 받아들인 것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승리했다면 기독교는 철학의 하나가 되거나, 명백히 ‘자력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공자나 맹자, 그리고 석가모니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가 하나님이 아닌 완벽한 인간이 되 있다면 그는 우리의 존귀한 선생일 수는 있어도 구원자의 자격은 갖지 못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 인류 4대 성인 중 한명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인류에게 깊은 가르침도 물론 필요하지만 구원과 비교될 수는 없다.

아리우스에게 어떤 여지를 주었다면 구원을 위해서는 은혜 이외에는 인간의 행위도 필요하다는(로마 카톨릭이 성인들에게 은혜를 구하듯)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리우스는 결국 바울이 정죄한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을 전한 ‘유대주의자’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순수성을 사수하기 위해 정통파 역시 개념을 사용해야 하며, 논리를 세워야 한다. 이런 수고가 없었다면 이미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5. 펠라기우스 vs 어거스틴(예정론)

교회는 또 다시 암흑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이 때에 펠라기우스라는 걸출한 사람이 등장한다. 펠라기안 논쟁의 시작점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의 속성과 능력들은 무엇인가?’ ‘하나님 존전에서의 기쁨을 누리도록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변화들의 속성과 근원은 무엇인가?’이다. 이런 논의들은 신학에서 가장 주요하고 어려운 주제들이다. 펠라기안 논쟁은 그 어떤 논쟁보다도 어려운 논쟁이다. 이 논쟁은 정통 교리를 고백한 사람들일지라도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펠라기우스는 아일란드의 덕망 있는 수도사였다. 그가 400년경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로마인들의 퇴폐적인 타락상을 보았다. 큰 기대를 가지고 영적 수도인 로마를 방문하였지만 그곳에서 받는 충격은 매우 컸다. 로마는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철저히 타락해 있었다. 퇴폐적인 타락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관찰하던 펠라기우스는 ‘운명론적인 결정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의지나, 책임, 결단이 결여된 이들을 보면서 펠라기우스는 분노를 느끼며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주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나에게 주시며,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라고 기록한 부분을 읽고 몹시 분개한다. 인간의 책임은 전혀 없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대항하여 자기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첫째로, 인간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 본성은 선하며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펠라기우스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둘째,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전통적인 ‘죄’(원죄론)에 관한 내용을 손상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진정한 '은총'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죄는 인간 본성 상태나 의지 상태에서 찾을 수 없으며 아담의 행동을 본받아 행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원죄의 유전성을 부인한 것이다.

셋째, 인간은 대부분 죄를 짓지만 죄 인들이 신앙의 의지에 의하여 죄를 일단 용서 받으면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성령의 특별하신 능력이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넷째, 은혜란 인간의 이성을 계발시켜, 그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의롭게 또는 불의하게 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은총을 인간의 영적 능력에 창조적 도움을 주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했다.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은총은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은총은 인간 성품의 한 부분이다. 펠라기우스는 이상한 운명론에 싸여서 그리스도인으로 반드시 해야 할 선한 덕목들을 의도적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강화시킨 것이다.
 

6. 어거스틴

이에 비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서는 개종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의 어떠한 협력도 불가능하며 신앙의 촉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존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지의 변화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너무나 방대하여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대략은 이러하다.

본래 인간은 의로웠으며 하나님과 조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통도 없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었으므로 강제를 받지 않았다. 이런 아담이 교만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다. 스스로 지배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런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을 상실 했으며, 동시에 육체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하였다. 그는 로마서 5장 12절을 근거로 아담의 타락은 전 인류의 타락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으며, 우리가 모두 아담이었다. 어린이는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더라도 죄 아래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의 회복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은혜는 율법이 행할 수 없던 일, 즉, 정욕을 이기는 일을 한다. 성령은 인간 속에서 신앙을 만들어 내며, 영적무지를 몰아낸다. 차츰 인간은 영적인 일에 대해 놓은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사랑이 주입되어 율법이 하지 못했던 일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정욕은 점점 힘을 잃게 되고 인간은 변하게 된다.

인간의 변화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따른다면 심리학적 발견의 결과이지만, 어거스틴의 관점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결과이다.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하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고 예정된 것이다. 즉, 은혜가 인간에게 임하면 인간은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다.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성령이 마음을 변화시켜 영적인 것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개심한 것이 아니라, 개심되었기 때문에 의지 작용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하느냐의 의문이 생긴다.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족하다. 펠라기우스는 412년 칼테이지 종교회의, 418년 칼테이지 회의,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 종교 회의에서도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였다.
 

7. 반(牛)펠라기우스와의 논쟁(Semi Pelagians)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반대한 사람들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하였다. 사실 반(牛)펠라기우스라기 보다는 반(反)어거스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반(反)예정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정 교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거스틴에 동의하였다. 그들이 말하길 예정 교리는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악화시키기나, 어떤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고 하였다.

사실 예정론만 아니었으면 이들은 모두 어거스틴의 추종자였다. 그러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거듭되면서 이들에게서 점차 반펠라기안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인간은 타락했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약화된 인간의 의지를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선행한 것이 아니라 동행한다고 하였으며, 은혜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도 동행한다고 하였다. 은혜는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계발이라 하였고 그러한 계발을 통해서 영적 이해력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은 펠라기우스와 닮아가고 있었다. 정통주의자들은 430년에 어거스틴이 죽은 후에 교리를 정립하여 궐기해서 모든 반대자들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솔선한다고 가르쳤고, 정통 교회에서는 은혜가 선행된다고 가르쳤는데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죄가 유전된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 는 덕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고 공격하였다.

반펠라기안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강경한 어조로 공격하였다. 반펠라기안은 펠라기우스주의보다는 어거스틴에 훨씬 가까웠다. 펠라기우스주의가 목소리 높였던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와 ‘원죄 부정’을 공격하였다. 단지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죽어 버렸다고 하였지만 반펠라기안은 바로 이 부분에서 ‘자유의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매우 약화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여기에 비해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단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와 그리고 반펠라기우스간의 차이의 핵심은 구원에 있어서 선행하는 것이 ‘은혜’나, 인간의 ‘행위’나,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냐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은혜를 받는다”(오직 은혜-어거스틴). “복 받을 짓을 한 사람이 복 받는다”(인간 선행이후 하나님의 도우심-펠라기우스)와, “하나님이 은혜의 손길을 내밀 때 사람 속에서 쪽에서도 손길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신인 협력설-반펠라기우스)이다.

위에서 살펴본 이런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어거스틴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이 성경에 절대적으로 위배되었던 펠라기우스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나 펠라기우스를 격렬하게 반대하며 대부분 어거스틴주의와 가까웠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배격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이런 사소한 이론의 차이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반펠라기안들도 크리스챤 아닌가?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아닌가? 더 나아가 ‘은혜를 주셨으니 복 받은 것이다’와 ‘복 받을 짓을 했으니 은혜를 받은 것이다’는 단지 말싸움 아닌가? 그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차이는 모든 차이이다.

이런 사소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529년 오렌지(Orange)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반펠라기안은 결정적으로 정죄를 받는다. 그러나 분명히 이 시기에 반펠라기안이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중세에 다시금 꽃을 피우게 된다. 반펠라기안은 결코 떨쳐 버리기 어려운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후 중세는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정대운 목사 / 고양시 삼송제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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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