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방언통역 명령은 거짓 변태방언을 퇴출시키려는 목적이 커

바울은 고전14:27-28에서 통역의 은사를 사용해서 거짓방언을 분별해 교회에서 퇴출시키도록 고린도교회에 권고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김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거짓 변태방언 전파자 김동수 교수

"바울은 고전 14:5에서 방언 통역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의 효과와 똑같은 것이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듣는 이의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있었듯이(고전 14:4), 방언 통역은 방언에 대한 통역이었기에 듣는 이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주장은 만약 방언이 영의 기도라면,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인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앎으로 본인이나, 그것을 듣는 이에게 예언과 같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방언 통역의 목적은 방언이 올바른 것인지 거짓 방언인지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자의적 해석의 극치다. 본문에는 방언 통역이 예언과 같이 교회의 덕(교회의 세움)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방언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은 영 분별의 은사이지 방언 통역의 은사가 아니다."(김동수)

그런데 김 교수는 어느 북 콘서트에서 있었던 다음 질문에 대해 앞서 자신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대답을 한다.

"가짜방언은 어떻게 구별하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도 가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북 콘서트에서 한 독자의 질문) 

"가짜방언이라는 것은 누가 퍼드렸느냐?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간다. ‘가짜방언’이라고 할 때 움츠러들지 않나? 천사와 마귀 중 누가 이 풍문을 퍼뜨렸냐고 묻는다면 마귀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진짜나 가짜냐를 구분하라고 하는데, 고전 14장에는 두 세 사람이 방언하고 한 사람이 통역해서 분별하라고 한다. 또 신앙고백 여부로 구별할 수 있다(고전12:3). 실제 집회에서 가짜방언은 우려할 만큼 많지 않다고 본다."(김동수)1)

왜 김 교수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 그것은 김 교수는 고전14:27-28에서 바울이 왜 통역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필자의 주장에 자신들의 거짓방언이 탈로 날까 두려워서 무작정 반대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왜 방언과 통역의 은사가 있었을까

사도행전의 방언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을 대상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방언을 따로 통역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예배에서(고전14:26에서 “너희가 모일 때에”라는 표현은 예배의 때를 의미한다)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인과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 즉 언어가 다른 자들이 섞여 있는 회중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성령은 고린도 교회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도 주신 것이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은 반드시 함께 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다른 자들이 함께 있는 예배에서 방언이 시행될 때는 통역도 반드시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현지인 신자들은 외국인들에게 들려주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방언을 듣고 그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외국인들이 방언을 듣고 때로 가슴을 치고 울며, 무어라고 말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이것은 이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습이다)을 보면서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궁금증을 그대로 남겨둔 채 예배가 진행된다면, 아마 현지인 신자들은 그 궁금증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방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지인 새 신자들은 방언을 듣고 “미쳤다”고 하면서 교회를 이방 신전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14:23 참고). 따라서 성령은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해 방언과 함께 통역의 은사도 주신 것이다. 방언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예배에 참석한 외국인들 뿐 아니라 현지인 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외국인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는 자들이 현지인 신자들만 있는 예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으로 서로 경쟁하듯 떠들어댔다. 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이런 자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난장판이 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심각하게 변해 버린 교회의 상황을 걱정하던 몇몇 신자들이 결국 이 문제를 바울에게 호소했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된 거짓 은사들을 지적하고 그것들을 퇴출시킬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고린도전서 14장 26-33절이 바울이 제시하는 거짓 은사 퇴출 방법인데, 그것은 영분별 은사와 통역의 은사를 사용해서 거짓 예언과 거짓 방언을 분별해 내는 것이었다.

거짓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예언은 영분별의 은사로 가려낸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14:27)

왜 바울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할 때 차례를 따라 하도록 명령하는 것일까? 단지 예배가 무질서했기 때문일까? 만약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 사실이라면, 굳이 차례를 정해놓고 한 사람씩 말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언으로 말한다 해도 다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은사다.

