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모 목사

글을 열며

이인규 씨는 <바른믿음>의 계속된 설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성로 목사의 잘못된 부활복음을 포기하지 않은 채, 또 그의 [무-물]에서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와 “부활논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로마서 1장 3-4절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과거 ‘부활과 십자가는 모두가 구속적 사건이다‘의 제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다‘의 제목으로,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의 제목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빼버리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인규 씨가 이런 무지(여기서 이인규 씨가 무지하다는 말은 평균 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실로 수준 이상의 대단한 신학적 식견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정도의 수준으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것도 턱없이.....) 가운데 진리를 다루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암담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인규 씨의 신학적 능력의 한계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열심히 주석들을 찾고 나열하는 열심을 보이지만(이것은 부지런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열한 것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보편타당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능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래서 자주, 다루는 주제와 동 떨어진 자료들을, 그러나 그것이 마치 다루는 주제의 해답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제시하고 엉뚱한 결론을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오류로 몰고 간다.

이인규 씨의 더욱 심각한 신학적 능력의 한계는, 자료들을 찾아 선택할 때, 자료들 속에 있을 수 있는, 잘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오류들은 전혀 찾아낼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할지라도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방대한 분량의 주석에서 미진한 부분이나 오류가 있게 마련인데, 그러나 이인규 씨는 그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는 자료들을,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구잡이로 갖다 씀으로, 스스로 무식을 드러내며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인규 씨의 한계는 그가 사용하는 주석 등의 자료에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이인규 씨가 나열하는 주석들은 시간적으로 뒤떨어진 진부한 것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는 말이다. 이것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이해는 도구(신학)는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규 씨가 사용한 주석들을 보면, 오래된 것은 500여전에 쓰여진 것이며, 가장 근자의 것들도 쓰여진 지 족히 20-30년은 된 것들이었다(이런 점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은, 다음 글에서 이인규 씨가 설명한 롬1:4을 비판할 때 좀 더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거기에다 이인규 씨의 더욱 한심스러운 한계는, 필자가 오래 전에 한 번 지적했던 것이데,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될 때, 다른 것을 물고 늘어져 본질을 피해가려는 나쁜 습관이다. 필자는 다음 글에서 이인규 씨가 주장한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와 특히 “부활논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로마서 1장 3-4절의 올바른 해석”에 대해 제대로 된 성경 주석을 통해 로1:4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밝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의 비판에 대한 반박(5)'에서, 엉뚱한 것을 물고 늘어짐으로 불리한 본질을 피하려고 시도한, 이인규 씨의 나쁜 습관에서 나온 잘못된 시비를 바로 잡을 계획이다. 이제 필자는 이인규 씨가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의 비판에 대한 반박(5)'에서 정이철 목사님을 비판한 몇 가지 예를 살핌으로써, 이인규 씨의 신학적 능력이 얼마나 턱없이 모자라는가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가 진리를 다루며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았는가?

이인규 씨는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의 비판에 대한 반박(5)'에서 정이철 목사님의 다음의 글을 문제 삼았다. 

"죽어 무덤에서 삼일 동안 부패가 진행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다시 생명과 생기를 주시어 살게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곧 그의 몸이 다시 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삼일 동안 부패가 진행되었으니 온 몸의 모든 세포들이 다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이 깊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다시 조성하시어 살게 하시므로 부활한 것이다. 단지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허파가 호흡하게 만드는 치료 수준이 아니었다. 죽었고 삼일 동안 그 몸이 부패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재창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기 백성을 다시 새롭게 조성하여 하나님 백성되게 하시는 재창조의 시작이었다...(중략)..."(정이철 목사)

정이철 목사님의 이 말에 대해 이인규 씨는 다음과 같이 어이없이 비판했다.    

"예수님의 몸이 부패가 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부패된 몸에 하나님이 생명과 생기를 주었다는 주장까지 정이철목사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연 이것이 정이철목사가 알고 있는 부활인가? 부활은 하나님만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 모두의 역사이다. 예수의 시신이 썩고 부패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피조 되어 재창조하신 것이 부활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는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고,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전15:42-49). 또한 빌립보서3:21에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예수님의 부활체가 우리의 부활체가 되는 것이다. 정이철목사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만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하나님 모두의 사역이다."(이인규 씨)

이인규 씨는 ‘예수의 몸이 무덤에서의 삼일 동안만큼 부패했다’는 정 목사님의 말을, 앞에서 제시한 고전15:42-49과 함께, 또 짐작컨대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한 시16:10에 대해 몇 가지 주석들을 살피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고전15:42-49은 불행하게도 ‘예수의 몸이 썩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도 지원하지 않는다(이런 이유로 필자는 다른 글에서 이인규 씨가 혹시 실독증 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했었다). 오히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몸이나 성도의 몸이 죽으면 썩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게 된 몸은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체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인규 씨가 제시한 고전15:42-49은 오히려 정이철 목사님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을 놓고 일반적으로 인용하는 메시아 예언인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에 대해 이인규 씨는 아마도 자신이 소장한 몇몇 책에서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의 몸은 썩지 않았다’고 한 주석을 보았을 것이다(실제로 그렇게 주석한 책들이 여럿 있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 중에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 상당수 있다. 그럼에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들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말씀을 만나면,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이해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시16:10은, 이인규 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문자대로 이해하면 안 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만약 문자대로 이해하면 엄청난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규 씨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문자적으로 해석해버린 몇몇 주석들의 오류들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류가 있는 주석으로 정이철 목사님의 표현을 오류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이철 목사님에 대한 이인규 씨의 비판이 왜 문제가 되는지 두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는,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를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의 몸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내 영혼이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도 예수께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 영혼이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는 예수께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예수께 뒤집어 씌어 대속 제물 삼으심으로, 예수님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너무 커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칠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도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의 몸에 문자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시16:10이 말하는 참 의미일까? 시16:10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바르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심으로 음부에 버리셨지만, 언제까지 음부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3일 후에 음부에서 다시 이끌어내셨다. 그리고 그때 무덤에 내려가 3일 동안만큼 썩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님께서는 그냥 썩음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셨다.’

