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통역이 불가능한 변태방언은 성경의 방언이 아냐

김종명 선교사(태국)

창세기 2:18-19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거하는 아담을 위해 돕는 베필을 만드실 때 생겼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각종 들짐승들과 새들을 만드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카라’) 보시려고 그들을 아담 앞으로 인도해 오셨다. 아담은 그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 줬는데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처음부터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던 존재다(호모 로쿠엔스, Homo loquens). 즉 ‘의미있는 소리’로 만들어진 단어와 문장을 사용할 줄 알았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현생 인류는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 언어(‘싸파’)를 사용했다.

창세기 11:1-9에는 온지면에 흩어져 땅을 개발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에 불순종하여 ‘바벨탑’을 쌓아 그들의 이름을 높이고, 그 탑이 보이는 데까지만 가서 살려는, 불순종의 정신이 가득찬 인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당시까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인류의 의사소통을 막으셨다(“Let us go down and confuse their language so they will not understand each other”).

그 후 온 인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 그룹들이 민족을 이루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 지상에는 6,000여 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서로 분리된 체 격리, 고립되어 단절된 의사소통을 해 온 인류는 그런 의사소통의 단절로 인해 전쟁 같은 압박을 통해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신다(창 11:29 이하).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한 민족(나라)을 이루시고 그 히브리 문화와 언어 속에서 온 인류를 위한 복음을 완성하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음이다.

요엘 2:28-32를 보면 말세에 성령을 온 세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14-21, 오순절 성령강림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인용했던 말씀으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 이적이 이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선포했다.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우리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선교위임령이 나타나 있다. 이 위임명령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그 중 마가복음 16:15-20을 살펴보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시며 그 결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며 믿는 신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
2) 새 방언(new languages, ‘글로싸’)을 말할 것,
3) 뱀을 손으로 집고, 독을 마셔도 해함을 입지 않을 것(하나님의 보호),
4)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나을 것,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들과 신자들이 새로운 문화권 속에 들어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새 언어’를 말해야 했던 것은 실로 당연시 되는 전망이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예수님은 장차 성령이 오시면 믿는 자들에게 권능을 주어 당시 복음이 전파된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하셨다. ‘땅끝’이란 말로 축약했지만 기독교 복음은 소아시아 – 그리스 – 로마와 지중해 연안 – 유럽 – 신대륙(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 아시아로 계속 전파되어 왔다.

기독교 복음이 각 문화권에 뛰어들 때 마다 이 복음은 그 해당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상징과 기호 체계들, 특히 ‘언어’로 설명되어져야 했다. 히브리 문화와 언어 속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복음이 그 문화와 언어를 뛰어 넘어 이제는 다른 문화들 속에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야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 드디어 오순절 성령강림의 증표로 ‘방언’기적이 나타난다. 이 기적은 같은 성질의 기적이 계속 되풀이 될 것을 기대하거나 전망하지 않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한 증표로 단회적으로 행해진 기적이었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배운 적이 없는, 당시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15개 지역 이상에서 사용되던 유창한 지역 언어들로 예수님을 증거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과 방언 기적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해소시켜 이제 모든 문화와 언어권에 사는 만민이 하나님과 전 세계 모든 민족들과 개인들과 평화의 의사소통을 하게 될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성령강림과 방언 기적은 복음이 사마리아로(행 8:17 이하), 가이사랴 지역으로(행 10:44-46, 고넬료 가족), 에베소 지역으로(행 19:1-7, 소아시아) 점층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몇 차례 좀더 단순화된 형태로 거듭 제시되어, 성령이 약속대로 모든 믿는 자 위에 오시는 것을 표징으로 확증시켰다. 곧 기독교 복음이 새로운 지역(문화적, 민족적, 언어적)으로 전파될 때 마다 새 방언(new language)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셨음을 확증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복음은 타문화권(언어권)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며 역동적으로 전파되어왔는데, 이에 관한 한 학파의 관점을 살펴보자.

