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6회)

들어가는 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악’으로 규정하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엄한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21-25절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사야 당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던 이스라엘을 보여주면서, 고린도 교회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21절에서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까닭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정황이 이사야 당시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정황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본문 해석의 난제와 오석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14:21-25).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1-25절은 주석적 난제가 얽혀있는 본문이라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 주석가들을 가장 당혹케 하는 것은, 22절에서는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해 놓고, 23절에서는 불신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또한 22절에서는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고 해 놓고, 24-25절에서는 예언이 불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며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22절의 명제와 23-24절의 진술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1) 그래서 학자들은 모순처럼 보이는 이 본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필자는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먼저 오순절주의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김동수 교수의 견해와 방언폐지론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옥성호 형제의 견해, 그리고 또 다른 오순절주의자들의 일반적인 견해 몇 가지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2)

그렇다면 바울은 왜 방언을 말하면서 위 이사야서 구절을 인용한 것일까? 우선, 위 이사야서 28:11이 바울이 말하는 영으로 하나님께 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의 방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양자는 어떤 공동점이 있는가?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이유는 다음의 두 사실이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 “방언”이라는 어휘가 나온다는 것과 통역되지 않고 공적 예배에서 사용되는 방언처럼 선지자의 직접적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방언은 일종의 심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루뎀이 올바로 본 “이사야서 28:11과 고린도전서 14:23에서 공히 불신자들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방언만이다. 하지만 방언이 통역되면 이것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길한 표적의 기능을 유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울이 여기서 공격하는 것은 예배 시에 통역이 없이 중구난방으로 사용되는 방언이지 개인적인 기도로서의 일반적인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3)

김동수 교수가 그루뎀의 말을 인용해 주장한 대로, 본문의 방언은 ‘통역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불길한 표적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며, 개인용 방언(방언기도)이 아니라 통역 없이 남용되는 교회용 방언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통역만 하면 되는 방언이라면 바울은 5절과 13절에서처럼 통역하도록 제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는 통역 없이 남용되는 교회용 방언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통역이 불가능한, 그래서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거짓말하는(고전14:2, 4) 개인용 방언의 문제다. 다시 말하면 소위 방언기도라고 하는 개인용 방언으로 교회에서 저지르는 범죄의 문제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방언들을 살펴보는 거울로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유일한 성경 구절일 뿐 아니라 방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통해 방언의 본질을 해석하기보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건을 해석하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4)

"21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서는 분명한 외국어입니다. 따라서 방언의 본질을 정리하기 위해 근거로 사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이 외국어인 이상 바울이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5)

위 글에서 옥성호 형제는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28장 11절에서 앗수르 방언이 외국어이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외국어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 그리고 바울이 유일하게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방언의 정의를 내렸다고 생각한다.7) 물론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외국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이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외국어 임을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방언의 정의를 도출해 내려고 하거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사야서를 인용한 바울의 의도를 한참 비껴간 것이 된다. 그러면 위의 두 경우보다 더욱 황당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설명 몇 가지를 더 살펴보자.

그때, 바울의 글이 생각났다.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고전14:4)이라던 바울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방언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들을 위한 강력한 표적이다. 방언은 결코 알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에 임한 방언도 예루살렘에 온 많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기가 살던 지역의 언어로 방언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자기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이하 중략) ‘방언이란 이토록 신비한 능력이구나!’ 나는 가슴 깊이 감탄했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이기도 하다.8)

혹시 당신은 “로버츠 목사님, 만일 불신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누군가 방언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걱정하지 말아라. 방언은 아직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다.” 어떤 교회들은 방언에 당혹감을 느껴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밀어둔다. 그러나 방언과 방언 통역이 교회를 찾는 불신자들을 두렵게 만들까봐 두려워하지 말라. 방언은 그들을 위한 표적이다.9)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14:22) 이처럼 방언은 성도에게 여러 종류의 다양한 유익들을 가져다줍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방언의 유익에 대해 부정하면서 심지어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을지라도 거기에 무슨 유익과 가치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무지로 인해 소중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위험하고 무례한 주장입니다.10)

오늘날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는 방언을, 위의 예들처럼 이해하고 있다.11) 그런데 왜 이들은 22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불신자를 믿게 하기 위한 표적으로 설명했다고 여기는 것일까? 바로 다음 본문에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미쳤다”는 말을 황홀경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바울의 설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기본적인 전후 문맥도 무시한 채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유익이 있다고 말함으로 교회에 유익이 없는 거짓 방언의 약점을 감추려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한 편으로 신자들에게 방언이 주는 유익을 다음과 같이 선전함으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 방언기도는 표적이다.- 방언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소유한 강한 사람이 된다.
*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영적인 사건을 분별하는 데 한층 민감해 진다.
* 방언기도는 믿음을 굳게 한다.- 방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굳은 믿음이 생긴다.
* 방언기도는 언어 사용에 신중한 사람을 만든다.- 방언으로 성령님께서 입을 복종시켜서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
*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새 힘을 준다.- 방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신선함과 활력을 잃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 방언기도는 증인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방언이라는 기도 언어로 세계 전도에 기여한다.12)
* 영의 언어는 성령의 모든 성품과 임재,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삶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이다.
* 영의 언어는 하나님의 창고를 여는 열쇠이다.
*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온 몸에 생명을 공급하는 피를 보내는 심장박동과 같다.
* 영의 언어를 사용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지어놓은 영적인 발전소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맡겨 놓은 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백만 달러를 계좌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출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13)


방언에 대한 이들의 설명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고전14:22)와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본문이 말하는 전후 문맥을 외면한 채, 방언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선전함과 동시에 불신자를 (예수님을 믿게 하기)위한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이 불신자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이라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방언의 괴상한 소리가 주는 신비함이 불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결국 이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든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오순절 날을 예로 든 김우현 PD의 이야기가 이런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오순절 날 수많은 불신자들이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방언의 신비함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바로 뒤에서 직접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더 읽어보면 결국 그렇다는 말로 귀결된다).14) 그러나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방언의 신비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방언으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지 않고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든 방언폐지론자들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21절 이하를 오해하는 까닭은, 바울이 왜 여기서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는 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이사야 28장 11절의 앗수르 방언으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고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은 위함이다’는 말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진짜 의도를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21절에서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여 그 시대의 이스라엘이 예언 부재로 말미암은 심판의 위기 상황을 소개하고 있으며, 22절에서는 21절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이 예언 부재 때문에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과 앗수르 방언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22절을 접속사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21절(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과 22절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22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정의하거나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2절에서 바울은 21절에 인용한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은 바울이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본문이다.

 

--- 각주 ---

1)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62.

2) 여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싶다면 김동수 교수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p.62-79를 참고하라.

3)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68;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6도 참고하라.

4)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2.

5) 앞의 책, p.191.

6) 정이철 목사도 옥성호 형제와 같은 생각이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46.

7) 옥성호 형제의 이 주장을 놓고 김동수 교수는 ‘아마추어적 논증법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21).

8)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p.159-160.

9)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19.

10)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p.131.

11) 옥성호 형제도 오순절주의자들처럼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라고 생각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65-66.

12)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75.

13)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11), pp.110-113.

14)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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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