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교 초기에 사역했던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처녀 선교지에서 어떻게 선교 방향을 정립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중국에서 활동하던 구프린스턴 출신의 네비우스선교사를 통하여 2주간의 특강을 듣게 된다. 이들은 네비우스가 제시한 원리들을 그대로 수용하여 조선선교의 원리로 삼고 1891년에 일련의 규범과 세칙을 채택한다. 그리고 조선에 처음 온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 후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면 그 선교원리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일까? 조직적이고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하여 현지인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선교사들은 성경을 모든 사역의 중심에 두었으며,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배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했다.

네비우스는 왜 이렇게 성경공부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현지인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운영되며 확장되게 하려면 최대한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교회의 회원권이 주어지지 않아야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 진실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많아지게 되면 결국 교회 전체의 경건의 능력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청교도들의 교회회원권 원리를 따라 학습, 세례 제도를 두었다. 단순히 신앙고백만 확인함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학습제도를 통하여 성경적인 진실한 신앙고백과 함께 거듭난 자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 세례를 베풂으로서 교회의 회원권을 남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진실로 거듭난 자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어 운영되어질 때 비로소 교회는 복음의 능력과 함께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복음을 심어준 선교사들이 꿈꾼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네비우스선교원리와 함께 한국교회에 뿌려진 복음이 얼마나 성경적이었는지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선교사들이 사용한 전도지와 전도책자들의 내용이다. 우선 1890년 번역되어 출판된 '성교촬리'라는 전도책자의 마지막 부분은 믿겠다고 하는 결심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리의 도를 더욱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교회의 성경공부로 나가라는 권면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1898년 1월 27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성급하게 믿겠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우선 성경을 보고 그 뜻을 깊히 깨달아야 하며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김홍만,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에 대한 논쟁들).

두번째 김홍만 교수님을 통하여 다시 번역 출판 된 장원양우상론이라는 전도용 소책자가 있다. 이 소책자는 스코틀랜드 출신 중국 선교사 윌리엄 밀른이 1819년에 쓴 전도용 책자로, 1896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글판으로 번역해 들여와서 전도용 책자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간략하게 제시하는 소책자이지만, 각 교리의 핵심되는 내용들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실용주의적이거나 이기적인 내용(형통과 번영신학, 긍정론, 자존감)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세번째로 1891년 게일선교사가 '텬로력뎡'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여 전도책자로 쓰인 천로역정을 꼽을 수 있다. 천로역정을 읽었던 당시의 교인들이나 전도대상자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짐 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의 십자가도 지셨음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식의 3박자 축복으로 기독교를 이해했을까? 그들은 이 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짐을 벗은 후 그리스도인의 삶이 순례자의 삶, 이 땅에서 형통하고 잘되는 복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소망을 두고 모든 유혹과 의심,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는 종교, 성화되는 종교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 100년이 조금 지난 오늘날의 교회의 전도원리와 복음의 내용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우선 성경중심적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결연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초기선교사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보다는 부흥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거룩함을 지키기 보다는 교회의 몸집을 불리기 위하여 성경은 단지 보조수단에 불과하고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인위적인 성령체험을 위한 CCM과 온갖 신비주의 운동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CCM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의 고양과 카타르시스, 알파코스, 관상기도, G12, 두 날개등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방언이나 입신, 환상과 예언을 성령체험으로 착각하여 자신도 구원 받은 신자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했다. 이런 자들이 성경적인 기준보다는 종교적인 열심을 근거로 경건하고 능력있는 자로 분류되어 교회 내의 요직에 앉게 됨으로서 결국 비신자들이 갖고 있는 세속원리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성경의 교리는 오히려 교회 부흥의 장애물로 치부됨으로 완전히 무시되고 만다. 이렇게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체험을 탐닉하는 가짜 신자들이 교회들을 채우면서 신앙의 기준도 성경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더 앞세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2-4)

모든 목회자들이 고린도교회를 정결한 신부로 주 앞에 세우고자 했던 바울과 같은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 목표를 갖고 교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칠 때, 누가 와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좇을 수 밖에 없다. 릭워렌, 조엘오스틴, 리차드포스터, 조용기, 호주의 조용기로 불리는 브라이언휴스턴, 싱가폴의 조엘오스틴으로 불리는 조셉프린스, 심지어 이만희와 장길자, 신옥주의 말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흔들릴 뿐 아니라 실지로 미혹되었는지 모른다. 

100년 전 이 땅에 자신의 젊음과 생명까지 바치면서 성경적인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속화된 모습을 보고 얼마나 탄식하고 있을까? 비록 지금은 민망함과 죄송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지만 훗날 주님 앞에 그들과 함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인위적인 방법을 통하여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모든 세속적인 프로그램을 퇴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복음을 깨닫고 거룩하게 성화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제라도 네비우스선교원칙대로 한국교회가 성경중심으로 돌아갈 때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됨으로서 주님 앞에 순결한 신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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