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교수의 방언이론에 대한 비판(8)

▲ 김동수 교수

- 이창모 목사(제자들경배와 찬양교회 담임)

김동수 교수는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주장한다.1) 물론 이런 주장은 거의 모든 거짓방언자들의 믿음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롬8:26의 “성령의 탄식”이 정말로 방언기도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키기 위해 바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롬8:26의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우기고 있다. 조금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김 교수뿐만 아니라 방언 전도사 김우현 PD도 본문에 언급된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주장함으로써2) 자신의 방언기도를 신적인 것으로 격상시켰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이 하는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탄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성령의 은사로 교묘히 위장하려는 대범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 같다. 

이 입장에서 쓴 김동수 교수의 책을 보면,3) 이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국내외 학자들 대부분은 ‘성령의 탄식’이 방언기도가 아니라고 말한다.4) 그러면 로마서 8장 26절의 ‘성령의 탄식’이 왜 방언기도일 수 없는지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로마서 8장 26-27절의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지만,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오직 소수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도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묘사하는 성령의 도우심에서 배제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어떤 신자가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울타리 밖에 있다면, 로마서 8장 전체의 논증은 무너질 것이다.5)

둘째, 성령의 탄식과 방언기도는 기도하는 주체가 엄연히 다르다. 로마서 8장 26-27절의 “성령의 탄식”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성령이 친히” 간구하시는 기도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기도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근거한 방언기도는 본문의 “성령의 탄식”일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에서 “영으로”를 “성령으로” 슬쩍 바꾸어 놓고, 방언기도도 결국 성령이 하는 기도이므로 성령의 탄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편다.6) 그런데 설령 “영으로”를 “성령으로”로 바꾸어 놓는 것을 모른 척 한다할지라도, ‘성령이 친히 간구하는 기도’와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친히 간구하는 기도’는 말 그대로 성령이 직접 하나님께 하는 기도인 반면에,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성령이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셋째, 바울은 방언기도가 풍성했던 고린도 교회에서 로마서를 썼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왜 단 한 마디의 방언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방언기도가 “성령의 탄식”이 사실이라면, 방언기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대단히 중요한 은사가 분명한데, 왜 로마서의 은사 목록에서조차 방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성령의 탄식”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방언기도가 성령의 탄식이라면 방언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성령의 탄식도 깊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성령의 탄식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방언기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기도는 예수님께서도 금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중언부언’7)으로 번역된 헬라어 '밭탈로게세테’(battalogh,shte)는 아마도 “말더듬이”를 뜻하는 것과 같은 계열의 말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동사가 언어 장애 현상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되풀이되는 장황한 말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었을 것이다.8) 문자적으로도 이 단어는 ‘의미 없는 말들을 되풀이 하는 것’이란 뜻이다. 마태는 아마도 이교 세계에서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우듯이 되풀이하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같다.9) 그러나 ‘중언부언’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든지 간에, 예수님이 금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자가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 모르고 하는 기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기도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고전14:2), 기도하는 자신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고전14:14). 오순절주의의 방언기도도 그것을 듣는 자들이나 기도하는 자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 같은 소리의 발음들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방언기도야말로 예수님이 금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성령의 탄식’이 거짓방언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거짓방언자들이 스스로 인정하듯 이들은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야말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밤새 방언기도를 하고 있을 때,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대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친히 밤새도록 간구하고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아버지에게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소리로 밤새도록 미친 듯이 말하고 있는 자녀가 있다면, 그 아버지가 어떻게 그 자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새도록 헛소리하는 자녀를 위해 아버지도 밤새도록 탄식하실 것을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거짓방언들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하고 있는 방언기도를 멈춘다면 성령도 지금까지 이들을 위해 하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멈추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지 않도록, 기도할 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무의미한 방언기도 대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친히 하셨던 기도처럼 제정신으로, 내가 아는 말로 또박또박 진실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필자로 하여금 부족한 책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쓰게 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기억하라!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마귀는 방황하는 성도들의 영혼을 사냥하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역사한다. 이때 마귀가 쓰는 가장 강력한 수법중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강한 성도라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헛되게 된다면, 그 영혼이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마귀는 현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실패하도록 교묘한 덫을 하나 쳐놓았는데, 그 덫이 바로 기도하는 자의 마음에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게 하는 방언기도이다(고전14:14). 그러므로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로 번역된 헬라어 ‘소프로네오’(swfrone,w)는 ‘바른 마음을 가지다’, ‘자신을 통제(절제)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10) 이 단어는 마가복음 15장 5절에서는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린 자가 회복되어 정신이 온전해진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으며,11)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는 ‘미친’ 혹은 ‘정신 나간’ 것과 대조적인 의미(온전한)로 사용되었고, 로마서 12장 3절에서는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과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2)

따라서 본문에서 베드로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명령한 기도와 고린도 교회의 방언기도(고전14:2, 14)는 놀랍게도 정반대다. 어쩌면 성령이 베드로를 통해, 오늘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러나 교만하게 거짓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각 주----
1)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 51-52;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 북스, 2009), pp.38-57.
2)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p. 80, 148.
3)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 북스, 2009), pp.38-57. 김동수 교수처럼 성령의 탄식이 방언을 말한다고 보는 학자들은 케제만(E. Kaesemann), 발츠(H. Balz), 스땅달(K. Stendhal), 쿨만 (O. Cullmann), 피(Gorden D. Fee) 등이 있다.
4) ‘성령의 탄식’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은 쉴라터(A. Schlatter), 크랜필드(C. E. B. Cranfield), 던(James D. G. Dunn), 피츠 마이어(J. A. Fitzmyer), 빌켄스(Ulrich Wilckens), 무 (D. Moo), 쥬엣(R. Jewett), 로제(Eduard Lohse), 모리스(Leon Morris), 오벵(E. A. Obeng), 오브 라이언(Peter O' Brian) 등이 있다. 이 주장의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바울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 자인 제임스 던의 로마서(상) 주석(서울: 솔로몬, 2003), pp.796-797, 또는 토머스 슈라이너의 BECNT 로마서 주석(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532-534를 읽어보라.
5) 토머스 슈라이너, 로마서, 배용덕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532-533.
6)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46.
7) ‘중언부언’의 사전적 의미는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 함’이다. 아가페 성경사전(서울: 아 가페출판사, 1992), p.1541.
8)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상), 채천석 옮김(서울: 솔로몬, 2009), p.288.
9) 이강택, 생명의 삶 플러스, 서울: 두란노, 2011년 7월호, p.118.
10) 알란 M. 스팁스, 베드로전서,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179.
11) 프란시스 W. 베아레, 베드로전서 연구, 한의신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p.181.
12) 알란 M. 스팁스, 베드로전서,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p.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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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