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사진은 오래전부터 중보기도 운동을 펴처온 JaMa의 중보기도 컨퍼런스 홍보이다.

다른 모든 종교들에게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는 존재가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합당한 조건과 수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른 종교들의 특징이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계발하여 영적으로 도약하는 것이 다른 모든 종교들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오직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일하실 중보자를 세우셨다. 중보자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대신 감당하게 하셨다. 죄인들에게 중보자를 믿도록 역사하시고,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죄인들을 기꺼이 자기 백성으로 다시 회복시켜주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말미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반드시 하나님께 말씀드린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기독교는 중보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구원도 오직 중보자의 중보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기도, 예배, 찬양, 봉사 등의 모든 활동에서도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가 빠지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중보자 없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중보자 개념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정확하게 배우고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위해 중보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는 중보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죄인과 하나님 양측을 만족시키는 중보사역을 완전하게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중보자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중보개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던 구약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영역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중보의 기능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이론을 세우면 반드시 사단의 큰 장난의 빌미가 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피터 와그너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신사도운동이다. 피터 와그너는 하나님께서 70년대부터 중보자들을 일으키셨다고 주장했다. 중보자들의 기도로 신앙의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1980년대부터 선지자들을 일으키셨고 마지막으로 사도들을 일으키시어 신사도들의 시대가 2,000년부터 개막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사도 선지자들은 전부 중보기도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성경적인 ‘중보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통해 마귀가 만들어 낸 큰 물결이 신사도운동인 것이다.

피터 와그너와 신디 제이콥스 등의 신사도운동의 대표적인 사도들이 일찍부터 중보기도운동를 이끌어 온 중보기도 대장들이라는 사실은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인 중보사역을 인간이 넘보게 됨으로서 일어난 마귀의 역병이 신사도운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들에게 기도의 큰 권세가 있어 명령하고 선포하는 식으로 중보기도하면 사탄이 결박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된다고 하였다.

피터 와그너 등의 영향으로 많은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에게 기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한다는 위험스러운 기도사상이 퍼졌다. 인터콥(최바울, 이지애), 에스더기도운동(이용희), 큰믿음교회(변승우, 김옥경), 엘리야기도운동(김종필), 아이합(미이크 비클), JaMa 중보기도 컨퍼런스(김춘근, 강순영) ...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중보기도 단체들이 우리 주변에 들어서서 거짓 기도의 역병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마귀는 중보기도 사상을 통해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다. 그 영향을 받은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한 동안 여러 교회들의 ‘중보기도 팀’은 그 교회의 가장 불건전하고 영적으로 위험스러운 사람들이 모이는 동아리였다. 특히 ‘중보기도 팀장’이 되는 사람은 무녀 또는 박수무당 수준의 사이비 영성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중보’를 감히 사람이 취하려는 교만이 일어났고, 그것을 마귀가 크고 귀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버젓하게 교회들의 여러 문서들과 홈 페이지 등에 ‘중보기도’라는 항목이나 용어를 그대로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로 대다수의 목회자들에게 기본적인 신학개념이 없다. 신학개념이 없다는 것은 사소한 허물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는 것이고, 곧 마귀가 치고 들어오는 방식과 전략에 대해 무지하므로 마귀가 자연스럽게 애용하는 애완견 목회자가 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중보라는 용어와 개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지금 일부 교회들과 단체들이 하는 것처럼, 사람의 기도에 중보개념을 적용하면 계속해서 마귀가 일으키는 기도의 역병이 퍼지지 않을 수가 없다. 죄인들은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와 효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지금 천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영속성을 확신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구?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기도를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죄인들과 하나님 양측에게 완전한 만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흘리신 피는 원래 마땅히 우리 죄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저주를 받아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그 일을 당하셨고, 그리스도의 대신 당하신 그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100% 적법하고 당연한 요청

중보자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는 소망이 생겼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보시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멈추시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 양측에게 만족을 제공하여 효력있게 중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다.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다음과 같은 나약한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 가급적 저 죄인을 벌하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천상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당당하게 하나님께 이렇게 요청하신다. 이미 죄인을 위해 100%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속죄를 십자가에서 드리셨기 때문이다. 

“내가 저 죄인을 위해 이미 죄 값을 치렀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시고 죄인을 당연히 보호하시고 영원히 구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요청(중보기도)를 결코 무시하지 못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친히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제사에 근거하여 마땅한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죄인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내용을 하나님을 다 들어주신다. 들어주시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를 지심으로 합당한 자격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중보가 영원한 구원을 보장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다. 이와 같은 중보자가 우리에게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가 노력하여 얻은 구원이라면 영원한 구원이라 할 수 없겠지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하여 얻은 구원이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인 십자가를 보신다. 앞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라도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적법하고 효력있게 은혜를 요청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오직 십자가에서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일이고, 그의 중보기도를 받는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안전한 것이다.

인간이 감히 이러한 중보기도를 한다고 나서면 마귀가 좋아서 뛴다. 적절한 체험과 거짓 은사들을 주어서 더 열성적으로 하게 한다. 제대로 중보기도 빨 받아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맛을 본 사람들이다. 중보기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치고 거짓된 방언기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지 보라! 중보기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Satan의 거짓 은사를 받아서 교회를 더럽히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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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