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믿음이 과연 자살과 양립(兩立)할 수 있는가?

▲ 정양호 선교사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은 얻는다는 것이 영생 보장보험이 약속되어 있는 말씀이다.(요3;16) 구원 받은 자의 자살 행위가 구원의 변수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행위 구원을 테스트하는 문제는 접근자체가 오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거짓 신자의 자살이든 뭐든 그 믿음이 거짓이기 때문에 구원과의 관계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고 전제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자” 거듭난자 라고 단정을 하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이론의 여지 또한 없다. “성도가 자살해도 구원 전선에는 이상이 없다. 아니다 이상이 있다.” 아직도 팽팽한 접전이 진행 중이다.

I. 성도가 자살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견해

신원하 교수(고신신대원,윤리학)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개혁 신학적 연구”에서“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변수(變數)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살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이나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자유 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자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 없다. 작정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성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언제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신자들도 언제든지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내주하는 은총이 무효화되거나 궁극적으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중죄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죄도 구원과 관계해서는 여타 죄와 다를 바 없다. 신자가 자살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 통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정적 칭의 선언인 이신칭의의 교리, 즉 이미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속가(贖價)가 지불되었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으며, 자살 죄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상원 교수(조직신학)는 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자살에 대한 입장 정리 세미나에서 광의적인 자살 개념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자살은 크게 동기나 목적이 선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피하지 않는 행동,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 예로 신앙과 죽음의 기로에서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 몸을 던져 병사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 승선허용인원을 넘어 다른 전쟁포로들을 태우고 몸을 던진 군목 등”을 제시했다.

이어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 경제적 부담에 의한 자살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며 인간의 생명을 상실시킬 만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화가 결정된다는판단은 다시 로마 카톨릭의 행위구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신칭의론과 행위론이 충돌을 일으킬 경우 이신칭의론이 앞서야 한다. 이런 해석학적 원리를 포기하고 그 구절들을 받아들여 해석하면 얼마든지 중세시대 로마가톨릭 행위구원론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II. 구원 받은 믿음은 자살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

이한수 교수(신약신학)는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만을 강조해 왔다.” “구원은 처음부터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이나 행위와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귀성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범죄행위다. 신자들의 자살 행위는 이러한 복음의 근본 교훈을 거스르고 그것에 도전하는 불신앙 행위”라고 지적하고 “성경이 자살에 대해 명시적으로 구원이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성경의 일적인 교훈들에 기초해서 판단할 때 신자들의 자살은 그들이 경험한 구원의 은혜의 상태와 부합하지 않는다.”

박혜근 교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성경이 자살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 단정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선언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하다. “히틀러, 김일성 성경의 가르침을 보자면 어떤 운명에 처했을 지는 물어볼 필요 없이 명확한 것 아닌가? 구원받은 신자라면 자살 충동을 느낄 수는 있어도 자살을 결행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자살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굉장히 방임적이라고 비판하고 이런 주장은 은혜의 교리에 근거해서 자살 죄도 용서받을 죄의 리스트가운데 하나로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의 교리에만 근거해서 어떤 동기의 형태든 자살을 구원론적으로 논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 “성경은 자살이 배교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은혜의 교리에 따라 단순히 용서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살은 구원의 여부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잭 케보키안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살하려는 사람이 어떤 심리적 상태에 이르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종교적인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자살인 것”이라고 일갈하였다.
 

III. 신원하 교수의 주장에 대한 신호섭 교수의 비판

1.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근거가 없다”는 주장에 관한 반박 - 물론 성경에는 타인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자가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이 없듯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살인죄를 범할 때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 역시 없다. 이로 볼 때, 신 교수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혁교회가 주창해 온 삼위일체 교리 역시 성경에는 명시적 구절이 없으나 그러한 사상은 성경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살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면 자살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명시적인 성경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되묻고 싶다. 나아가 명시적인 구절이 없다 해서 자살이라는 대죄(mortal sin)를 다른 여타 죄와 동일하게 보는 것’ 역시 정당한지 묻고 싶다. 타인의 생명을 제거하는 살인죄와 자신의 생명을 제거하는 살인죄를 동등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또한 신 교수의 말대로 자살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과연 자살한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인지, 또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자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제거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역시 신 교수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생명에 관한 권리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교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은 안락사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와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위임 받은 자일뿐이다. 더욱이 신자에게 있어서 생명은 구속의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볼 때 그가 과연 택자였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마귀요,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을 뻔 했던 인물이라고 정죄하셨다(요6:70)

