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도 기괴한 기독교가 나온 것은 교인들의 성경적, 교리적 지적 수준을 초등학생과 같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든, 전문직에 있든지 상관없이 교인들이 교회 내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정도의 신학 지식으로 무장된다. 교회에서 제공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제공된다.

한때 기독교 서점에서 수개월 베스트셀러였던 책들 중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책이 몇 권 있었다. 많은 청년들은 그 책으로 인생의 변화를 겪었다. 필자는 그 책들을 유초등부 수련회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읽게 하였다.

수련회 기간 내내 오전 시간은 모든 것을 금하고 책을 읽게 하였다. 점심 먹을 때까지 읽어야 했다. 하루에 한 권을 끝내야하기에 새벽부터 읽게 하였다. 다 읽게 되는 시간이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과연 초등학생들 (4-6 학년) 이 청장년을 대상으로 쓰여진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수련회 사흘을 괜히 버리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오전 시간에 한 권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해 보기로 마음먹었고, 결과는 놀라웠다. 초등학생들이 오전 내내 한권을 읽는 독파력을 보여줬고 독서 토론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였음을 보여 주었고 받은 감동을 나누기도 하였다. 수련회 사흘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있다.

이런 수준의 책을 청장년들이 읽고 고백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인 신앙 서적 중 적지 않은 책들이 이 정도의 수준이다. 화장실에 들어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 시간만으로도 다 읽을 만한 책들이다. 게다가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경책도 많이 읽지 않지만 신앙서적은 더욱 읽지 않는다. 신학적, 교리적 서적을 평신도가 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목사들의 계속 되는 비지성적 설교의 파괴력은 대단하다.

교회 내 지성적 수준이 이렇다 보니 평신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미지이며 이것에서 파생되는 감동이다. 어떤 말씀이 교리적으로 올바로 선포되는지, 성경적으로 옳은지 관심이 없다. 어떤 느낌을 주는가가 중요하다.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이며, 설교자는 이를 통해 성도들과의 친밀성을 추구한다.

이런 곳에서는 얼마든지 기술적인 조작이 가능하다. 더 이상 실제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앉아 있는 회중들은 딱딱한 교리적 설교보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 개인적 이야기를 좋아한다. 소설 같은 이야기는 그림 언어라 표현하면 되고 개인적 이야기는 큐티식 설교라고 하면 된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감동하느냐이다. 설교자와 성도 사이에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그 속에 속임수가 등장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설교는 큰 재난이나 유명인들의 스캔들 등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위 공무원의 성추문은 매우 고무적인 설교의 화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서론으로 시작하여 교리적으로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과거의 사단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신학에서 음모를 꾸몄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교인들의 관심은 이미 교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현실은 답답하다. 이런 현실을 이겨낼 방법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우리는 믿는 자이므로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란 구절은 이들에게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크 프리칭(junk preaching)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설교자는 두말할 것 없이 정크 프리처 (junk preachers)이다. 미래는 소원대로 될 거라는 상투적인 메시지에 만족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 이런 설교자들에게 매주 정크 푸드(junk food)를 먹은 성도들은 머지않아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어있다.

만들어 놓은 설교에 영양가가 없자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명성으로 설교의 권위를 인정받고자 한다. 사실 기독교에 관심도 없는 대학 교수들, 심리학자들, 정신과 의사들, 전문직 종사자들이 말한 것들을 설교자의 주장을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하는 설교자들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설교는 TV 나 공공기관, 회사에서 행해지는 강연과 매우 닮아 있다. 진리 추구는 필요 없다.

교인들은 이러한 명문 대학 교수라는 믿음직한 직함(하나님이 아니라)에 안심하고 듣게 된다. 믿음의 선배들이 애써 지켜왔던 그 순수 복음으로 증명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설교자는 ‘우리 인간이 겸손해야 한다’는 그 근거를 전문가나 교수들의 강연이나 책에서 도움을 얻고 있다. 이게 사기극이다. 교인들은 이제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들을 환상으로 이끄는 것은 어렵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현실이 어렵게 되면 될수록 허구와 환상으로 현실을 잊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그 바람은 더 간절하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과 진리가 뒤바뀌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환상을 팔야 이익을 남기게 된다. 