둘째는, 이인규 씨가 자신 있게 주장하듯, 만의 하나라도 예수님의 몸이 썩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망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한 나무에서 처음으로 어떤 열매가 맺히면, 그 후에는 첫 열매와 똑같은 종류의 열매가 반드시 그 나무에서 계속 맺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한 나무에서 첫 열매와 그 다음에 맺히는 열매들과는 맺히는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열매의 질적 차이는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몸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시간적으로는 성도의 부활보다 앞서지만, 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규 씨의 주장대로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님의 몸이 썩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성도들의 몸은 썩으므로, 썩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은 같은 나무에 달리는 첫 열매와 다음 열매들의 관계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이인규 씨의 잘못된 주장으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사탄은 무지한 사람의 잘못된 주장을 교묘히 이용해서 성도들의 부활의 소망을 무너뜨리려고 획책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인규 씨의 주장은 허구이다. 인간이신 예수님은 죄 없으신 것 말고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으시다. 그러므로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님의 몸은 3일 동안만큼 부패가 진행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상하신 그분의 몸을 온전한 몸으로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이 또한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어 우리의 몸이 썩고, 먼지가 되어 다 흩어져 버린다 할지라도, 마지막 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몸을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처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수명이 다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필자가 죽은 지 3일 만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면, 필자의 죽은 몸은, 당시 무덤에 계셨던 예수님의 몸처럼 3일만큼 썩은 상태에서, 예수님처럼 다시 온전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필자의 부활의 첫 열매이심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인규 씨는 ‘재창조’의 의미도 몰라

또 이인규 씨는 정이철 목사님이 사용하신 ‘재창조’를 가지고 시비를 건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피조 될 수 있느냐?’라고 핏대를 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질문은,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님이 사용하신 ‘재창조’(recreation)라는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재창조’를 하나님의 또 다른 창조 행위로 이해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지레짐작으로, ‘재창조’ 앞에다 ‘피조 되어’란 말을 임의로 붙여서 정이철 목사님의 ‘재창조’의 참 의미를 왜곡했다.

‘재창조’는 천지창조와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창조 행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피조된 세계가 범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재생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정이철 목사님이 말한 하나님의 ‘recreation’은 ‘remodeling’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recovery’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님의 ‘다시 지어졌다’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정이철 목사님은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창조의 sample’(정이철 목사는 이미 sample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더 좋은 표현인 '시작'으로 수정했다)이라고 묘사함으로, 사실상 문제의 소지를 비껴갔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통해 보면 ‘망가진 것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진술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로 죽은 하나님 백성을 다시 되살린다는 관점에서 '재창조'라고 말하는 것은 정상적인 신학교에 입합하여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말인데, 이인규 씨가 신학교에 가지 않고 독학한 한계가 이런 면에서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 이인규 씨는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만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모두의 사역이다”라고 하면서, 정이철 목사님이 설명하는 부활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들먹이는 것은 억지로 트집을 잡으려는 유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이단 사역자들 중에 일부는 아무데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갖다 붙여 상대를 헐뜯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류 구속의 전 역사가 삼위 하나님의 동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십자가나 부활 같은 어떤 특정한 사건에서, 예를 들어 부활에서 성령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면 당연히 삼위 하나님의 동역임을 지적해야 하지만, 그런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위 하나님을 들먹이는 것은 억지로 흠을 잡으려는 수작이 아니면, 무지에서 나오는 유치함의 산물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인규 씨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부활이 삼위 하나님의 모두의 사역이라는 주장을 여기서 굳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주장으로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혹시 십자가에 죽으신 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모두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또 부활을 주도하신 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며, 무덤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인류 구속의 전 역사가 삼위 하나님의 역사인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글을 닫으며

필자는 이인규 씨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복음의 핵심이다”와 “부활논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로마서 1장 3-4절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제목의 두 글을 읽으면서, 기대하며 찾은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김성로의 부활복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이인규 씨의 설명이었다.

필자는 이인규 씨가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 목사에 대한 반박(6)"에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비호하며 단언한 “히브리서 9장에 대하며 많은 견해가 있지만, 하늘의 성소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종말적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해 대단히 궁금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필자가 기대한 내용은커녕 암시조차도 없었다.

이인규 씨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나 부활하여 하늘성소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구속이 완성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부활복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설교 때에 자주 ‘하늘 성소’를 외치지 않는가?, 그런데 이인규 씨는 그토록 놀라운 부활복음을 왜 자랑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사람들은 가짜를 실제로 보여주면서 진짜라고 상세히, 그리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꺼린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진짜라고 우긴 가짜가 정말 가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가짜다. 그래서 이인규 씨는, 필자가 쓴 [이인규, 김성로 부활복음과 함께 침몰하였다]에서 정중하게 제안했지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자신 있게 마음껏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진리는 하늘의 천사라 할지라도 결코 성경적으로 보편타당한 진짜 진리로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또 말하지만, 이인규 씨는 ‘삼위 하나님이 어쩌구 하면서’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진리의 본질을 흐려 놓지 말고, 이제는 자신이 말한 “히브리서 9장에 대하며 많은 견해가 있지만, 하늘의 성소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종말적인 구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에 대해, <바른믿음>이 지금까지 성경 말씀으로 그것이 가짜라고 비판해 온 것처럼, 성경 말씀으로 그것이 진짜라고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이인규 씨는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모든 이들 앞에서 양심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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