2. “자살은 다른 행위와 달리 그 죄를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는 한국교회의 입장이 자칫 ‘행위로 인한 구원’ 또는 공로 사상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게 되고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에 관한 반박 - 만일 신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이제 회개의 효용 가치는 용도폐기처분 되어야 할 것이다. 회개와 죄에 대한 인식이 신뢰하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는 신앙보다 선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그것이 중생과 더불어 발생하는 회심이든 더 나아가 회심 이후의 성화과정에서의 끊임없는 회개이든지 관계없이 회개는 중생 받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론 회개의 행위가 구원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게 되어 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천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사도 요한의 엄중한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계 21:27). 사도 바울 역시 아무도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히 12:14).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정 가운데 있어서 중생과 구원을 체험하고 성화되어 천국에 입성한 자를 가리켜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 “흠이 없는 자들"(계 14:5)이라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자살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천성에 들어갈 담대한 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신 교수는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택자와 유기자를 정했다는 ‘예정 교리’와 구원으로 택함 받은 성도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견지해왔다”며 “이러한 견인 교리에 비춰 볼 때,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과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등의 말씀처럼 자살이라 하더라도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고 교리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가 인용한 로마서 8장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과 위험이나 칼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는 36절 말씀을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여기에 ‘자살’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 누구의 지지도 받을 수 없는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주경학적으로도 나아가 신학적으로도 전혀 앞뒤가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3. “자살은 성령 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물론 신 교수는 성령훼방죄의 핵심 성격을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라고 옳게 진술했다. 반박 - 그러나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성령 훼방죄는 “증거와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성령의 증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러한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가리켜 “자신들의 영혼의 복리와 미래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이라고 잘 서술했다. 신 교수가 잘 밝힌 바와 같이 루터는 자살을 가리켜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 했다. 루터는 그것이 저주에 이르는 죄는 아니라 했지만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과연 자신의 영혼의 복리와 미래의 삶에 대해 절대로 무관심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고전 3:16~17)?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의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어느 정도의 증거와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금번 신원하 교수의 자살에 대한 입장 발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011년에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목회자들을 향해서는 자살과 구원이 관계없다는 걸 너무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금번 강연을 통해 신 교수가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자살의 문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 또는 “가지 않는다"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며,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교제하는 신자는 절대로 자기를 살인하는 자살을 할 수 없다" 또는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로 접근해야 말 문제이다. 하나님의 택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며 거룩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야 한다(갈5:22~23). 그는 비록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신설한 신앙인으로 살다가 기근이나 칼이나 위험을 만나도 심지어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살아야 할 하나님의 택자이기 때문이다(겔 16:1~13).
 

IV.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가 어떻게 남용(濫用)되고 있는가?

현대 신학자들은 소위 육욕적(肉慾的)인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고백들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本質的)인 믿음의 고백으로 간주(看做)하여 구원의 정의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성도의 견인” 이라는 교리의 남용은 한번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불순종(不順從)이나 엄청난 불신의 적대행위(敵對行爲)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한 신자가 타락을 하여 믿지 않는 불신자(不信者) 상태로 떨어지고, 심지어 무신론자(無神論者),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을 받았고, 여전히 중생자가 된다. 만약 당신이 한번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이 만약 그 믿음을 부정할지라도 당신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신학이다. 한번 그리스도를 고백한 믿음 때문에 그가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고는 한갓 속임수에 불과하다.(마10:33,딤후2;12)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보증(天國保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도의 진실하고 거짓 없는 의지의 믿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완전히, 최종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바로 신실한 성도들은 생명(生命)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은혜(恩惠) 안에 견디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만약 일시적(一時的)으로 한동안 견디기 어려운 죄에 떨어 진다해도 결코 완전히 그 믿음을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아더핑크(A.W.Pink)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전혀 책임질 줄 모르는 자동기계(自動機械,Automated teller machine)들처럼 무관심(無關心)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도덕적 책임자(責任者)로서 인간 본연의 삶의 한 방편에 행복 추구 또는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현상을 유지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인내하거나, 재정비될 수 있게 관계 한다“라고 하였다.

언젠가 한번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더라도 현재 주님을 대항하는 쪽으로 계속 돌아서 있다면 그들은 결코 진실로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성경이 자증(自證)한다. 사도요한은 기록하기를 “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1요2;19)라고 하였다. 어떤 위인이 일단 배교자(背敎者)가 되어버렸다면 과거 그 사람의 신앙 간증이 아무리 확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신앙의 질(質)이 가룟유다처럼 위선적(僞善的)이었고, 위조(僞造)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 것뿐이다. 하나님은 “능히 너희를 보호(保護)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가운데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24) 라고 하였다.