이런 맹목적인 집단에서 지어낸 허구의 현실에 볼모로 잡힌 교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빼앗겨 버린 상대에 처한 사람들이다. 갈길을 모르며, 혼동하며,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스포츠를 제공하거나 초월적 환상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이 대중들을 통해 ‘악의 실행'이 가능하다.

모든 독재와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박사와 같은 깊은 지식은 필요 없다. 평균적 지식과 자기비판이 있는 군중만 되어도 독재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못하게 하는 집단은 의도는 선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코 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영적 독재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지식은 정경이 요구하는 평균적 지식에 현저히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전문 용어를 써가며 상아탑으로 들어가 버리고, 교인들은 신학과 교리를 완전히 상실해 버려 이 두 그룹은 단절된 상태이다. 평신도들이 역사신학을 조금만 알아도 지금 몇몇 대형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교회사에서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던 것임을 쉽게 알 것이다.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교회사적 지식들이 전무한 상태이다. 역사를 모르니 개인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고, 자아를 모르니 언제까지나 영적 유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형 교회에 앉아 있는 성도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교회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어느 곳에 있느냐가 성숙되었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딱딱한 교리에 대한 설교를 듣지 못하고 언제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만 문제는 완전히 자기기만에 빠져 영구 유아 상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유아가 되어 자신의 영혼에 자신이 없어지자 환경에 의지하려고 한다.

몇몇 대형 교회들이 지교회를 세우면 곧바로 수천명이 등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교회의 명성이 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영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자 유아처럼 외적인 것에 현혹되고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처럼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이곳 저곳에 교회를 세우는 대형 교회나, 그런 대형 교회의 지교회가 들어온다고 교회를 옮기는 교인이나, 그런 대형 교회가 생기면 이사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지역교회 목사나 다 한통속인 것이다. 대형교회는 대형마트이고 지역 교회는 슈퍼마켓이고 교인들은 고객이란 말인가?

성도들은 자기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청산유수와 같지만 성경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침묵하고 만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라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겸손함의 침묵이 아닌, 반지성주의에 의한 침묵에 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그의 책 「목사와 설교」 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독서 목록이 있는데, 첫 번째는 당연히 성경이고 두 번째는 청교도들의 경건서적, 세 번째는 청교도들의 설교집, 네 번째는 신학서적, 다섯 번째는 교회사, 여섯 번째는 청교도들의 전기, 일곱 번째는 변증학을 읽으라 권한다. 참으로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 계속 되풀이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순서상 다음으로 (성경읽기와 기도 이후) 말씀드리려는 것은 “경건한 독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청교도들의 책을 읽는 것을 서슴지 않고 이 범주에 집어넣겠습니다(...) 그들의 책을 읽을 때 그들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동시에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작용해 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같은 조항 아래 설교집을 읽는 것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음으로부터 얻었던 도움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독서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보다 지적인 독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신학입니다. 여러분이 신학교를 졸업할 때 신학수업은 끝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습니다. 설교자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신학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으면 많이 읽을수록 더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저서의 저자들이 있고 공부하기에 여러 다른 체계도 있습니다. 나는 목회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졸업을 한 뒤 독서를 중단하고 생활의 여러 다른 면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는 일이 없이 지내게 되고 아주 무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설교자의 훈련에 관해 생각할 때 강조했던 것-즉, 교회사를 읽는 것의 중요성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나 일기를 읽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다음 순서는 변증학에 대한 독서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익히 아는 것은 설교자의 임무입니다."(로이드존스)

한국 교회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말, 별 볼일 없었지만 위대하게 된 사람 예컨대, 링컨이나 십일조왕, 백화점왕 등의 이야기로 온통 정신이 팔려있고 교리나, 교회사, 기독교 세계관 등에는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다. 왜 성경과 교리를 열심히 공부해야만 하는가? 스스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잘못된 것으로 열심을 낼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과 언행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 분별해야 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이들은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다"(딤후 3:13)

그럼 무엇으로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사도들이 이미 한 말들을 기억함으로 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한 말을 기억하라"(유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이라 말하며 잘못된 일에 열정을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반지성주의에 물든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하는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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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