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의 <길잃은 한국교회> 4

▲ 정대운 목사

교리가 어떤 것인지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교리가 없는 곳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성경적 신학과 교리가 빠진 곳에서 무엇이 설교되고 있는가? 인간 중심, 나의 잘됨이 설교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군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는 설교가 판을 치게 된다.

"나는 성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죄하는 설교를 하면 절망입니다 ... 신앙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소망이 넘치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한 사명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꿈을 꾸고, 희망을 소유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설교자의 이런 말은 동기 유발형 강연자들과 내용 면에서 차이가 하나도 없다. 이게 성경적인지 세속적 긍정의 힘을 성경으로 겉을 발라 놓은 것인지 ...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알 수 있다. 아주 얕은 수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동기 유발 강연자들, 치료자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쓴 자기계발을 이야기하는 책과 강연은 복음주의 목사들이 설교하는 뉴에이지와 신비주의, 통속 심리학과 매우 비슷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환상’ 과 ‘비전’을 퍼뜨린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의심하는 사람들, 비판적인 사람들은 믿음이 없거나 항상 부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무지한 세계에 의문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발견되지 않은 재능을 계발하면,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 우리는 모두 행복, 명성, 성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메시지는 놀랍게도 기업에서, 학교에서, 종교에서 그것도 기독교 내의 복음주의와 로마 가톨릭간의 벽을 허물고 왕래할 뿐 아니라 이 이단적 메시지는 국경을 초월하여 통용되는 전 세계 공용어가 되었다.

깊이 있는 교리나 신학적 기준이 사라져 버려 무지 가운데 있는 교회에서 이러한 메시지가 울려 퍼지자 성속(성스러움과 세속)의 구별도 없어지고 이단과 정통의 구별도 없어져 버렸다. 이 메시지들은 빈천한 계층에서 출세하여 유명인이 된 사람들을 증거물로 내세운다. 성경은 낮아지라고 하지만 예화는 항상 높아진 사람들만 들고 있다. 또한 치유집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는 것 같지만 나는 항상 제외다. 하늘에서 금가루가 떨어졌는데 나는 제외다. 아말감 치아가 금니로 바뀌었으나 나는 제외다. 짧은 다리가 길어진 사건도 있으나 내 관절염은 제외다. 어느 목사는 장님도 눈을 뜨게 해줬다는데 내 자식 아토피는 여전히 낫지 않고 있다.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람이 큰 부자가 된 경우는 많으나 역시 내 환경은 변화가 없다. 여전히 우울하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들을 속삭여 주는 공허한 약속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고쳐달라고, 붙여 달라고, 부유하게 해 달라고 몸부림을 치지만 변화는 없다. 그리고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사람은 소원을 성취했는데 나는 여전히 성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상대적 박탈감만 더 커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과 환상과 비전이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누구에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지성인의 덕목인데, 이미 반지성화된 교인들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는 상태다. 주변에서 모두 내 문제라고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 “내가” 전적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성경에서 ‘전적인 믿음’을 치료의 조건으로 말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 반지성주의로 교육받은 교인들은 ‘믿음이 없어도 치료 받을 수 있다고?’라고 반문하겠지만 성경을 살펴보기 바란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료 중 믿음을 치료의 핵심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의 몇 가지 모습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은 여자는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았다. 사실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았다기보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곧장 이와 대비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무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행해진 기적의 이야기이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 지라(마 9:24-25)

죽어 있는 소녀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는가? 죽은 시체가 주님이 오실 때 그 속의 뼈들이 ‘주님을 전적으로 믿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이어서 두 소경된 자들의 기적이 나온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 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 9:28-30) 믿음대로 그의 눈이 밝아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는 믿음을 확인하지 않으신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 12:13)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마 12:22)

눈도 멀고 말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귀신 든 자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 이 사건 다음에 또 다른 치유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믿음대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마태복음 17장에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는 사건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이들 앞에서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신 것을 보이시고 하산해 보니 나머지 제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려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고침받기를 원했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마 17:17-18)

무슨 차이란 말인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고치실 수 있었단 말인가? 제자들이 궁금해 예수께 질문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 17:20)

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를 병자나 병자를 돌보는 이의 믿음의 문제에서 찾지 않으시고 치료하는 자, 즉,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에서 찾으셨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부족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부족하여 병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예수뿐 아니라 사도들의 사역도 이와 비슷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는 사도들이 자기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몇 푼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롓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행 3:5-7)

이와 같이 치유의 역사는 믿음이 있는 상황에서도 이뤄졌으며 믿음이 없는 상태, 또는 빈정거리는 상황, 심지어 병자의 의식이 없는 죽은 상태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여 치유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미 분별력을 상실한 이들에게 치유 불발이나 기도 무응답을 온통 그들의 탓으로 들려놓고 천만금의 무게만큼이나 낙담을 주고 끝내 버린다.

치밀하게 성경을 보는 것을 포기한 평신도들에게 무지개와 환상을 좇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아에게만 몰두하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놓는다. 내 병도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 이 땅에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이 집회 장소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곳이 아니라 자아숭배의 장이 된다. 열정이 넘치는 자아숭배 장소이다. 내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야 하나님이 들여 주실까 생각하여 더 크게 울부짖기도 하고 심지어 이상한 동물 소리까지 낸다. 치유는 내 믿음에 의해 결정되므로 믿음의 행위들을 기이하게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있어야 당첨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는 선물이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예수께서 치유함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재적인 인격의 모자람은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던 탓이므로 이 시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한다. 그래서 치유되어야 하고 치유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회에서도 살 살아 갈 수 있다. 매주 자아숭배자들로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는 회복 될 수 있다. 변화될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다. 변화되기 위해서 뛰며 찬양을 한다. 광란의 댄스장과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집회를 청년 집회라 한다. 그러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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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