아프리카의 존 음비티(John S. Mbiti), 라민 싸네(Lamin Sanneh)와 크와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아시아의 이문장과 화융(Hwa Yung),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유럽의 앤드류 월즈(Andrew F. Walls)는 지나온 선교역사 속에서 어떤 하나의 현상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앤드류 월즈는 기독교 역사를 유대시대, 그리스-로마시대, 이민족시대, 서유럽시대, 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 그리고 현재의 ‘남반부시대’로 구분하고 조망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생명력은, 그 전체 역사를 통해 볼 때, 언제나 "타 문화권으로 전파됨으로써 유지되었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와 여러 면에서 비교할 수 있는 이슬람이 중동의 특정 문화를 고정불변의 중심으로 둔 채 '하나의 이슬람 문명'을 확장(또는 축소)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시대마다 중심 자체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타문화를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무한한 '번역 가능성'(translatability)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기독교 역사의 첫 시대부터 복음은 타문화어로 '번역'됐다. 기독교가 '유대 그리스도인'의 종교, 곧 유대교의 한 종파에 머물지 않고 이방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에서 '구브로와 시돈'의 무명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던 이방인 몇 명에게 유대 민족의 구원자, '메시아' 예수를 모든 인류의 구원자인 '주'(키리오스)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주'라는 용어는 당시 지중해 동부 지역의 여러 종교집단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를 때 사용했던 말이다. 이러한 "과감한 타문화 번역과 기묘한 상징 빼앗기"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적 율법 준수와 할례를 고집하고 자기네만의 구원자 '메시아'를 고집하려했던 일부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종교를 넘어 오늘날 세계 모든 민족과 종족의 '난 곳 방언으로' 고백될 수 있는 복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복음이 새 문화권의 새 방언(new language)으로 설명되지 않았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AD 1세기 이후 초대교회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교통의 발달로 소아시아, 특히 그리스 항구도시들에는 여러 문화권,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결과 그 도시들 속에 있는 교회(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다양한 언어권 출신의 신자나 관심자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다. 특히 그리스의 ‘고린도’(Κόρινθος)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고린도는 그리스 문화권 속의 국제적 항구도시로 많은 신전들이 자리잡았고,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25,000여 명의 유대인 사회에 전도한 바울의 사역으로 다수의 유대적 그리스인들과 다른 문화권/언어권에 속한 사람들도 기독교 복음에 반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전후서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라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또한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성적 방종에 관한 경계의 글도 여러 곳에 나타난다. 이런 다문화, 이교문화, 다중 언어적 상황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였기에 바울 사도는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생활과, 특히 교회 모임시 의사소통상의 질서를 잡기 위한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방언’ 사용에 관한 가르침이었다(고전 12-14장).

당시 ‘로마의 호수’로 불렸던(Mediterranean was a "Roman Lake") 지중해 연안은 무역활동을 통해 다양한 지역 문화와 지역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교육을 받은 로마인들은 헬라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교육을 받은 헬라인들도 어느 정도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유창함의 정도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직업에 따라 다 달랐다. 당시 라틴어(Latin)와 헬라어(Koine Greek)가 지배적인 주요 언어였다고 하지만 문학적 자료들과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지중해 연안에서는 그 두 언어 말고도 페니키아/카르타고어

(Punic/Carthaginian or Phoenicio-Punic)), 이집트 콥틱어(Coptic), 예수님의 모국어로 여겨지는 아람어(Aramaic), 시리아어(Syriac) 등의 다양한 언어들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어 사용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으로 교회 모임에 참석했을 경우 모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였다.

고린도전서 12:4-11을 보면 은사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이 있다. 여러 가지 은사를 소개함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맨 마지막으로 ‘방언 말함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를 짝지워 소개한다.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와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는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은 통역이 가능한 언어(외국어)였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2, 14장의 방언은 서로 다른 것이라며, 오늘날의 방언 현상으로 나타나는 언어적 현상은 통역이 불가능한 것임을 애써 감추려 하지만, 이런 두 종류의 방언(외국어, 신비한 언어) 이론은 성경의 지지를 조금도 받지 못한다.

방언이 통역 가능한 언어(외국어)라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 특징들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음운론(Phonetics), 형태론(Morphology), 통사론(Syntax), 의미론(Semantics), 비교 언어학 등에 의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을 히브리어, 영어, 한국어, 태국어로 써서 위의 언어학 영역들로 분석해 보면 최선의 통역을 위한 통일성 있는 문법적 원리, 원칙,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고린도전서 13:1에서 바울은 사람이 많은 방언들(언어들)을 말하고 심지어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14장에서 바울 사도는 방언의 가치와 올바른 방언 사용의 원칙들을 제시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절 – 예언은 자국어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외국어)보다 좋다.

