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을 다시 음미한다

지난 해 4월 13일 주일 예배 직전에 저의 두 아들 은수(8)와 은성(6)이가 침례(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그 이전부터 침례 받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침례를 아직 받지 않은 것(또는 집례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속히 침례 받기를 훨씬 이전부터 바랬습니다. 그래서 늘 침례식 이야기가 나오면 이번에 받는지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1년 전 버지니아 린치버그에 있을 때 침례를 받을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맡은 사역에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우리 아이들이 받아야 할 침례의 기회는 무시되고 이곳 캘리포니아로 이사 와서야 지난 해 부활절을 앞두고 아이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바램에는 의례히 받아야 할 것을 자신들은 받지 않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한 어린 아이들이 가진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 믿으면 침례 받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나 다른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아빠가 침례교회 목사니까 어릴 적부터 침례라는 단어가 익숙해서 침례 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기다려지는 일일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침례를 받기 전날에 두 아이를 불러서는 “이제 너희 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너희도 주님 안에 산 자들이 되었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표현하는 것이 침례의 의미”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 오후에 두 아이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받은 이후 둘째 아이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하는 말이 "아빠 물이 너무 차가웠어"라고 답하는 것을 들으며 내가 너무 과한 신앙고백을 아이에게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대답을 들으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아이의 침례식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침례의 의미를 일러 주긴 했지만 아이들이 아닌 "나 자신은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과 더불어 살고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식인가? 내용인가? 

우리 믿음을 가진 이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침례는 주님과 더불어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새 생명으로 연합할 뿐 아니라(롬6:4-5)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 가운데 완전히 죽은 자임을 시인하는 죽음의 연합(롬6:3)도 포함된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산 자가 되었음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침례(세례)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내용과 더불어 우리의 신앙고백을 드러내는 형식으로서의 침례를 중시하는 의미로 교회의 이름에서부터 00침례교회라 표현하여 침례를 더없이 중요시 여깁니다.

마태복음 28:19에는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제자를 삼으라"는 주된 명령을 주시고 거기에 더해 "가서," "침례(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차대한 지상 명령 중에 "침례(세례)"가 포함된 것으로 봐서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순종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으로서의 침례(세례)를 주님이 의미하셨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식에 도취된 그리스도인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침례(세례)"라는 단어를 들으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침례(세례)"를 머리에 물을 뿌려서 받는 세례이든지 아니면 물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으로든지 상관없이 "형식"으로써 침례(세례)를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단 침례교회 목사인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인 역시 침례(세례)라는 말을 듣고 이해할 때 1차적으로 "형식"으로써의 침례가 먼저 저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는 "그래 나는 침례를 받았어, 초등학교 5학년, 부산 연산동의 침례교회에서 분명히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어"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래 나는 주님과 더불어 죽었었지, 그리고 그때 주님과 더불어 새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8:19절에서 "침례(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신 바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는 앞으로 제자를 삼아 그들이 믿음을 고백할 때 "물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 또는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식의 외적인 형식으로써의 침례(세례)를 주라"고 하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네 물론 형식도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온전한 내용을 품지 못할 수도 있음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형식의 측면으로써 "침례 또는 세례"를 말씀하시기 보다는 "이제는 너희는 죄에 대해 나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의에 대해 나와 같이 산 자로 여길 것"을 의미하는 내용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삶 가운데 주님의 죽으심과 주님의 부활하심에 온전히 참여하고 순복하는 자가 될 것을 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써 침례(세례)를 말씀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죄에는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

그러하기에 진정한 의미의 침례(세례)는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해서는 온전히 죽은 자로 살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도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침례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침례를 받고 세례를 받는 그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침례(세례) 받은 자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침례(세례)의 의미가 우리 삶 속에 잘 나타나지 않는 다면-다시 말해 내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의 뜻을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삶의 모습이 외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다면-침례(세례)받는 것은 어쩌면 껍데기요, 주님이 그렇게 바리새인들을 향해 책망하시던 형식과 가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매일 매일 침례(세례) 받는 삶

그런 의미로 우리는 매일 매일 침례(세례)받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물에 들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금 잠기든지 또는 매일 새벽마다 머리에 물을 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늘 우리는 "나는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서만 사는 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죽음의 물과 생명의 물을 경험했지만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아를 들여다보면서 저는 문득 문득 침례(세례)식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침례(세례)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그런 의미로 보면 저는 여러 번 물 속에 들어가야 했던 재 침례파(세례)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두 아이의 침례(세례)를 지켜 보면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되기를 바라는 그들을 향한 기도가 다시금 제 자신을 향한 기도로 되돌아 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의미하신 "침례(세례)"를 다시금 생각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는 죽고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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