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큰 믿음의 사람에게는 벼랑 끝에 서는 순간이 있다. 절체절명, 백척간두, 진퇴양난, 풍전등화의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시기와 분기가 가득하여 눈 꼬리를 치켜들고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위대한 일에는 꼭 그것을 방해하는 위험한 상황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큰일을 도모할 큰 믿음의 사람이 영웅처럼 멋있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려진 불쌍한 자로 보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각오하고서 굳건하게 맞서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큰일에 도전할 수가 없다. 사탄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는 일은 별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의미있는 일들은 항상 마귀의 초미의 관심사이고, 마귀의 본능적인 저항이 수반되는 일들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영적전투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소외시키고, 낙심주고, 나태하게 하고 ... 그리고 달콤한 유혹까지 던져준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사탄이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는 두려움과 공포이다. 다른 것으로 해 보다 끝내 안 통하면 마지막에는 여지없이 두려움과 공포가 흐르는 험악한 분위기가 나타난다. 

이전까지 그런대로 믿음을 지킨 사람들도 그때부터는 크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까지 통과해야만 진정한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위대한 믿음의 별들도 그랬던 분들이다. 마귀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며 한국 교회를 회유했다. 많은 목회자들과 장로들과 성도들이 알면서도 속아주며 우상숭배에 앞장섰다. 거부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다 예측했기 때문이다. 훗날 탬플턴 상을 수상하며 한국 교회를 대표하시는 분이 된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신사 우상을 숭배하는데 동참했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단지 형식적인 의례라는 마귀의 미혹(유혹)을 분명하게 뿌리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이기풍 목사 ... 한국 교회의 큰 믿음의 별이 되신 그 분들이었다. 뼈 속까지 차갑게 스미는 마귀의 공포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큰 믿음의 날개를 펴고서 날아올랐다. 비록 육신은 차가운 감방에서 떨며 추운 겨울을 보냈고, 굶주림으로 병이 들고 고문으로 초죽음이 되어갔지만, 그들의 믿음은 일제가 지배하는 세상의 어떤 것의 방해가 미치지 못하는 높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고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믿음으로 천길 낭떠러지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손으로 던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영웅은 비슷한 모습으로 탄생한다. 큰 믿음의 사람들이 낭떠러지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들 던지는 것처럼 그들은 역사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뛰어내린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악한 마귀의 핍박과 모략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가파른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 하며 뛰어 내려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냥 편히 앉아서 아무 모험이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영웅의 칭호를 누린 예가 없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영웅 이순신을 보자! 무능한 임금과 미련한 장수로 인하여 자신이 키운 조선의 수군이 거제도 인근의 바다 칠천량에서 괴멸되고 말았다. 그에게 남겨진 배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비겁하게 전우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배설이라는 장수가 보존해 둔 전함 12척과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척의 전함이 전부였다. 

이순신은 죄수의 몸에서 다시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조국의 바다를 지켜야만 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침략군이 아니라 치욕적인 패전을 겪으며 살아남은 장수들과 병사들을 누르는 공포였다. 진도의 좁은 해협(울돌목)에다 자신과 부하들과 마지막 남은 13척의 전함의 운명을 던졌다. 이순신 자신이 먼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난중일기에는 조국의 마지막 운명을 가르는 전투를 앞둔 마지막 밤에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사즉생 생즉사”(죽고자하면 살길이 있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며 함께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독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순신의 또 하나의 불패의 신화가 이어졌다. 23전 23승의 전과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명량해전은 장수와 병사들이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자신의 운명을 역사 속으로 전짐으로 시작된 것이다.    