그러므로 방언은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 통역의 은사자가 듣고 통역할 수 있도록, 그리고 통역한 것을 현지인 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한 사람씩 차례대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차례를 정해 주고, 한 사람씩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게 한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차례를 정해 준 까닭은 단순히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게 함으로 예배의 무질서를 막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통역자가 차례대로 행해지는 방언을 듣고(만약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지 않으면 통역자가 제대로 들을 수 없으므로 통역할 수 없다) 통역 가능한 방언과 통역 불가능한 거짓 방언을 가려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인위적으로 순서를 정하지 않더라도 방언으로 말할 때, 중복 없이 차례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서의 하나님이신 성령이 방언을 말하게 하실 때 두 사람 이상이 한꺼번에 말하도록 역사하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2)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닌, 거짓 방언이라면 서로 약속하지 않는 한 중복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들이 지휘자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예배에서 성령의 지휘를 받지 않는 거짓 방언자들 때문에 억지로 차례를 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통역자는 순서대로 행해지는 방언을 듣고 통역할 수 있는 방언은 통역하고, 거짓 방언은 통역하지 않음으로(정확하게 말하면 통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메시지가 없는 허튼 소리이기 때문에 통역 은사자라 할지라도 통역할 수 없다. 거짓 방언을 가려내 예배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통역은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에게 방언의 의미를 알게 하는 기능보다는 거짓 방언을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기능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한 통역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방언과 거짓 예언을 퇴출시키려고 제시한 고린도전서 14장 26-33절의 방언-통역 그리고 바로 뒤에 병행된 예언-영분별에서, 영분별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면 통역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이 예언할 때에 다른 이들, 즉 영을 분별하는 은사자들(고전12:10)에게 예언을 분별하라고 지시한다. 바울은 왜 예언을 분별하라고 지시했을까? 그것은 예배 때에 시행되는 예언들 중에 거짓 예언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분별의 은사자들이 거짓 예언을 분별하는 목적은 무엇일가? 거짓 예언을 분별해 거짓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예언은 회중 앞에서는 부적당하니 집에 가서 혼자 예언하는 것이 더 낫겠소.”라고 조언하기 위함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거짓 예언으로 판명된 예언자들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방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바울이 방언을 통역하라고 한 것은, 예언을 영분별로 가려내는 것처럼 거짓 방언을 통역으로 가려내서 교회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이지,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회중 앞에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집에 가서 혼자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즉 바울이 방언을 통역하라고 명령하는 까닭은 거짓 방언을 퇴출시키려는 것이지, 방언기도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알선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27절을 29절의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와 연결시켜서 보면, 두 본문이 서로 같은 구조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언하는 자들이 둘이나 셋이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이 예언을 분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 예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방언을 말하고 한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제 문제의 본문인 28절을 살펴보자.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

거짓 방언자들은 물론이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예배 때 회중 앞에서 방언을 말할 때 만약 통역의 은사자가 없어서 방언을 통역할 수 없으면, 회중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집에 가서) 개인의 덕을 위해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면 된다. 바울은 여기서 방언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는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자제하라고 권면한 것이다."3)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27절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의 방언이‘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역이 없다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통역 없이도 얼마든지 방언의 의미를 아실 것이다. 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언을 말한다(거짓 방언자들은 이것을 방언의 오용 또는 남용이라고 말한다) 해도 하나님이 이들의 비밀을 들으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심오한 방언기도는, 아무리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할지라도 예배에서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바울은 왜 이런 방언을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거짓 방언이 난무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조금 과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본문을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을‘방언을 말할 때에 그곳에 통역의 은사자가 없으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석이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같은 문장 구조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말하는 바로 뒤의 문장, 즉 바울이 예언을 분별해 거짓 예언을 가려내도록 영분별을 말한 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해석은 전지전능하신 성령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신 성령이 통역의 은사자가 없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방언의 은사자에게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하게 하시겠는가? 그래서 회중 앞에서 방언으로 말한 것이 다 헛수고가 되게 하고, 할 수 없이 그 사람은 집에 가서 혼자 그 방언을 다시 하도록 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성령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시는 바보 하나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2:4) 말하는 은사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t실수하지 않도록 반드시 그 자리에 통역의 은사자도 준비해 놓으신다. 성령은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시다(롬11:29).

