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을 비평했었다. 김세윤 교수는 한국 교회(장로교, 특히 여성안수를 시행하지 않는)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믿음이 ‘구원파식 믿음’ 체계라고 했다. 필자는 그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구원파식 믿음을 알지 못한다고 제시했다.

구원파의 믿음 체계는 자기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뒤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체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믿음 체계에는 죄사함의 확신이 없고, 세상의 복을 받기 원하는 체계이다. 이런 체계는 구원파식 믿음 체계가 아니고 기복종교의 전형을 답습하는 것이다. 필자는 구원파는 기복종교의 형태가 아닌 신비주의와 방종주의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하다고 평가되는 한국 교회는 어떤 형태인가? 그것은 원효대사의 가르침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변형에 불과하다. 일체유심조는 사람이 마음 먹은데로 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한국 사람에게 적합하게 모듈화된 일세유심조의 변형인 ‘오직 믿음’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믿음대로 된다’고 가르친다. 믿음대로 되고, 하면 된다는 것이 교회의 적극적인 모습이다. 불교는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은 동일한 모습이지만 소극적이고 신비적인 모습이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은 ‘바람 내용’이 아니고 ‘믿음 대상’을 고백하는 것이다. 구원파식 믿음은 믿음 대상이 아니라 자기죄사함을 자기가 인식하여 믿는 구조이다. 자기가 인식해서 믿는 구조는 김세윤 교수의 방식과 유사하다. 둘의 공통점은 예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예수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를 자기가 믿어 예수를 반복하려는 형태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세속의 요소에 연결시켰다. 이것이 축복종교, 기복종교이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국 종교는 고급 신비주의와 서민 신비주의로 구분했다. 고급 신비주의는 Q.T, 관상기도 등으로 연결했고, 서민 신비주의를 방언, 신사도 등으로 연결했다. 신비주의는 세속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는 구조이다. 한국교회는 축복종교와 신비주의 형태가 만연하다.

한국 교회가 차라리 구원파식 방식이었다면 구원파의 공격에 피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축복종교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파의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구원파는 한국 모든 지역에 거점이 있고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축복종교를 거부하고 순수한 종교 체계를 추구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착한 양심을 미혹하는 세력에서 바른 구원 사역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더욱 순수하게 오직 믿음, 구원자이신 예수 이름에 착념해야 한다.

‘값싼 믿음’은 없다. 본 훼퍼가 히틀러에 동조한 루터 교회를 향해서 던진 선언이 ‘값싼 은혜’였다. 히틀러에게 동조한 교회에 해당하는 평가를 한국 교회에 던지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한국 교회가 일제에 굴복해서 신사참배와 신도교예식을 교회에 도입했다. 일본 교회는 신사참배와 신도예식에 제국주의 위치에서 도입했다.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행동이 유사하지만 회개의 내용에서는 달라야 한다. 한국 교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공감하지만 비판하는 내용과 방법에서는 바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독일 교회나 일본 교회에게 했던 비판을 한국 교회에 도입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행위없는 믿음’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훼퍼가 ‘값싼 은혜’라고 하니까 값싼 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언어유희)이지 ‘그런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의 예로 말썽부리는 아들에게 집을 나가라고 명령할 때 아들이 집을 나간다면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인가?

한국 교회는 오직 믿음,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를 이루어야 한다. 대한민국 사람은 자기에게 적합한 의식 세계가 있다. 원효의 가르침이 가장 적합한 의식 체계이고, 김기동의 체계도 그렇다. 그러한 자연 의식에 기독교 핵심 용어를 교모하게 적용하여 이끄는 방식은 부당하다. 기독교는 죄사함의 종교, 죄된 본성을 개혁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목표한다. 그 의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 개혁이다. 믿음에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내면의 정결, 평강, 담력을 추구한다.

이러한 작용을 성령께서 하신다. 대장간에서 연단된 믿음으로 부패한 세상을 기쁨으로 이기며 온유와 절제의 삶을 살 것이다. 행위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자. 마음의 두려움과 조급함을 두려워하자. 믿음의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힘을 주시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회가 구습을 떨쳐 버리고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주와 구주이신 예수를 바로 믿고 경배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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