 

들어가며

구원받은 믿음이 과연 자살과 양립할 수 있는가?

위의 논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살과 구원 문제는 가룟유다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결론은 언제나 각자 몫이다. 자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목회적 배려(牧會的 配慮)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신불신(信不信)간에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가족에게 어떻게 배려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할 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화(聖化)의 마지막 단계의 열매가 견인(堅忍)의 은혜와는 전혀 무관한 불신(不信)이든, 심지어 전향자이든,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일지라도 행위구원(行爲救援)이 아닌 은혜 칭의 용서 구원(恩惠救援) 패키지 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다“ ”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마치 수학공식(數學公式)처럼 말한다면,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남용(Abuse)하거나 심각하게 왜곡(distortion)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칭의(稱義, justification, 또는 용서)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전후나 원인과 결과라는 측면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으로 결코 따로 분리하여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行爲)와 구원(救援) 문제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도 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표는 달았지만 그의 열매(義의 열매, 칭의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영적 분별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그대로이다. (마7:16,약2:26)

그리스도인은 어떤 면에서 주님만 따라가는 앵무새이다. 우리 주님이 싫어하면 싫어하고 좋아한다면 좋아하고 미워한다면 미워해야하고, 정죄(定罪)한다면 마땅히 정죄(定罪)해야 한다. “ 악은 어떤 모양(模樣)이라도 버리라”(살전5:22) 했다면 버려야만 한다. 그 믿음이 건강한 믿음인지, 아니면 진실치 못한 가룟유다과인지 분별(分別)하려하지 않고, 자살 그 인간적인 현상(現狀), 구원문제에 집착하여 외적(外的)으로 교회에 등록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만 달았으면 자살이든 뭐든 구원에 이상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이신칭의의 신학논증으로 인해 행여라도 교회 안에 자살자가 만연하는 사태가 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해 참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떠나다 고기뱃속에 던져졌던 요나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든지, “ 내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Sheol)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요2:2)라고 고백한다.

의인 욥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욥30:26) 재물과 가족을 다 잃는 온갖 고난이 와도, 친구들이 다 버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눈에 보이지 아니해도 인생의 걸음걸이를 다 세시는 주권자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승리하였다.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期限)이 차서 죽었더라”(욥42:17)라고 기록한다.

가룟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바울도 역시 엄청난 핍박과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며 결코 生命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生命의 복음을 위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더 사모하며 자신들의 생애를 불태웠다.

오늘날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갑갑하고,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가? 세상 풍조(風潮)대로 따라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滿足)하고 감사(感謝)하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성도든, 목회자든 선교사든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망, 우울증, 알 수 없는 많은 정신 질환이 만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매순간순간을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간다.

참된 믿음, 참된 회개(회심)의 여부는 입술이나 지식, 이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열매로 나타난다.(요15:5) 이것이 세례 요한식 표현으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눅3:8)이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갈5:22~23)라고 하였다. 성령의 첫 열매 사랑은 어떤 하늘에 있는 이상적이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기 몸부터, 건강한 육체로 관리하는 일( Body Stewardship)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상상하기도 싫지만 어떤 이유에서이건 어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인생의 열매, 즉 성화의 열매가 ”자살”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어떻게 받으실 것인가?

자기의 어떤 유익과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을 3년간 따라다녔던 거짓 제자의 대표브렌드 가룟유다의 자살 사건은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경고로 주신 산교육 교재(敎材)이다. 자살자의 그 순간, 마지막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살자가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처럼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살자!”로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더 이상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 순간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의 은혜를 입었다면 아마,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참고문헌>
1. 신원하,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개혁 신학적 연구”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4666

2. 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자살에 대한 입장 정리 세미나,
   이상원교수, 이한수교수, 박혜근교수, http://m.newspower.co.kr/a.html?uid=13317

3. 신호섭,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신학적 근거가 없다는 신원하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 론”,
   http://www.cwch.co.kr/xe/board01/47763

4. 가룟 유다의 수수께끼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0

5. 연이은 기독교인 자살은 가롯 유다 신드롬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494

6.자살자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2751

7.  John F. MacArthur, Jr,  “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He Condemns a Hardened
    Heart“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6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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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