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바른 사용에 대한 살핌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신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으로 주의를 기우려서 사용하고 분별해야 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참과 거짓이 분별하는 것을 독단이라고 한다. 언어 사용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이 교회에도 도입되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 분별하지 않고 많이 사용하는 한 문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한국 교회 강단과 공동체 안에서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 혹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어떤 연유로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가 도입되었는지 경로에 대해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되고 있다. ‘기름 부으심’이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기름 부으심의 의미 및 주체에 대한 고려가 없이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한 때 ‘성령 충만’이란 단어로 논의가 깊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에서 이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유행 용어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성령 충만’이란 단어도 면밀하게 검토하면 적합하지 않거나 명확하지 않게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럴 즈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 했을 때,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는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진위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경 용례에는 없는 신학화한 용어이다. 성경에서는 ‘주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씀한다(요일 2:27). 구약에서 ‘주’는 ‘여호와’를 지칭하며, 신약에서 ‘주’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세례도 성령도 주시지 않으신다. 성령 세례도 주께서 주시는 세례이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서 성령이 기름을 부어주신다고 왜 생각하고 있는가?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오순절 예루살렘 다락방 120의 제자에게 임한 종말론적 사건이다. ‘기름 부음’은 ‘anointment’, ‘anointing’이로,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신성하고 선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구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이라는 단어에서 ‘oil’이 연상되는데, anointing은 감람유를 붓는 모양이다. 이 ‘기름’은 성령이고, 기름을 붓는 이는 제사장이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이 거룩한 장소에 임하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보증하고 상징하기 위해서 제단·제기(祭器)·신전·무기·옷가지에도 기름을 붓는다. 고대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중병에 걸린 사람과 노인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을 성사(聖事)로 시행해왔다. 오랫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기름부음을 임종의식으로 여겨왔는데, 대개는 죽음이 임박해서 숨이 끊어지려 할 때 비로소 그 의식을 행했으며, 따라서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Daum 백과사전)

기름 부음이란 용어가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되는 것이 정통 신앙인데, 사제의 기름 부음으로 성별케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눅 2:26에서 anointed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성령 세례”를 의미로 주석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역으로 모든 세대에게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기름이 부어지는 것은 성별(聖別)이고, 기름 부음을 받는 대상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이다.

‘기름 부음’에 대해서 칼빈은 메시야 직임과 주의 백성됨의 직임으로 제시하는데 반해,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별(聖別)’이나 ‘치유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칼빈은 중세교회의 그릇된 성경 용례를 말씀에 합당하게 제시해주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성령 세례에 사용되는 용례를 ‘성별(聖別)’, ‘치유’, ‘능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성경에서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다른 용례를 만들어 단어를 정착시키는 것은 신학화인데, 신학이 성경의 사상과 일치해야 한다.

필자는 ‘기름부으심’이 요일 2:27에 근거하여 성령이 기름부음은 부당함을 제시했다. 주께서 베푸시는 기름부으심은 구원과 은사이기 때문에, 마음이나 질병 치유나 어떤 능력을 행함 등 신비적인 사역으로 분류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자기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창작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창안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용어 사용은 중지해야 한다.

만약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사용하려 한다면 성경대로 ‘주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죄를 제거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연결해야 한다. 병의 치료, 마음의 치유 등으로 기름 부음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성경과 유사한 용어를 교회에서 창작해서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구습, 성경에 적합하지 않는 전통이나 가르침에 대해서 과감하게 개혁했다. ‘성령의 기름 부음’에는 개혁했던 중세로 회귀하는 퇴보의 모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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