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자신의 목회적 체험을 근거로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상당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활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환호하고 기뻐하고 있다. 이제 그가 전하는 부활복음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체험적으로 말하는 부활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처음 목회를 시작하며, 신학교에서 배운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회개를 외치며 몸부림쳤던 5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고 ...(중략)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목회 실패의 원인이 십자가의 죽은 복음에 있음을 깨닫고 부활을 붙잡고 부활복음을 전했더니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사도행전에서 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김성로)

그는 사도행전에서 자신의 목회 실패의 원인을 찾았고, 또 목회 성공의 비결도 찾는다. 처음 5년 동안의 목회에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고, 목회를 실패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만 전하고 부활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십자가가 아닌 부활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서 부활을 전했더니 사람들이 변화되고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이후의 목회는 놀랍도록 성공했다는 것이 그의 목회 실패와 성공의 변이다.

부활복음의 시작은 사도행전에 대한 엉터리 해석

그는 행1:22과 행4:33에서 부활복음을 전해야하는 당위성을 찾았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부활을 증거해야 한다고 설교했고(행1:22), 또한 부활복음만이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줄 수 있다(행4:33)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행 2:36-37에서 부활복음의 능력을 찾았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어찌할꼬’하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활을 모르면 절대로 사람들은 죄를 깨달을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목회의 성공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도행전적 역사의 원인을 또한 사도행전의 내용으로 설명하므로 사람들이 믿을만한 신학적 근거가 있다고 안심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복음으로 변화를 체험했다는 신자들의 간증을 앞세워, 자신의 부활복음에는 실제적인 변화의 물증이 있으므로 안심하고 부활복음을 믿으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그가 인용하는 사도행전의 본문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정황과는 무관하다. 그의 부활복음은 자의적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가 빚어낸 비극에 불과하다. 필자가 앞글 “춘천 한마음침례교회의 부활복음은 '다른복음'”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예루살렘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이 유대 당국자들에 의해 로마제국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였다.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행2:37에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접한 자들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해서 ‘어찌할꼬’ 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 때문에 ‘어찌할꼬’ 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매달아 죽인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깨닫고 가슴이 찔려 ‘어찌할꼬’ 했던 것이다.

또한 행4:33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로 인해 무리가 큰 은혜를 입은 것도, 부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제시한 부활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들이 정말 구원받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시작은 그가 인용하는 사도행전의 본문들과 그 당시 초대교회의 정황과는 무관하고, 자의적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가 빚어낸 비극에 불과하다.

고린도전서에 대한 엉터리 해석이 김성로 부활복음의 틀

김성로 목사는 교회가 십자가의 죽음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부활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 당위성을 고전15:17절에서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김성로 목사는 이 내용으로 부활복음이 아니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의 죄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부활복음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더욱 부활복음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위 본문이 부활복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김 목사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는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이다. 바울이 이미 14-15절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으면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의 죽음 사건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전한 바울의 복음은 헛된 것이 되며,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도 구원이 없는 헛된 것이 되므로,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김성로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부활복음의 당위성, 즉 왜 예수께서 부활하셔야만 했는지를 히브리서로 설명하므로, 부활복음이 아니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의 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자신의 부활복음을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하였다.

히브리서에 대한 엉터리 해석으로 꽃이 핀 김성로 부활복음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엉터리로 해석한 성경 위에 자신의 부활복음을 정초해 놓고, 히브리서를 근거로 자신의 부활복음을 위험한 지경에까지 비약시킨다. 그는 자신의 부활복음을 꽃피우기 위해 먼저 히8:5절을 제시한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그는 모세가 지은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의 모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하늘에는 죄인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왜 장막이 있어야하는지를 몰라서 고민하다가, 히9:11-12에서 하늘에 장막이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부른다. 이때가 아마 그의 부활복음이 완성되어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그는 하늘의 장막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셔서 속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 장막에 들어가셔서 속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김성로 목사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십자가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15:17에서 부활이 없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늘에 있는 참 장막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온전히 사하여 졌다.”

그는 자신 있게 힘주어 말한다. 왜 부활복음이어야만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야만 하늘에 올라가 하늘 장막에서 죄인을 위해 제사를 드려 죄 사함을 이루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 그리고 이 부활복음은 자기만이 발견한 놀라운 것이라고 ... 이렇게 그는 자신의 부활복음은 이 시대의 일반적 복음증거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고후11: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의 탈을 쓰고 복음을 가렸다. 십자가가 복음을 가렸다. 은사, 능력이 부활을 가렸고, 성경 연구, 제자 훈련이 부활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세미나를 많이 해도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부활복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십자가를 전하는 자들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일꾼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부활복음에 현옥된 자들의 간증도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 복음 앞에서는 내가 변하지 않고, 그래서 삶이 참 힘이 들었는데, 어느 날 김 목사님이 히브리서를 제시하시면서 부활복음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이 제시하시는 부활복음을 붙잡았을 때, 내 삶이 변하고 신바람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이들의 간증을 자세히 음미하면, 결국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다른 교회에는 구원이 없고, 또 그것을 전하는 자들은 우리 김 목사님과는 다른, 거짓 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복음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김 목사의 히9:11-12의 해석은, 잘못된 자의적인 해석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단적인 해석이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십자가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있다.

요즘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날개 대표 김성곤 목사가 계12:14절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를 근거로, 두 날개는 이미 오래 전에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교 수준에 불과할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두 날개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처럼 노골적으로는 십자가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는 히브리서의 엉터리 해석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십자가만으로는 구원의 효력이 없음을 입증하려 한다. 히9:11-12에 묘사된 하늘 장막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시간적으로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이후의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이해함으로 파멸의 복음인 부활복음을 완성했다.

