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2)

성찬에 대해서 진술할 때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루터파의 입장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성찬에 대한 적극적 진술에서도 명확히 개신교적 입장 가운데서 어떤 쪽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 칼빈적인가? 쯔빙글리적인가? 불링거적인가? 멜랑흐톤적인가? 아니면 그것들 중 일부를 결합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를 논의한 학자들은 이 중의 어느 하나의 명칭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평생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연구하고, 모으고, 널리 논의하는 일에 헌신 했던 화란의 ‘빌렘 베르붐’교수는 팔리티네이트 공국의 다양한 신앙 고백적 흐름들의 ‘최대 일치’(maximal consensus)와 ‘최소의 불일치’(minimal dissensus)를 이룬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찬에 대한 진술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개신교 전체를 다 포괄 할 수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 멜랑흐톤적인가? 를 생각할 정도로 온건한 루터파 사람들이 들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프레데렉 3세의 부인인 마리아(Marie of Brandenburg, 1519 – 1567)의 (루터의 소요리문답으로 양육받은) 루터파적인 신앙에 거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찬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상당히 부드럽게 표현하여 모든 개신교인들이 다 받아들일만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론에서도 결국 개혁파적이므로 성찬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서, 즉 46문에서 49문에서 아주 명백하게 개혁파적인 입장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아챈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표현된 것을 가르쳐서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고 표현하고 하였다. 이를 성찬론에 넣어 이해하면 결국은 개혁파적인 성찬 이해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큰 특성이다.

성찬론에서는 논쟁적인 주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루터파, 쯔빙글리파, 불링거파도 상당히 근접할 수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배우고 각각의 논의를 상호 적용시켜 보면 아주 분명한 개혁파적인 이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승천 이후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신학적 문제이다.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으로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신성으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실 수 있고, 약속하신 바와 같이 우리와 항상 같이 하신다. 개혁 신학을 하던 우리의 선배들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천명해 왔다. 개혁파 신학은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Gott ist Gott, Mensch ist Mensch)이라는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루터파 신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부활 승천 이후에는 인성에도 신성의 성질이 적용될 수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도 신성과 같이 어디에나 다 있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본질적인 속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이런 개혁파의 전통을 잘 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이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인성으로는 그는 더 이상 땅 위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문답).

따라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인성과는 달리, 시공을 초월하신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신성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48문답 상)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 밖에서도(extra humanum) 역사하시고 작용하시는 것이다:

“그의 신성과 엄위와 은혜와 영으로는 그가 그 어느 때에도 우리에게서 떠나 계신 때가 없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문답).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밖에서도 역사하고 사역한다는 이런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열심히 주장하는 것이었으므로,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을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 안에 덜 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잘 설명하면서 오해를 방지하고 있다(48문 하).

그러나 이것은 주로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한 것이지만 칼빈주의자들만이 하는 주장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의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하는 제자들과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또 그 이전에 가르치실 때에도 주의 이름으로 치리를 하기 위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오늘도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의 신성으로 그는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문에서 49문답의 내용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고,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있으나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임을 분명히 천명한 칼케돈 신조(451)에 충실한 고백인 것이다. 그리고 오래 전에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가운데서 이런 입장을 잘 표현했으므로 이점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칼빈의 견해를 잘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다음 주장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이 부분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비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아니하시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나시고, 땅을 거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기를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계속해서 당신님이 처음부터 그리해 오셨던 것처럼 온 땅을 가득 채우셨던 것이다.

이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입장을 성찬에 넣어 적용하면,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성찬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찬에 함께 하신다는 영적임재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에서는 이런 결론을 유도하면서 논의하거나 답하지 않는다. 천주교도가 아니면 누구나 성찬에 같이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강한 성경적 입장이 부드러운 표현 속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와 성경적 가르침을 잘 받도록 하는 교육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과하게 표현하지 않아 사람들을 그 안에 끌어들여서 잘 교육하는 방식이 예정(豫定)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다음에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로 나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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