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중에 어느 분께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지 좀 평가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들어보니 '율법폐기론'의 전형적인 패턴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고 쉽게 율법폐기와 청교도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해 드렸습니다. 이 글은 제게 질문하신뿐 아니라, 우리 교인들이 같이 공유해야할 것 같아 올립니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분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유명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비결을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 우두머리가 되고 성경 박사로 불릴 것이다”(마틴 루터)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무지는 기독교를 부패시켰고, 여전히 부패시키고 있는 오용의 핵심이다”(테오도루스 베자)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분은 청교도는 커녕 개혁주의도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울림이 전혀 없는 설교(가르침)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 사랑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분이 긴 시간과 많은 말을 했지만, 딱 요약하면 이것이었습니다. 이런 결론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긴 시간 동안의 설교에서 교인들에게는 크게 배울 것이 없었고, 다 아는 내용의 성경구절 찾기 정도였다고 그 분의 설교를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 분의 설교를 다 듣고 나니“아! 율법으로는 안 되고, 사랑과 은혜로 교회생활 해야겠구나!”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율법의 3요소(제사법, 시민법, 도덕법)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여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또는 규범적으로 시키는 것’ 자체 모두를 율법의 범주에 넣고, 무엇이든 규범이 아니라 자발성에 의해서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이러 내용은 차후에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것을 ‘율법폐기론’이라 하고, 청교도-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몹시 경계했고, 심지어 이단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율법폐기론을 가르치는 자들은 성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말을 하니, 그 가르침이 깊어 보이고, 매우 깊은 지식으로 보이지만, 그런 설교가 다 끝나고 난 후 남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말고 기쁨 마음으로 하자!”

그럼 역사적 관점에서 ‘율법폐기론’이 무엇인지를 말해보겠습니다. 역사를 알면 쉽게 발견됩니다. 율법폐기론 논란이 되는 핵심 문제는 복음에 대한 선포가 죄 사함을 선포하는 은혜에 대한 선포이면서 아울러 회개와 책망에 대한 선포인지? 에 있습니다. 율법폐기론은 “죄를 책망하는(즉 회개를 요구하는) 모든 것은 율법에 대한 선포이고, 또 율법에 대한 선포에 속해있다”고 진술합니다. 반면에 복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죄에 대한 배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취득하신 유익 곧 용서, 의, 영생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복음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봅니다. 복음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과 영벌에 대한 경고, 회개에 대한 촉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폐기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과 복음, 즉 모세와 그리스도가 대조 된다면, 복음이 회개나 책망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당연히 비난이나 두려움을 주지 않고 율법의 두려움에 대해 양심을 위로하는 위안과 즐거운 메시지에 대한 선포 외에 다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율법폐기론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에 대한 사랑의 선포로 그들을 다시 세우는 것임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당연히 은혜에 대한 선포만이 아니라, 회개와 책망에 대한 선포을 내포합니다. 루터교회들은 ‘율법’과 ‘복음’을 복합적 의미로 말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율법은 단지 죄의 정죄에 대한 메시지로, 복음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위로에 대한 메시지로 이해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주석에서 우르시누스는 율법과 복음간의 차이를 설명할 때,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속해 있는 교훈이나 계명은 없다. 회개에 대한 선포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대한 선포는 복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속해 있다”는 루터교회 주장에 대한 답변에서, 확실히 복음에 속해 있는 교훈, 즉 “믿으라, 그리스도의 유익을 받아들이라,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라, 또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실천하라”는 것과 같은 명령한다는 사실을 반박한다면, 이에 대해 우리는 단지 일반적으로만 우리에게 모든 신적 약속과 교훈과 경고들을 믿으라고 요구하고, 믿지 않을 경우에 있을 처벌에 대한 경고와 함께 명령하는 것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명백히 그리고 특별히 믿음으로 은혜의 약속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거룩한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믿으라는 명령 속에는 회개하라는 명령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르트 신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선포를 통해 우리 안에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기뻐하신 것처럼, 자신의 말씀을 듣고 읽음으로써, 그 말씀에서 나온 권면과 경고의 약속을 통해 그리고 성례를 사용하심으로써, 이 은혜의 사역을 보존하고, 지속시키고, 온전케 하신다”

즉, 우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도르트 신조에서도 복음의 “교정”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율법폐기론’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분이 말씀하는 전체가 율법폐기론에 들어가고 오직 단어로만 율법폐기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은 복음에는 직설법만 있고, 명령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은 ‘도덕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명령법”은 매우 싫어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율법폐기론자들은 스스로의 말씀사역과 삶에서는 율법폐기론을 지지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는 율법폐기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럼 분명한 율법폐기론자들을 가려 낼 수 있는 몇 가지 핵심을 말해보겠습니다.

1)도덕법을 신자들의 삶의 규칙으로서 거부하는가?
2)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 주장하는가?
3)은혜 언약, 특히 새 언약의 조건을 부인하는가?

율법폐기론자들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은 그 동기가 나쁘지 않다 하여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까지를 보지 않는 것이 실책이요, 책망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우월권을 주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과 회개를 복음과 관련시키지 않고, 율법과 복음으로 나눠버립니다.

율법폐기론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택함을 받은 자라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2)복음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3)복음은 어떤 행위의 조건 없이 생명을 값없이 제공하고 부여하고, 제공된 것을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도덕적 조건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4)복음은 우리에게 ‘훈계’라기 보다는 ‘본보기’를, ‘명령’이라기 보다는 ‘모방’을 명령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령하기 보다는 설득한다라는 사고방식을 좋아합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복음은 조건적이고, 이 조건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이라고도 한다.
2)엄밀하고 엄격한 삶이 복음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3)믿음이 칭의의 조건이고,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구원받은 자들에게 행위가 요구된다.
4)복음은 그리스도의 강요하는 사랑으로 강력한 의무 이상으로 명령하고(율법이 그러는 것처럼) 또 권면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6)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이 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거룩한 삶은 천국에 이르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하라”는 명령법(즉 규범)이 있고, 율법폐기론자들은 이 모든 것이 있음에도 끝까지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스스로 율법폐기론의 길로 들어가 버립니다.
 

율법폐기론 논쟁의 핵심

칭의의 시점이 언제이냐? 의 문제입니다. 청교도들은 택함 받은 자는 영원 전에 의롭게 되었지만, 실제적, 실존적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이동하는 역사를 경험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율법폐기론자들과 부딪힙니다. 청교도들은 “믿기 전에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믿을 때까지는 진노의 자식”이라고 분명히 진술합니다.
 

끝내는 말

하나님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선행을 명령하셨습니다. 선행은 필수적인 것으로, 선행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따라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행은 그리스도가 죽으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선행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감사를 표현하는 자들에게 명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구원의 공로는 될 수 없고, 영생을 취득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칭의의 원인이나 조건은 아닙니다.

율법폐기론은 결국 방종주의와, 자유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대운 목사 / 삼송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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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