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인은 성경적인 질서에 복종하도록 가르침 받지도 않고,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으면서 마치 성령께서 주신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크다.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이 추상적이므로 질병, 사고, 각종의 고통의 문제 등에 직면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교리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다. 신학, 즉 교리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이다. 이 교리가 논리학으로만 남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이 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이 두 극단 중 후자의 경우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물론 소수의 경우이긴 하나 교리를 논리적 작용으로 그대로 두고 있는 것도 참되다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예민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학을 지식적으로라도 먼저 습득하라고 말하였다. 지식의 습득이야 말로 성도가 신앙적인 면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의 지식에서 자라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신학생들과 교역자들의 임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연구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일이 그들의 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 (중략) 신학은 종교(복음적인 기독교)의 큰 임무에 관련된 모든 진리들과 모든 원칙들을 다 함축하는 학문, 또는 교리입니다.”(조나단 에드워드)

현대 교회의 문제를 알려면 교회사를 간단하게 살펴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와 성경을 중심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고, 모두가 진리를 선포한다고 한다. 모든 목사들은 자기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리와 신학은 위험하거나 최소한 신앙 성숙도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이는 종교개혁시대와 흡사하다. 칼빈이 자기의 조국 프랑스를 개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프랑스의 평신도들의 성경적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교인들 또한 성경적 지식이 부족하므로,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앙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갈라디아서를 통해 본 교리의 중요성

바울이 여러 교회를 책망했지만 갈라디아 교회만큼 심각하게 책망한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윤리적으로 매우 타락했던 고린도교회보다 더 큰 책망을 주었던 곳이다. 바을은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한 번이 아니고 연거푸 저주를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이다”(갈 1:8)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도대체 사도 마을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한 책망을 한단 말인가? 복음은 복음인데 다른 복음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6-7)

다른 복음을 가져온 자들이 누구인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에 속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 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 2:12)

그들은 자칭 야고보의 제자들이라 하는 자들이다. 야고보는 당시 교회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다. 야고보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들은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권세 있는 무리들이었다. 괜한 논쟁에 휘말리기 싫어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자리를 살짝 피하는 것을 봐서는 권세 있고 성가신 무리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가 필수적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그리스인으로 개종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별난 것이 아니었다.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할례를 해야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5)

그들의 말에 복종치 않는 이유는 진리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진리 밖에 거하는 것이고, 진리 밖에 거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구원에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하고, 이 말씀이 사도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 반면 잘못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사람들의 규례들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그 가르침을 사도들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면 곧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갈라디아에 와서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행위 구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완전히 뒤바꾸지는 않았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를 외치지 않고 ‘예수를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하고, 특히 할례를 통하여 구원 받자’라고 외쳤다.

이 차이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다. 입으로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라고 하지만 그 생각과 행동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살짝 들어감으로 ‘예수님’을 약화시키고 결국 구원의 도에 은혜 외에 나의 의지가 곁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은 ‘오직 예수’ ‘오직 은혜’의 교리에 인간의 행위를 넣고자 한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성경 해석에 관한 공의회가 열리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많은 교회가 ‘사도행전 때와 같은 교회’를 꿈꾼다고 한다. 모든 교회가 모체로 삼고 있는 사도행전적 교회는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교회의 최대의 약점은 수많은 이단들을 방어할 교리적 체계가 부족한 것이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많은 이단들이 교회를 공격하였다. 초대교회는 교리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2-3 세기 기독교 안에는 유일신을 믿었던 사람, 두 신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 심지어는 365가지의 신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람, 반대로 이렇게 불행이 만연한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을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경을 하나님이 직접 계시해서 썼다고 주장한 사람들과 신약만 참된 성경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구약은 악신이 계시한 것이라고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에게 신성과 인간성이 동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예수는 신일뿐 인간이 아니라는 사람, 인간일 뿐 신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일시적으로 예수의 몸을 빌려 설교와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였다고 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자기들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성경을 읽으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단 말인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순수함은 있었지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선명한 지침은 없었다.

이후 성경이 완성되었음에도 이단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문제는 성경에서는 이런 이단들의 정보를 뚜렷이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초대교회에 이단들의 활동이 많아서 2세기 후반에 활동한 교부 이레니우스가 <이단논박>을 써야할 만큼 기독교는 심학한 혼란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초대교회의 순결과 순수함을 불안하게 하였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존재한 이단들은 악의 기원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존재하여 어느 때고 다시 머리를 들고 나타난다. 이단들의 목표는 순진한 자들을 노리는 것이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사도들의 가르침은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였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을 교리라 하면 이 교리야 말로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구분해 주는 핵심이 된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이 교리 체계가 없으면 또 다시 이단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단들은 성경을 들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성경을 자기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꾀하여 갈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다.
 

예루살렘공의회

지금부터 앞에서 말한 다른 복음을 가져온 자들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을 외쳤으나,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은 믿음과 할례를 행함’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이때부터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싸움이 시작된다. 이 회의 장소에서 유대주의자들은 당당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의 성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리새파 중 믿는 사람’이다. 즉, 같은 예수를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고 무시 할 수 없는 수준이 있으므로 사도와 장로들은 오랜 시간 동안 토의를 진행해야만 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 15:6,7)

베드로의 경험과 바울의 경험을 듣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 수장인 야고보가 또 말하였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였으니 ...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행 15:15-19)

사도와 장로들도 모세의 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사도들은 전부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성경 해석이다. 어느 목사나 자기의 설교가 성경적이라고 말할 것이며, 모든 교회들이 성경 중심이라고 말할 것이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내 설교는 비성경적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성경을 올바로 알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고, 그 의미들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파악해서 알아야 하지만, 이를 위해선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므로 믿음의 선배들이 피 흘려 만들어 놓은 교리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곧 신학이다.

바울은 이런 종류의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항상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 교회에서 삼 년 반을 가르친 후 떠날 즈음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흉악한 이리가 나타날 것이 기 때문이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행 20:29)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있다.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비판정신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비판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시킨 듯하다. 진리는 비 진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진리가 있는 곳에는 항상 비진리가 있다. 진리로 비 진리를 분별하게 되어 있다.

교회 내에 들어온 흉악한 이리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급의 사람이다. 예수께서 보내시고자 했던 그 성령이 바로 나다’고 무식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다간 모두가 그 사람을 의심할 것이다. 진정한 킬러는 자기를 감추는 법이다. 이단 같지 않는 이단이 무섭고, 사이비 같지 않는 사이비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좆는다고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도를 좆는지 모른다. 이들은 사실 그리스도의 도에 관심도 없다. 이들은 주님을 따르지만 결국 주님은 마지막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할 것이고, 성경의 표현대로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이를 갈며 우는 이유는 자기는 일평생을 주님을 따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인데 그들도 구원을 얻지 않을까요?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며 성령의 역사는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는 곳에서 일어난다. 오류(잘못된 가르침)가 있는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