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0회)

거짓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예언은 영분별 은사로 분별 한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이 본문을 29절의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와 연결시켜서 보면, 두 본문이 서로 같은 구조로 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언하는 자들이 둘이나 셋이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이 예언을 분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 예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방언을 말하고 한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제 문제의 본문인 28절을 살펴보자.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

오순절주의자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예배 때 회중 앞에서 방언을 말할 때 만약 통역의 은사자가 없어서 방언을 통역할 수 없으면, 회중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집에 가서) 개인의 덕을 위해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면 된다. 바울은 여기서 방언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는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자제하라고 권면한 것이다.1) 물론 이때 혼자 하는 방언기도는 통역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27-28절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의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역이 없다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통역 없이도 얼마든지 방언의 의미를 아실 것이다. 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언을 말한다(오순절주의자들은 이것을 방언의 오용 또는 남용이라고 말한다) 해도 하나님이 이들의 비밀을 들으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이런 심오한 방언기도는 아무리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할지라도 예배에서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바울은 왜 이런 방언을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거짓 방언이 난무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조금 과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본문을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을 ‘방언을 말할 때에 그곳에 통역의 은사자가 없으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석이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같은 문장 구조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말하는 바로 뒤의 문장, 즉 바울이 예언을 분별해 거짓 예언을 가려내도록 영분별을 말한 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해석은 전지전능하신 성령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신 성령이 통역의 은사자가 없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방언의 은사자에게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하게 하시겠는가? 그래서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한 것이 다 헛수고가 되게 하고, 할 수 없이 그 사람은 집에 가서 혼자 그 방언을 다시 하도록 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성령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시는 바보 하나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2:4) 말하는 은사다.

그렇다면 성령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실수하지 않도록 반드시 그 자리에 통역의 은사자도 준비해 놓으신다. 성령은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시다(롬11:29). 그래서 바울은 거짓 예언과 거짓 방언으로 말미암아 무질서해진 고린도교회의 예배를 염려하며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고까지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배에서 통역자가 없는데도 누가 방언으로 말하면 그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거짓 방언이 틀림없다. 그래서 28절에서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한다.

왜 이런 명령이 가능한가? 만약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바울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방언을 함부로 멈추라고 명령할 수 없다. 또 설령 바울이 “잠잠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스스로 멈출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짐짓 성령의 은사인척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스스로 말하고 멈출 수 있을 것이다.2) 따라서 바울이 27절에서 방언 통역을 명령한 것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 고린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함이었다.

뒤이어 나오는 29-32절을 보면, 성령은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주실 때 예언을 분별하는 영분별 은사도 반드시 함께 주셔서 예배에서 시행되는 예언들을 분별하게 하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이 예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할 수 없으므로 섞여 있는 거짓 예언으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이 실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에서는 영분별의 은사자 없이 예언의 은사자가 예언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예배에서 예언의 은사자에게 예언을 하게 하실 때는 반드시 예언을 분별하는 자들도 세우셔서 예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하게 하시고(고전14:29), 마찬가지로 방언으로 말하게 하실 때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들을 세우셔서(고전14:26) 방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하게 하신다.

그러면 바울은 왜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고 말했을까? 지난 예배 때 참석했던 통역의 은사자들이 이번 예배에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는 말의 진의는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 통역의 은사자가 여러 명 있는데도 그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한 명도 없으면’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거짓 방언을 말하기 때문이다. 통역의 은사자가 아무리 많아도 울리는 꽹과리 같은 소음에 불과한 거짓 방언을 통역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본문에 언급된 방언은 통역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언인데 단지 그곳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므로 집에 가서 혼자 하라는 것이라고 우긴다. 따라서 이들은 2절, 4절과 함께 28절도 바울이 개인의 덕을 위한 개인용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28절에서 바울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개인적인 방언기도를 명령했다고 하면서 28절이야말로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고전14:2), 그래서 개인의 덕을 위하는 은사(고전14:5)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사실일까?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가 바울이 개인적인 방언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을 다시 보라. 바울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자들에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한 뒤에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집에 가서 혼자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말은 방언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알선해 주는 말이 아니라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바울의 냉소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수준의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이런 냉소적인 말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 비해 고린도전서에서 냉소적인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상식 이하의 행동들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냉소적인 표현의 예를 고린도전서 안에서 하나 살펴보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이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겉보기 말대로 고린도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아 충족성에 빠져, 복음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여겼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며, 이런 자들의 슬로건이 ‘우리는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왕들이 되었다’였다.3) 본문에서 바울은 이 슬로건을 인용해 냉소적으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함으로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냉소적인 말을 염두에 두고 8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이미 배부른 자들이 되었구나(너희는 이미 부요한 자들이 되었구나). 우리를 떼어 놓고 너희는 벌써 왕이 되었구나! 실제로 너희가 이미 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함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개역 성경 번역은 본 절 후반부의 뜻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 유의)4)

따라서 본문의 냉소적인 표현도 문자대로 받아들이면 바울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다(그러나 방옹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에 대한 바울의 냉소적인 표현들을 모조리 문자대로 받아들이며 좋아하고 있다!). 이제 밑줄 친 부분에 유의해서 바울의 냉소적인 말의 진의를 살펴보자.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

