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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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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가?(2)
  • 이창모
  • 승인 2016.10.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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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2)

성령의 은사는 어떤 방식으로 소멸될까?

오순절주의자들은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사단의 역사는 더욱 강력해 질 것이므로 성령도 현대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더욱 많이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듯 한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성령의 은사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것이 말세에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시기 때문이라는 방옹자들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린다. 정말 그럴까? 종말이 다가올수록 성령의 은사가 교회에 더욱 넘쳐날까?

만약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는커녕 은사에 대한 암시조차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종말의 때에 성령은 교회에 하늘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이다(계11:3이하 참고). 따라서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만큼 오히려 성령의 은사는 상대적으로 소멸되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미숙한 교회가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의 비상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고전13:11 참고).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 교회가 성숙해 지면 질수록 성령의 은사는 그만큼 소멸되어 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의 소멸 방식에 대해 오해하는 이유는 본문 10절의 의미는 제대로 이해하면서도 11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절만큼이나 11절은 우리에게 은사의 폐함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10절이 성령의 은사가 완전히 폐하는 시점을 말해 준다면, 11절은 그 은사가 폐하여 가는 방식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11절에서 바울은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과정을 비유로, 초대 교회에서 종말의 때까지 은사가 폐하여 가는 방식(소멸 정도)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1)

은사는 어린아이같이 연약하고 미숙한 교회에 주어지는 성령의 비상적인 선물이다. 은사는 교회가 당장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당장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일시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주신 성령의 목적이 달성되면, 즉 교회가 성령이 주신 은사가 필요 없을 만큼 성숙해지면 미숙할 때 필요했던 은사는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어린아이가 장성해서 성인이 되면 어린아이의 유치한 일들을 버리듯이 온전한 것이 올 때(예수의 재림) 교회는 완성될 것이므로 어린아이같이 미숙할 때 주어진 은사들은 교회에서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지금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성장 과정을 비유로 은사의 소멸 방식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8절과 10절에서 사용한 “폐하리라”(katarghqh,setai/카타르게세타이/원형:katarge,w/카타르게오)와 11절의 “버렸노라”(kath,rghka/카테르게카/원형:katarge,w/카타르게오)를 동일한 원형의 단어로 표현함으로써, 8절에 언급한 은사의 폐하는 모습이 11절에서의 비유처럼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유사한 모습임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의 유치함이 완전히 폐하는 시기는 완전한 성인이 되는 시점이지만, 이때 한꺼번에 어린아이의 유치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유치한 버릇은 성숙해지는 만큼 점차적으로 사라지다가 성인이 되면(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인간이 어린아이의 버릇들을 완전히 버리려면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3살 때보다는 여든 살 때 어린아이의 유치함은 훨씬 덜 하다는 것이다)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1)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의 소멸 방식도 이와 같다.

성령의 은사들은 방언 중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온전한 것이 왔으므로 이미 사라졌거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 풍성해 지다가 예수의 재림 때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11절의 논지는 은사는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처럼 예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점차적으로 교회에서 사라지다가 예수의 재림 때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의 완전한 소멸은 예수님의 재림 때지만 은사의 소멸 정도는 교회의 성장 정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계시적 은사(예언, 방언, 지식, 지혜의 은사)의 소멸 정도는 성경의 보급과 관련이 있고, 신유의 은사의 소멸 정도는 의학의 발달(병원의 보급)과 관련이 있다.
 

은사의 소멸 정도는 교회의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은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교회를 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물론 이 능력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는 그만큼 더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은사가 사라진다고 해서 교회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성장해서 더 강해질수록 은사는 그만큼 더 필요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성령이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말하는 자가 자신은 그 의미를 모르면서 외국어를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계시만 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가 외국어를 익힌다면 자신이 이해하면서 외국인에게 계시를 전할 수 있고, 외국인과 대화도 가능해 진다. 그러면 방언이 할 수 없는 인격적인 교제는 물론이고 계시의 말씀 외에 다른 대화들을 통해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방언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보다 여러 가지 외국어 능력이 풍성한 교회가 더 능력 있는 교회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언은 성령의 계시를 기다려야 하지만 성경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성령의 계시를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가 있는 교회보다 성경이 있는 교회가 더 성숙한 교회다.
 