그래서 바울은 거짓 예언과 거짓 방언으로 말미암아 무질서해진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염려하며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고까지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배에서 통역자가 없는데도 누가 방언으로 말하면 그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거짓 방언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28절에서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한다. 왜 이런 명령이 가능한가? 만약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바울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방언을 함부로 멈추라고 명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설령 바울이 “잠잠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스스로 멈출 수도 없을 것이다(물론 짐짓 성령의 은사인척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스스로 말하고 멈출 수 있다. 요즘 거짓 방언자들처럼 말이다).4) 따라서 바울이 27절에서 방언 통역을 명령한 것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 고린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함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주실 때에도 예언을 분별하는 영분별 은사도 반드시 함께 주셔서 예배에서 시행되는 예언들을 분별하게 하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이 예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할 수 없으므로 섞여 있는 거짓 예언으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이 실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에서는 영분별의 은사자없이 예언의 은사자가 예언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예배에서 예언의 은사자에게 예언을 하게 하실 때는 반드시 예언을 분별하는 은사자도 세우셔서 예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하게 하시고(고전14:29), 또 방언으로 말하게 하실 때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도 세우셔서(고전14:26) 방언의 거짓 여부를 분별하게 하신다.

그러면 바울은 왜“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고 말했을까? 지난 예배 때 있었던 통역의 은사자들이 이번 예배에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러므로“통역하는 자가 없으면”이라는 말의 진의는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 통역의 은사자가 여러 명 있는데도 그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한 명도 없으면’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거짓 방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역의 은사자가 아무리 많아도 꽹과리 소리 같은 소음에 불과한 거짓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자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거짓 방언자들은 본문에 언급된 방언은 통역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언인데 단지 그곳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므로 집에 가서 혼자 하라는 것이라고 우긴다. 따라서 이들은 2절, 4절과 함께 28절도 바울이 개인의 덕을 위한 개인용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짓 방언자들은 28절에서 바울이“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개인적인 방언기도를 명령했다고 하면서, 28절이야말로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그래서 개인의 덕을 위하는 은사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사실일까?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가 바울이 개인적인 방언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을 다시 보라. 바울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자들에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한 뒤에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거짓 방언자들처럼 ‘집에 가서 혼자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말은 방언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알선해 주는 말이 아니라 거짓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바울의 냉소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

본문에서 바울은 개인용 방언기도를 인정하고 있는가? 통역이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해서 안 되는 방언을, 집에서 혼자 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 교회에서는 새는 바가지라도 집에 가져가면 안 샌다는 말인가?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본문에 앞서 26절에서 예배 때 사용되는 은사들을 나열한 뒤에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명령한 바울의 말을 고려하면, 결코 개인용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떤 예외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짓 방언자들이 28절을 바울이 개인용 방언을 인정하는 말이라고 우긴다면,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바울의 말과 명백히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개인용 방언을 우기는 거짓 방언자들은 자신의 성경에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바울의 말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 회중 앞에서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회중들이 그 방언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이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익이 없기는 뜻을 알지 못하고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어떤 자가 회중 앞에서 예언했을 때, 회중이 그 예언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이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동시에 예언한 자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예언한 당사자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무익함은 예언하는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뜻을 몰라서 회중에게나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없는 방언이, 방언하는 장소를 교회에서 집으로 옮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바울은 교회에서 하면 안 되는 쓸모없는 방언을 왜 집에 가서 혼자 하나님께 하라고 했을까? 바울은 28절에서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은 회중 앞에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방언기도의 대상을 “자기와 하나님”으로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방언기도를 하나님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하라는 말이다. 결국 이것은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자기가 하는 방언기도를 자신이 하나님처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말로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은사가 아닌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포스트모던 시대, 특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뉴 에이지 사상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다.