▲ 엉터리 부활복음을 전하며 미혹하는 김성로 목사(춘천, 한마음침례교회)

그러나 히9:11-12에 묘사된 하늘 장막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지상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늘에서도 일어난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신 사건임을 천명함으로써, 골고다 언덕에서 빌라도가 주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실제로는 전능자 하나님이 주도하신 인류 구원의 사건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김 목사가 히9:11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인줄 인지했으면서도,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다 크고 온전한 장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성)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흔히 사람의 몸을 장막이라고 하였다(고후5:1; 벧후1:14). 그런데 어째서 김 목사는 히브리서를 그렇게도 멋지게 인용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지성소의 휘장(히10:20)이었음을 몰랐을까? 아마도 김 목사는 히9:11-12만 보고, 이것으로 부활복음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어 더 이상 히브리서를 읽지 않고 성경을 덮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뒤에 기록된 히9:22의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자신의 부활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 복음을 가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김성로 부활복음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파멸복음”

그는 고전15장의 부활은 보았으면서도, 고린도전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십자가는 왜 보지 못한 것일까? 우리가 대부분 그렇게 이해하듯이 고린도전서 전체를 요약한 요절은 고전1:18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렇게 십자가를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화려한 은사만을 추구하고,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당시 초대교회들 중에 도덕적으로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가장 형편없는 부끄러운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교회에는 놀라운 부활신앙이 있었다. 최근 많은 학자들은, 이전의 일반적인 이해, 즉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플라톤주의의 영혼 불멸설에 영향을 받아 몸의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보다는, 딤후2:18절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에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고린도교회도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체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

고린도교회는 이미 자신들은 영적인 부활을 체험했으므로 지금 영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고, 십자가의 능력인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라는 냉소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린도교회가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긴 이유는, 은사들을 선호한 것 말고도 영적인 부활, 즉 이상한 부활을 붙잡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나 이상한 부활을 붙잡고 있는 한마음교회와 고린도교회의 이상한 부활신앙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김 목사가 십자가를 지나 부활을 붙잡은 것은, 혹시 고린도교회처럼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김성로 목사는 자주 “교회가 부활을 전하려고 하면, 사탄은 십자가에 머물도록 역사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힘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부활복음을 강조하고 붙드는 이유이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히브리서 9:11-12을 가지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십자가는 한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구원의 완성 선언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복음은 파멸의 복음임에 틀림없다.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한 이유는, 죽은 복음을 전하는 신사도주의자 문봉주 장로가 그의 부활복음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십자가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혹자는 필자의 십자가 강조를 놓고, 십자가 고난을 강조하면 성도들이 누려할 복음의 기쁨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십자가의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기우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십자가만큼 죄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이런 우려는 이 시대의 교회에 만연된 지극히 인본적인 복음의 영향 때문이며,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바로 부활복음이 세상과 타협하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바람을 내게 하는 인본주의 복음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성육신,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의 임함 등은 다 복음이며 그러므로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도 십자가가 없으면 복음이 되지 못하고, 십자가도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되지 못하며, 부활도 성령의 임함이 없으면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좀 아는체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면, 부활, 성령 강림 등은 당연히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루 고루 모든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말이 맞다면,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십자가를 강조했던 바울의 선교 사역은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여러 단계들 중에 그 완성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부활도 성령 강림도 아닌 십자가라고 해야 한다.

이해하기 쉽도록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만두는 만두 속과 만두 피로 이루어져 있다. 만두 속만으로 만두라고 할 수 없고, 만두 피만으로도 만두라고 할 수 없다. 만두는 만두 속이 만두 피로 덮혀 있을 때 비로소 만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두를 만두로 결정하는 것은 만두 피가 아니라 만두 속이라는 사실이다. 만두 속이 고기면 고기 만두가 되고, 만두 속이 야채면 야채 만두가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도, 그것의 특징을 결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이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 십자가인 이유다.

그러면 왜 바울 복음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을까? 그것은 바울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전1:17)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고(고전2:2),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았으며(갈6:14),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전1:23). 이것은 갈라디아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그러면 바울이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한 것은, 부활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십자가 앞에 서야 만이 부활도, 재림도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소망과 재림의 기대를 제대로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십자가가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나의 죄가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부패한 모습을 보고 절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버러지보다 못한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신다는 것이, 사실상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그 구원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바울처럼 자신이 감옥 안에 있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날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을 확실하게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부활도 확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주의 재림도 확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만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신바람 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인생을 산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보다, 나의 인생을 더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부활복음은 십자가를 지나가 버린 복음이다. 그래서 거기서는 추악한 자신의 죄인 됨을 볼 수 없으므로 고통스러운 좌절이 없다. 거기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없으므로, 고뇌하며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에는 좁은 문이 없으므로, 자신이 초라하고 작아 보이지 않는다. 부활복음은 결국 넓은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때때로 십자가를 말하므로, 그 길은 넓은 길 같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간다. 멀리 부산에서도 불원천리 날아와 그 길을 간다. 그 길을 가는 자들은 주님이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이 아니므로, 신바람 나는 노래를 부르며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이 아닌 까닭에, 그 길 끝에서 먼저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활복음은 부활을 강조하나 죽은 복음이다. 그리고 죽은 복음이 주는 신바람은 파멸의 바람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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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