본문에서 바울은 개인용 방언기도를 인정하고 있는가? 통역이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해서 안 되는 방언을, 집에서 혼자 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 교회에서는 새는 바가지라도 집에 가져가면 안 샌다는 말인가?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본문에 앞서 26절에서 예배 때 사용되는 은사들을 나열한 뒤에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명령한 바울의 말을 고려하면, 결코 개인용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떤 예외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28절을 바울이 개인용 방언을 인정하는 말이라고 우긴다면,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바울의 말과 명백히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개인용 방언을 우기는 자들은 자신의 성경에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바울의 말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 회중 앞에서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회중들이 그 방언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이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익이 없기는 뜻을 알지 못하고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어떤 자가 회중 앞에서 예언했을 때 회중이 그 예언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회중에게 한 예언은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동시에 예언한 자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예언한 당사자에게도 그 예언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무익함은 예언하는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뜻을 몰라서 회중에게나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없는 방언이, 방언하는 장소를 교회에서 집으로 옮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는 무슨 의미일까? 바울은 교회에서 하면 안 되는 쓸모없는 방언을 왜 집에 가서 혼자 하나님께 하라고 했을까? 19절에서 바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해 놓고, 어째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다섯 마디보다 못한 방언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다섯 마디 인간의 언어보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 하늘의 언어를 더 좋아하시기 때문일까?

바울은 본문에서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은 회중 앞에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방언기도의 대상을 “자기와 하나님”으로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방언기도를 하나님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하라는 말이다. 결국 이것은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자기가 하는 방언기도를 자신이 하나님처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말로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은사가 아닌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포스트모던 시대, 특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뉴 에이지 사상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다.

만약 바울이 방언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이라고만 했다면, 물론 바울이 방언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이라고만 했다 할지라도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이 결코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억지를 부릴 여지가 조금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자기)와 하나님을, 대등(동격) 접속사 ‘카이’(kai., 그리고)로 연결시켜 “자기와 하나님”으로 표현함으로, 그런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거짓 방언으로 떠드는 자들에게 하는 냉소적인 말임을 드러낸다. 바울이 거짓 방언자들의 말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방언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너희는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니 여기 회중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너나 실컷 들으면서 하나님께 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기도를 듣는 대상을 하나님과 기도하는 자신까지 하나님과 동격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이들의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혼자서 중얼거리는 헛소리임을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어떤 기도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사실상 미친 수준의 짓이다.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방언기도가 이렇다는 말이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바울의 표현은 결코 정상적인 기도의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거짓 방언의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방언기도를 한다고 한다면 그 방언기도를 듣는 자는 사실상 방언기도를 하는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다!

개역개정에서 “자기(자기에게)와 ~ 말할 것이요”로 번역한 헬라어 ‘에아우토 데 랄레이토’(e`autw/| de. lalei,tw)를 영어 성경에서는 ‘speak to himself’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다’ 즉 ‘중얼거리다’이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넋 놓은 상태에서 헛소리 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자기에게 기도하듯, 그것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혼자서 하는 방언기도는 넋 놓은 상태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제정신이 아닌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5)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을 무분별하게 함으로 예배를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에게 “거짓 방언으로 다른 사람들의 귀를 괴롭히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떠들고 혼자 들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고린도 교회의 방언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느 고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영어 시간의 상황을 예로 들어 보자.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 상황은 아니다.

영어시간에 영어를 잘하는 한 학생이 반 아이들의 듣기 실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 앞에 나가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있다. 그때 시샘 많은 어떤 학생이 일어나 선생님에게 말한다. “저도 앞에 나가 영어로 말하게 해 주세요. 저 학생보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그 학생은 학생들 앞에 나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학생이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는 학생이 없다. 왜냐하면 그 학생이 하고 있는 말은 영어처럼 발음해서 영어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은 영어가 아닌 그저 잡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영어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그 학생을 제지한다.

그러나 그 학생은 화를 낸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진짜 영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그때 선생님은 “누가 이 학생이 하는 영어를 통역해 보겠어요?”라고 말한다. 다시 그 학생은 영어 같은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한다. 그러나 통역을 잘하는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통역할 수 없어요.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영어가 아니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학생은 계속 우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분명히 영어야! 단지 너희가 수준이 낮아서 알아듣지 못할 뿐이야! 내 영어는 영어의 신(神)은 알아들어! 나는 지금 영어의 신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말하고 있거든!”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말한다. “그러니? 네 영어는 참 대단하구나! 그러나 네가 말하는 영어가 아무리 대단해도 다른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 여기 교실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서 하든지 너의 영어 신에게나 하려 무나!”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통역하지 않은 방언’이 아니라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통역할 필요가 없어서 통역하지 않았을 뿐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아예 통역할 수 없는 방언, 즉 아무 의미가 없는 꽹과리 소리 같은 거짓 방언이었다. 바울은 이런 거짓 방언을 통역의 은사로 분별해서 교회 밖으로 퇴출시키도록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고 있다.

--- 각 주 ---

1) 캐네스 헤긴, 성령세례와 방언, 장혜영 옮김(서울: 베다니출판사, 2011), p.47. 그러나 이것마저도 오늘날의 방옹자들은 지키지 않고 있다. 통역 없이 방언을 하면서도 혼자서 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모여서 서로 경쟁하듯 하고 있다. 만약 이 본문이 개인용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개인용 방언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혼자 골방에서 방언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오순절주의자들은 집에서 혼자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로 경쟁하듯 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 어귀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보면 그 이유를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 같다.

2) 현대 교회의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만큼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언제든지 할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는 은사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 자랑은 스스로 자신들의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성령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다.

3) 빅터 C. 피츠너, 고린도전서, 이기문 옮김(서울: 컨콜디아사, 1990), pp.79-80.

4)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91.

5) 로버트 토마스는 ‘자신과 및 하나님께 말하다’는 ‘명상하다’를 뜻하는, 당시 잘 알려진 속담적 표현이라고 소개한다.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p.201. 결국 이 말도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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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