계시적 은사의 소멸 정도는 성경의 보급과 관련이 있다

계시적 은사의 완전한 소멸은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성경(복음)이 땅 끝까지 보급되는 날, 즉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땅 끝까지 보급되는 마지막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예언의 은사는 마지막 날까지 초대 교회와 동일한 정도로 계속되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 일시에 소멸되는가? 아니면 오순절주의나 신사도주의의 주장처럼 마지막 때가 될수록 점점 더 풍성해지다가 예수의 재림 때 일시에 소멸되는가?

"둘 다 아니다. 바울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서서히 버리듯이 은사의 소멸 정도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11).

예언의 은사의 소멸 정도는 성경의 보급과 반비례한다. 성경이 보급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는 사라져갈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 때 완전히 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거의 100%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언의 은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성경이 지구촌 모든 곳에 다 보급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령은 성경이 없는 오지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계시하신다. 물론 이때의 예언은 완성된 계시인 성경에 제한을 받을 것이다.

계시적 은사인 방언도 마찬가지다. 방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계시를 전할 수 있는 은사이므로 성경이 모든 민족의 방언으로 번역되기 전까지 방언의 은사는 계속될 것이다.2) 그러나 외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복음이 전해지는 만큼 방언의 은사는 점점 그치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 때 완전히 그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외국어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여러 민족들에게 보급되면 될수록3), 교회와 선교사들이 다양한 외국어 능력을 갖추면 갖출수록, 교회가 외국인들을 위한 예배를 다양한 언어로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방언의 은사는 점점 그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거짓 방언은 시간이 지날수록, 즉 예수의 재림 때가 가까이 올수록 우는 사자와 같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4)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므로 은사의 유효 기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도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보존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들(예를 들면 인쇄된 성경책, 컴퓨터의 기억 장치, 인터넷 성경 등)이 발전하면 할수록 소멸되어 갈 것이다. 또한 지혜의 은사도 좋은 주석들과 좋은 성경 교사들이 보급되면 될수록 사라져 갈 것이다.
 

신유의 은사의 소멸 정도는 의학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성경 시대의 기적의 역사, 특히 신유의 역사는 구원사와 필연적인 관련이 있으며, 성경의 기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신유의 역사가 성경이 완성된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교회사에서 보고되고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말씀, 즉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은사는 계속된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은사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점차적적으로 소멸되어 간다는 것이다.5) 따라서 현대 교회에는 바울 당시보다 주의 재림에 더 근접해 있는 만큼 신유의 은사는 더 많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은사주의자들이 남발하는 신유의 역사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은 역사가 아님이 분명하다.6)

2012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암 치료는 5년 생존율(5년 생존은 의학적으로 암의 완치를 의미한다) 64%라는 놀라운 치료 능력을 자랑한다. 이것은 신유의 은사보다 훨씬 뛰어난 치료 능력이다.7)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현대 의학이 성령의 신유 능력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현대 의학 역시 하나님이 주신 치유의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유의 은사가 있는 교회보다 종합병원 바로 옆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더 큰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기마저도 꼼짝 못하게 하는 능력자가 현대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8), 초대 교회 당시에는 이보다 더 능력 있는 신유의 은사자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인간의 평균 수명이 30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여서(1-5세기의 제국 시대의 인간의 평균 수명은 25세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도 1930대까지 평균수명이 31세에 불과했다. 출처-세계일보 weekend 050218) 그리스도인들도 어김없이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젊어서 질병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왜 그랬을까? 지금처럼 당시에도 신유의 고수들이 즐비했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의 평균 수명만큼은 세계사에 기록될 정도로 길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으면 야고보서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병듦’이 교회에서 큰 고난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야고보도 병든 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약5:14)라고 말하지 않고, 손기철 장로와 같은 신유의 고수들을 불러다가 안수받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유의 고수들이 당시에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라고 했다면, 야고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본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고전13:13의 바른 의미이다. 지금까지 이 본문이 바르게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살피고 지나가자.
 