만약 바울이 방언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이라고만 했다면, 물론 바울이 방언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이라고만 했다 할지라도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이 결코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억지를 부릴 여지가 조금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자기)와 하나님을, 대등(동격) 접속사 ‘카이’(그리고)로 연결시켜 “자기와 하나님”으로 표현함으로, 그런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거짓 방언으로 떠드는 자들에게 하는 냉소적인 말임을 드러낸다. 바울이 거짓 방언자들의 말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방언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너희는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니 여기 회중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너나 실컷 들으면서 하나님께 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기도를 듣는 대상을 하나님과 기도하는 자신까지 하나님과 동격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이들의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자신만이 들으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헛소리임을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어떤 기도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사실상 미친 짓이다.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방언기도가 이렇다는 말이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바울의 표현은 결코 정상적인 기도의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거짓 방언의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방언기도는 그 방언기도를 듣는 자는 사실상 자신밖에 없는 미친 짓이라는 말이다!

개역개정에서 “자기(자기에게)와 ~ 말할 것이요”로 번역한 헬라어 ‘에아우토 데 랄레이토’를 영어 성경에서는 ‘speak to himself’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다’ 즉 ‘중얼거리다’이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넋 놓은 상태에서 헛소리 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자기에게 기도하듯, 그것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혼자서 하는 방언기도는 넋 놓은 상태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제정신이 아닌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5)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을 무분별하게 함으로 예배를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에게, “거짓 방언으로 다른 사람들의 귀를 괴롭히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떠들고 혼자 들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고린도 교회의 방언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느 고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영어 시간의 상황을 예로 들어 보자.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 상황은 아니다.

영어시간에 영어를 잘하는 한 학생이 반 아이들의 듣기 실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 앞에 나가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있다. 그때 시샘 많은 어떤 학생이 일어나 선생님에게 말한다. “저도 앞에 나가 영어로 말하게 해 주세요. 저 학생보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그 학생은 학생들 앞에 나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학생이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는 학생이 없다. 왜냐하면 그 학생이 하고 있는 말은 영어처럼 발음해서 영어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은 영어가 아닌 그저 잡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영어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그 학생을 제지한다.

그러나 그 학생은 화를 낸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진짜 영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그때 선생님은 “누가 이 학생이 하는 영어를 통역해 보겠어요?”라고 말한다. 다시 그 학생은 영어 같은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한다. 그러나 통역을 잘하는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통역할 수 없어요.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영어가 아니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학생은 계속 우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분명히 영어야! 단지 너희가 수준이 낮아서 알아듣지 못할 뿐이야! 내 영어는 영어의 신(神)은 알아들어! 나는 지금 영어의 신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말하고 있거든!”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말한다. “그러니? 네 영어는 참 대단하구나! 그러나 네가 말하는 영어가 아무리 대단해도 다른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 여기 교실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서 하든지 너의 영어 신(神)에게나 하렴!”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통역하지 않은 방언’이 아니라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통역할 필요가 없어서 통역하지 않았을 뿐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아예 통역할 수 없는 방언, 즉 아무 의미가 없는 꽹과리 소리 같은 거짓 방언이었다. 바울은 이런 거짓 방언을 통역의 은사로 분별해서 교회 밖으로 퇴출시키도록, 고전14:27-28에서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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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희(dong423@newsmission.com)l 등록일:2015-05-07 15:26:08
2.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333
3. 캐네스 헤긴, 성령세례와 방언, 장혜영 옮김(서울: 베다니출판사, 2011), p.47. 그러나 이것마저도 오늘날의 방옹자들은 지키지 않고 있다. 통역 없이 방언을 하면서도 혼자서 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모여서 서로 경쟁하듯 하고 있다. 만약 이 본문이 개인용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개인용 방언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혼자 골방에서 방언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방옹자들은 집에서 혼자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로 경쟁하듯 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 어귀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보면 그 이유를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 같다.
4. 현대 교회의 방옹자들은 방언의 은사만큼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언제든지 할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는 은사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 자랑은 스스로 자신들의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은 성령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다.
5. 로버트 토마스는 ‘자신과 및 하나님께 말하다’는 ‘명상하다’를 뜻하는, 당시 잘 알려진 속담적 표현이라고 소개한다.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p.201. 결국 이 말도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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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