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 5

한국 교회에 톰 라이트의 저술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 IVP에서 많이 번역하였고, 몇 출판사에서 톰 라이트 저술을 번역했다. 김세윤의 저술은 기존에 저술들까지 모두 두란노에서 출판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했던 에세이들도 모두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책은 한국 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저자의 신학 전개가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톰 라이트의 저술은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정도다. 많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전개하는 톰 라이트의 전개 방식은 기존의 신학 전개 방식과 전혀 다르게 때문에 신선하고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미로로 들어가는 입문서를 만난 것이다. 톰 라이트에서 어떤 답을 내었는지 독자들의 명확한 제시는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승구 교수와 박영돈 교수가 비평적 읽기를 제시했지만, 중도적 입장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결국 톰 라이트의 대세에 편승하는 분위기다.

필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김세윤과 톰 라이트 사상을 잘 구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두 신학자는 예수를 인간 예수로 견지하는 큰 틀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밀하게 구분하는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학문을 하는 것은 연구자의 견해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를 독서하고 있는데, 김세윤은 저술에서 새관점 학파와 분명한 상이점을 수시로 제시한다. 다만 [칭의와 성화](283쪽)에서 보면 새관점 학파의 대세를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세윤은 유럽의 신학자와 새관점 학파 톰 라이트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면서 자기 이해를 제시한다.

첫째, 김세윤은 갈라디아서 초기저작설을 거부하고 데살로니가전서 초기저작설을 견지한다(132쪽). 김세윤은 브루스도 갈라디아서의 초기저작설을 지지했고, “꽤 많은 소수”가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132쪽).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후기 서신이고 칭의 논쟁이 있는 대표적 서신서이고,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칭의 논쟁있어 바울 신학 전반에서 일관되게 칭의 이해가 있는 것으로 제시했다(133쪽). 그런데 김세윤은 새관점 학파들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초기 서신으로 보았는데, 본문에서 칭의 논쟁이 없었던 것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133쪽). 즉 새관점 학파는 칭의 논쟁이 바울 신학 후기에 등장한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세윤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칭의 개념이 명확하게 있다고 했다(살전 1:5-10, 133쪽),

김세윤은 캠브리지 후커(Hooker)의 해석을 원자주의적 해석이라고 비평했다(135쪽). 지나친 원자주의적 해석으로 데살로니가전서의 의미를 잘 밝히지 못함을 피력했다(137쪽). 김세윤은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라 한다(138쪽).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 또는 구원의 사건”이라고 했다(138쪽). 메시아/그리스도는 종말의 구원자이며 그가 이룬 구원사건이라는 것이다(138쪽). 김세윤은 강조점을 ‘일으키심’에 두었다(138쪽). 김세윤은 복음에 두 요소, 죽음과 부활(일으키심)으로 말했고, 강조점을 ‘일으키심’에 두었다. 김세윤은 복음의 요소를 상대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전체 모든 부분이 동일하게 중요하다. 어느 한 부분이 더 중요하고 어느 한 부분은 덜 중요하게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김세윤은 브레데, 슈바이처, 후커 등 대부분 학자들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칭의가 등장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했다(138-139쪽). 김세윤은 서양 학자들이 잘 보지 못한 부분을 간파하여 한국 신학자가 데살로니가에서 칭의 복음이 파악했다고 주장한다(141쪽).

셋째, 칭의의 시작은 대속의 죽음이고, 대속의 죽음의 근거로(선취) 최후 칭의를 받는다. 김세윤은 ‘죽음의 형식 즉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을 제안한다(142쪽). 흥미로운 것은 ‘(죄)’를 작은 포인트로 괄호 처리로 편집한 것이다. 강의자의 것인지 편집자의 것인지 궁금하다. 죽음의 형식에서 칭의가 시작되었고(율법의 저주를 받아 버림)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그리스도의 중보로 칭의가 완성 받을 것이라고 한다(144쪽). 중보의 근거는 대속의 죽음이다(144쪽). 김세윤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최후에 집행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정통 기독교에서 중보자는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인격이고, 성육신한 인격이고, 현재 우주를 통치하는 인격이고, 마지막 심판주이시고, 영원한 인격이다.

넷째, 김세윤은 예수를 하나님 아들의 상속받은 통치권의 대행자로 지시한다. 김세윤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아 하나님 우편에 앉힘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주로 선언되었다고 했다(145쪽). 김세윤은 복음을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데, 통치와 종말 중보로 칭의를 받게 함까지 제시한다. 그런데 통치는 대리적 통치이고, 종말에 칭의는 창조주 하나님이 판단할 때 자기 대속의 죽음을 근거해서 변호하는 방식이다(146쪽). 이 통치에 성령이 등장한다. 이러한 구도는 기독교에서는 생소한 의견이다. 기독교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는 보좌 우편에서 만유의 통치자이고 최후의 날에 중보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집행한다.

김세윤은 피, 아들의 죽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146쪽). 통상 개혁신학의 구원 서정에서 5가지 요소(소명, 중생, 회심, 믿음, 칭의)로 구성하고 있다. 개혁신학도 죄사함에 대해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회심이 죄고백과 사함의 구도이다. 그런데 김세윤에게는 칭의가 시작되면서 죄사함이 없이 화해로 바로 들어간다. 물론 김세윤에게 구원의 서정 도식은 없다. 구원의 서정은 시간 역사에서 구원이 아니라, 신자 개인에게 일어나는 변이이다. 김세윤은 구원 역사(구원사)에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칭의와 종말론적 칭의(유보된 칭의)를 제시하고 있다.

김세윤은 바울 초기 서신을 데살로니가전서로 보고 후기 서신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 보았다(147쪽). 연구자가 서신의 기록 순서를 바꾸면(갈라디아서 초기저작설) 김세윤의 주장은 바로 평행선을 이룰 수 밖에 없다. 김세윤은 칭의 문제(갈등) 교회 초기부터 계속 있었다고 제시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초기서신서로 보면,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칭의 논쟁이 결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 초기에 칭의 이해가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확립하고 성경에 기록된 칭의 이해를 중세 로마 교회가 ‘교회교(churchianity)’로 전락시켜 침묵시킨 것을 종교개혁신학이 부흥시켜 교회를 개혁시킨 것이다. 교회는 공회의에서 결정된 가르침을 바른 가르침으로 인정하고 생명을 걸고 지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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