세상의 영웅처럼 믿음의 영웅도 위기 속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의 영웅들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 난세를 극복하고 영웅이 되는 세상의 아들들의 좌우명이라면, 믿음으로 크게 되는 성도의 좌우명은 "일사각오 위주충성"(죽을 각오로 예수를 위해 충성하다)이어야 한다. 그런 성도만이 벼랑끝에 설지라도 타협하거나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낭떠러지 앞에 서면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느낀다. 포기하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가면 영락없이 죽을 것 같고, 살아도 고생하다 망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그래도 계속 곧장 나아가야 한다. 바로 그때가 보통의 사람이 허물을 벗고 큰 믿음의 사람으로 탄생하기 위한 마지막 고통이다. 바로 그 지점이 큰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인지, 못 될 것인지 결판을 내는 벼랑 끝의 시험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펼쳐질 것이다. 갑자기 장착되는 믿음의 날개가 당신을 높이 비상하게 만들 것이다. 다니엘이 그랬다. 배고픈 사주의 밥이 될 것을 각오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사자는 이미 강자이같이 변해 있었다. 다니엘은 가까이서 사자를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다시 나와서 더 높이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그랬다. 일사각오로 믿음을 지키다 쇠를 녹이기 위해 최고로 뜨거워진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뜨겁지가 않았다. 그 세 사람이 그 불길 속으로 던져질 때에 다른 누군가가 함께 들어갔기 때문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

끝내 우상에 절하지 않아서 불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친구를 세 사람이었는데, 불길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네 사람이었다. 또 하나의 사람은 마치 신들의 아들같다고 왕이 말했다. 누구였을까?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을 것이다. 끝내 믿음을 지키고 풀무불 위의 낭떠러지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품으로 던진 믿음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친히 함께 쇠를 녹이는 뜨거운 불 속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가 벼랑 끝에 설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추락 중에 날개가 생겨 날아오르게 하실 것은 믿고 기도하면서 맡겨야 한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지느 법이다. 바로 그 위태로운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각오로 타협하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가면 끝이다.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며 항복의 의사를 보인다 하여 마귀가 신사적으로 예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철없는 오산이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며 죽을 때까지 절규하며 비굴하게 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이라 확산하면 무조건 그대로 가야 한다. 결국 낭떠러지에 도달했을지라도 더 가야 한다. 큰 믿의 사람들은 모두 그랬었다.  

예수님이 직면한 낭떠러지는 십자가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피하려고 그때까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면 어찌되었을까? 사악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마귀의 사주를 받는 유대지도자들이 조금이라고 관대한 태도로 화친하자 하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면 그렇지! 너는 더욱 더 죽어야 할 차람하고 가증한 종교 사기꾼이다!” ... 라며 더 멸시하고 죽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어떤 성경에서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포승줄에 묶인 죄수가 되어 비참하게 인생을 살다 죽을 것이라는 아가보의 말을 듣고 바울이 오던 길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은 시간을 좀 더 평탄하게 살며 여생을 마쳤을까? 절대로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다. 마귀는 그래도 바울을 기어이 죽였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때까지 쌓은 바울의 인생의 의미까지 깔아뭉개버렸을 것이다. 지중해를 세 번이나 돌면서 수고한 평생의 고생이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는 그 사람 데마(딤후 4:10)와 같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 믿음의 사람은 낭떠러지에 설지라도 돌아가지는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믿음의 길이었다면 그냥 그대로 나아가야만 한다. 천길절벽 낭떠러지에 설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즉생 생즉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예상치 못한 길이 보일 것이다. 길이 없으면 날개가 생길 것이다.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공간이동의 기적을 행하실지도 모른다. 큰 믿음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시 돌아가는 길은 절대로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하자!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됐다!” ... 라며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도 당신을 큰 믿음의 사람되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전략이다. 결국 넝떠러지를 피하기 위해 온전한 믿음을 버리게 된다. 큰 믿음의 상급은 절벽, 낭떠러지, 함정 ...  이러한 것이 두려워서 하던 일을 멈추거나, 살짝 비켜 돌아가면 얻을 수 없는 영광이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적은 벼랑 끝에 도달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믿을 때에 시작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낙하산도 없이 허공에 몸을 맡기려 하면 준비된 축복이 드러나게 된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에 숨긴 라합을 보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보라! 자기의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이를 각오한 에스더를 보라! 이들이 왜 위대한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낭떠러지에 서는 모험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인하여 마주치는 낭떠러지는 당신을 큰 믿음으로 비상하게 하는 활주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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