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모든 성도에게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과 특성이 다르다. 큰 역경과 엄청난 시련을 당했지만, 능히 극복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비범한 삶(extraordinary life)을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반면에 믿음을 가졌지만 작을 시련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도 많았다. 지금 당신의 인생과 믿음은 어느 쪽으로 귀결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분량과 그에 따르는 능력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베드로는 역사상 최초로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잠시 걷다가 그만 다시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다시 빠지면서 허우적이는 베드로를 향하여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라고 하셨다. 자신의 온 몸의 오감이 전해오는 거센 바람과 파도의 기세 앞에서 베드로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능히 파도 위로 뜨게 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작동하지 못하였다. 역시 믿음은 필요한 그 순간에 갑자기 솟구치는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평소에 비축한 믿음의 분량이 자신의 몸을 파도 위로 뜨게 하기에는 불충했었던 것이다.  

우리 개인들의 믿음의 분량과 그에 따르는 능력의 차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소망없이 캄캄한 세상을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라고 하셨다.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소경된 눈을 고칠 수 있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눈을 고치셨다. 

간질병으로 괴로움 당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너무도 미약한 믿음을 소유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아들을 고치시기 전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아버지를 꾸중하셨다. 병든 아들이 고침받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가 믿음을 가져야 하고, 아버지의 믿음이 활용되어야 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아버지의 미약한 믿음이 오히려 아들을 고치는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믿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서 자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거대한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질 수도 있는 놀라운 큰 믿음(Mountain-moving Faith)을 가지도록 촉구하셨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 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지난 역사 속에는 정말로 산을 옮기는 일에 비유 될 큰일을 행한 큰 믿음의 사람들이 많았다. 비범한 인생을 살면서 역사의 큰 산맥을 치우기도 했고, 그 방향을 비틀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 위대한 믿음의 생애를 살았던 몇 사람을 이야기해 보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로마와 지중해 세계를 정복했고, 오늘 날의 유럽의 기초를 놓았다. 이는 우리 몇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고 아놀드 토인비 같은 세계적인 석학이 하는 말이다. 토인비는 “바울을 싣고 간 배는 유럽을 싣고 간 배였다”라고 했다. 토인비가 말한 그 배는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사도 바울을 태우고 지중해를 건넜던 아드라뭇데노 호이다(행 27:2).  

루터는 목숨 걸고 종교개혁을 이룸으로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가장 큰 변화를 이루었다. 수년전에 뉴욕 타임즈지는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킨 세 사람에 대한 논설을 실었다. 로마 제국의 유리어스 카이사르, 몽골제국의 징기스칸, 그리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루터였다. 이 세 사람 중에서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남긴 사람은 칼과 권세로 세계를 호령했던 징기스칸이나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오직 성경 한권을 들오 복음을 외쳤던 루터가 인류의 역사가 가장 크고 고귀한 변화를 이루었다고 격찬했다. 

웨슬리는 감리교 부흥운동으로 영국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영국에서 맥을 쓰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인간의 더러운 죄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정을 힘껏 설교하여 미국의 대각성을 일으켰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을 가지고 비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당신과 나도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도 믿음 때문에 위대한 인생이 될 수는 없을까? 왜 우리는 이런 믿음과는 상관없이 살다가 인생을 마쳐야 하는가? 왜 누구는 되고, 왜 누구는 안 되는 것일까? 과연 크고 대단한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어떻게 그런 믿음이 일어나는 것일까? 

혹시 당신도 크고 대단한 믿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한 문장을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진리 안에서 소통하는 관계를 가지라! 그것이 큰 믿음의 시작이다!” 

믿음은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인격적인, 개인적인, 확고부동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더욱 풍성하게 응답을 주신다. 

하나님의 큰 쓰임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사항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써 주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아무리 소원해도 소용없다. 우리의 열심과 헌신이 아무리 뜨거워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쓰고 싶지 않으시면 그만이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싶지 않으시면 우리가 무엇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것인지를 결정하는 키(key)는 바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을 키우자!", "큰 믿음을 가지자!", "큰 비젼을 가슴에 품자!" ... 

이런 구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쓰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망한 외침이다. 하나님의 큰 믿음의 도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일방적인 믿음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실질적인 영적인 관계가 관건이다. 하나님의 쓰심과 관련된 가장 결정적인 사항은 진리에 기초한 당신과 하나님의 건강한 관계이다. 아무리 믿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쓰시지도 능력도 따르지 않는다. 

진리에 관하여 하나님과 소통되는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서도 대단한 믿음을 가진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마치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큰 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혼란에 빠지고 있다. 신사도운동, IHOP, 백투 예루살렘 ... 이런 거짓된 영적인 Tsunami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고, 또 그 뒤를 잇는 다른 거짓 Tsunami들이 다가 올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영적인 조류 속에서 큰 믿음의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반짝이는 그들의 허망한 운동일 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큰 믿음과 전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참된 믿음의 길과도 거리가 먼 다른 먼 곳의 사람들이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큰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비록 그의 사역에서 어떠한 놀라운 현상이나 체험이 따를지라도 아니다. 잘못된 성경이해, 불건전한 교리, 말씀을 넘어선 특이한 체험 ... 등에 근거하여 형성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절대로 참 믿음의 능력이 동반되지 않는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산을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위대한 믿음으로 크고 대단한 생애를 사는 가장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하나님과 소통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관심을 알고,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동행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을 쓰실 것이다. 그런 사람은 붙잡아서 쓰시지 않는다면 누구를 쓰시겠는가? 성경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다윗의 장막의 영이니 24시간 중보예배니 ... 무조건 기도 많이 한다고 되지 않는다. 쉬지 않고 날마다 회개하고, 열심히 금식하고, 마음을 쥐어짜면서 "믿습니다!"를 힘차게 연발하고 ... 그렇게 세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근거하여 하나님과 소통하여야 한다. 그것이 일차적인 조건이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가 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큰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당신의 이름이 마치 산을 들어서 바다로 던진 사람으로 비유될 수 있는 큰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올라 있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또 한편으로 교만이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조심하면 더욱 금상첨화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인격과 행실까지 갖추도록 힘을 다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크게 쓰시기에 더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그런 성도라면, 하나님은 당신으로 인해 행복하여 춤을 추실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누가 그렇게 빚어지고 있는지, 누구의 영혼이 그렇게 무르익는지 기대하시며 찾으신다. 그런 사람을 찾으시기 위해 분주히 온 세상을 두루 염탐하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