고전13:13은 고전 13장의 결론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본문들 중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고린도 교회의 정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후 문맥을 무시한 채 믿음, 소망, 사랑을 단순 비교해서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어떤 사람은 ‘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뛰어난가?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믿음과 소망은 없고 사랑만 남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은 별도의 은사로 구분될 정도로 하위이지만 사랑은 모든 은사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더 뛰어나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사랑이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9)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바울의 의도에서 한참 비껴가는 잘못된 해석들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놓고 단순히 메달 색깔을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본문도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앞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본문이다.10)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고 있는, 즉 교회의 유익을 주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13절에서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려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또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단순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교회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은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이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교회에 사랑과 소망은 넘치는데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바울은 그 교회를 향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 중 믿음이 제일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은사의 남용이나 오용이 아니라, 은사를 개인의 덕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면서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즉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은사를 자신을 위해 쓰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 필요한 것은 사랑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각주 ---

1)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149.

2) 어거스틴은 방언 중지론자다. 그는 방언이 중지된 이유가 “이는 교회 자체가 이제 모든 민족의 방언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73. 방언이 중지되지는 않았지만 어거스틴이 주장한 방언 중지 이유는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3) 현재 2500여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이 2500여 언어로 번역된 만큼 방언은 사라졌을 것이다.

4) 은사주의자들은 행2:16-18(욜2:28-29)을 근거로 자신의 은사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요엘서의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된 초대 교회 때는 교회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비상한 방식으로 은사를 주셨지만, 요엘서의 예언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마지막 때에 성령은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은사가 아닌 권세를 주실 것이다. 욜2:30-32(행2:19-21)을 보라! 요엘서의 예언은 말세의 때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세의 때를 고전13:11과 조화시키면 이때 교회에 주어지는 능력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은사는 거의 소멸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라!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은사 이야기는 없다. 물론 방언 이야기도 없다. 이것은 은사가 말세의 두드러진 교회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11:3-6을 보라. 말세에는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권능을 가지고 끝까지 예언을 할 수 있도록 권세를 주신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사주의자들의 행태는 성령의 은사를 빙자한 사기 행각에 불과하다.

5) 성령의 은사는 점점 소멸되어 예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거의 소멸된 것처럼 미미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우에 따라 일시적이기는 하겠지만 아주 강력한 은사가 교회에 주어지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우 성령의 주권적 의지로 이런 소멸 원칙이 무시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유의 역사가 거의 없던 바울의 사역 끝 무렵, 멜리데 섬에서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고친 바울의 안수(행28:8)와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현대 의학이 포기한 말기 암환자가 병원 치료가 아닌 신유의 은사로 치료되는 경우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6) 존 윔버가 자신의 치유 사역을 회고하면서 불치의 병이나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 힘든 질병이 치유된 경우는 드물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서울: IVP, 2011), p.128. 이것은 고전13:11에서 말하는 은사 소멸 원리의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7) 정동수 역편, 빈야드 운동의 실체(서울: 생명의 샘, 1966), p.55; “이 책에는 존 윔버의 치료 사역을 연구한 의사들의 보고가 있는데 윔버의 치료 성공률은 0.5% 미만이라고 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210에서 재인용).

8) 손기철, 왕의 기도(서울: 규장, 2008), pp.16-18.

9)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56-157.

10) 옥성호 형제는 헬라어 원문에 있는 접속사 ‘누니’(nuni,, now)를 문제 삼으며 앞의 내용과 이 본문과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55-156). 물론 이 본문은 바로 앞의 12절과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고전13장 전체의 내용과는 분명한 인과 관계가 있다.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말한 사랑의 중요성을 고린도 교회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13절에서 고전13장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을 접속사 ‘누니’(nuni,, now)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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