2절 –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는 통역자가 없으면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no one understand him) 통역이 없으면 마치 알수 없는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3절 –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만,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 통역이 있어야 교회의 덕을 세운다.

5절 – 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 예언만 못하다.(청중이 이해할 수 없으므로)

6절 – 바울 사도 자신의 사역을 예로 듦. 만일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가서 ‘외국어’로 말하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침을 주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반문) 의미없이 울려 퍼지는 거문고, 나팔소리와 같다.

9절 – 가능하면 교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

10절 – 뜻이 없는 소리는 없다. (통역이 없으면 뜻이 없는 소리와 같다)

11절 – 말의 뜻을 모르면 의사소통상 몰지각한 사람이 된다.

13절 – 방언 말하는 사람은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14-17절 – 방언(외국어)으로 기도(pray), 찬미(sing), 축사(praise), 감사(thanksgiving)를 하면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공감할 수 없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유창하게 통역할 줄 모른다면(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이 모국어만큼 그 외국어를 유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본인에게도 별 유익이 안 된다. 영적, 지적으로 의미는 알아도 마음으로, 정서적으로 확 다가오지 않는다. (외국어를 능숙히 알지 못하는 경우, 예를 들면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의 라틴어 미사 집전, 태국어를 막 공부한 사람의 태국어 기도문 읽기,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의 영어로 기도하기 등. 영어를 거의 잘 못하는 브라질 사람이 영어를 잘 모르는 한국 사람과 대화하는 경우 처럼, 라틴어를 잘 모르는 헬라 사람이 라틴어를 잘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라틴어로 말하는 경우)

18절 –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절 –교회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 다섯 단어로 남을 가르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일만 단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

21절 –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방언이 외국어임을 암시해 준다.

23절 – 교회에서 통역없는 방언 사용은 불신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하기 쉽다.

26절 – 고린도 교회의 예배 모습. 모일 때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과 방언 통역이 있었다. (방언과 방언 통역은 다른 외국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관심자들의 방문시 있었던 모습임이 틀림없다. 태국교회에도 가끔 외국인 설교자, 간증자가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27절 – 모임시 방언(외국어)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의 지침으로 두 명 또는 최대한 세 명 정도가 차례대로 한 명씩 말하고 반드시 통역자가 있어야 한다.

28절 – 통역자가 없으면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은 말하지 말고 조용해야 한다(should keep quiet).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회중에게는 말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적어도 그 말을 하는 자기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9절 – 예언(미래의 길흉화복을 말하는 무속적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설명, 선포하는 행위)은 두 세 명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바르게 예언하는지 분변한다. 계시는 예언보다 우선시된다.

33절 – 하나님은 어지럽고 혼란스런, 갈등, 부조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질서있고 화평한 분위기 속에서 드려져야 한다. (오늘날 일부 은사주의 교회들의 예배의 분위기를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강조되어야 하겠는가?)

39절 – 그 언어권의 주요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고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말도록 금해서는 안 된다. 소수의 외국인도 말할 자격이 있다. 간증, 나눔의 기회를 줘라. 단 회중의 유익을 위해 통역은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요한 계시록 5:9-10(예수께서 만민들 속에서 사람들을 사서 드리시고 제사장 삼으심), 7:9(만민들 속에서 나온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송함), 14:6(만민들에게 전할 복음을 가진 천사들)에는 각 족속(every tribe), 각 방언(every language), 각 백성(every people), 각 나라(every nation) 출신의 ‘만민’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는 장차 복음이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만민에게 전파되고, 만민들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나오고, 그 구원받은 이들이 장차 어린양의 보좌 앞에 모여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전망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봤듯이 성경은 ‘방언’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외국어라는 뜻 이외에 오순절 주의자들이 말하는 황홀경 속에 말하는, 이해와 통역이 불가능한 ‘신비한 언어’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다음에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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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명 선교사는 합동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OMF를 통해 파송되어 1995년부터 태국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 훈련원(GMTC), 말레이지아 침례 신학교(MBTS, 선교학 박사)에서 타문화권 선교를 위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였으며, 최근 선교지에서도 크게 일어나고 있는 신사도운동 등의 성경을 곡해하는 거짓된 방언 등의 그릇된 성령운동과  은사주의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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