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의 가족을 걸실하게 만든 한국 교회는 음녀

해방 후 신사참배, 우상숭배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

해방 이전에 신사참배하였던 교회들의 문제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 건강 상태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의 많은 내용은 최덕성 교수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에서 옮겨온 내용이고, 일부는 필자가 첨가한 내용이다.)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한강에서 일본 귀신의 백성되었음을 의미하는 신도침례를 행하고 있는 모습

1) 믿음을 지키다 고난당하다 출옥한 성도들이 광복 후에 문제를 삼은 것은 우상숭배자, 배교자들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드릴지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베푼 성례의 효용성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변절자들과 배신자들이 베푼 세례를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를 성자들의 공동체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자들, 투옥된 자들은 높은 수준의 성서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출옥자들이 일제 신사참배에 솔선수범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성서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버렸다. 이것이 21 세기 현재까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병폐이며, 이 유산으로 말미암아 아마 한국교회는 주님 오실 때 까지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염려가 있다.

2)주기철을 적(敵)으로 간주하여 파면한 일제 말기의 이른바 한국교회는 단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는가 아니면 무너진 교회, 음녀 혹은 “영적간음”을 행하는 집단이었는가? 민경배는 “당시의 교회가 역사적인 오점을 가졌으나 정통성을 지닌 교회였다”고 주장한다. 한편 수진수난(守眞受難) 성도들은 당시의 교회를 영적 간음을 행하는 집단, 곧 음녀로 보았다.

3)일본인 신학자 와따나베 노부오(渡邊信夫)는 일제말기의 일본교회는 무너져버렸으므로 난경 속에서도 교회를 지켰노라고 하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다. 우상숭배와 배교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 교회론적으로 조망해보면 일제 말기 이른바 “한국교회”는 부패한 교회가 아니었다.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송양원, 한부선 등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목회직을 박탈하고, 제명, 축출한 교회, 그들의 가족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걸식하게 한 한국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었다. 이른바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일제시대에 목회자들이 신사참배하는 모습

4)광복 후 출옥성도들이 배도하던 교회의 안수례와 성례의 효용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교회관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재건파는 4세기 초 아프리카 도나투스주의자들과 유사한 교회관을 갖고 있었다. 기성교회를 사탄회, 마귀당으로 여기고 배도한 교회가 행한 성례와 안수례의 효용성을 부정한 자들도 있었다. 신사참배를 행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하고, 안수를 받은 자도 다시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재세례의 주장과 재안수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 라고 보는 자도 없지 않았다.

수진수난자들은 일제 말기의 교회를 영적으로 간음한 음녀로 보면서도 그 교회가 집행한 세례와 안수례의 효용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세례 집례자들이 신사참배라고 하는 우상숭배-황제숭배를 행할 뿐 아니라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귀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기 때문에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신입교인들에게 신사참배와 신도침례(미소기바라이)를 행하는 목사들에게는 세례를 받지 말게했다. 그 침례는 “가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신계 출옥성도들은 광복 후 안수례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행했던 시절에 행해진 일들에 대한 관용 정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만주조선기독교는 이단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들(고신출옥성도들)은 “이단”기구가 시행한 안수례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것은 칼빈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고, 로마교회를 그리스도의 대적자, 사악한 인간들의 당파, 더러운 창녀로 보면서도, 그 교회가 베푼 세례는 인간의 불경건에도 불구하고 그 효용성이 유지되는 것으로 본 것과 일치한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은 한국교회가 아니다. 순일본기독교, 곧 신도교이다.

5)단지 과거사를 공적인 참회와 자숙으로써 청산해야한다고 했다. 3세기 로마제국치하에서 핍박받은 초대교회의 문제와 전혀 다르다. 조직기구를 재건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고백공동체의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교부시대 이후로 기독교회는 종종 “순결한 창녀”로 일컬러져 왔다. 그러나 성서적 교회는 절대 “순결한 창녀”는 아니다.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요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실천적 순결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불순한 집단으로 비쳤다. 불순한 잔재가 예수교 속에 섞여있는 것이 드러났다. 광복직후 어느 지성인은 한국교회가 정의로운 양심조차 잃어버린 상태라고 지적했다.

근자에 한국 장로교 통합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교계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요지는 “우리 장로교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종이 호랑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합쳐서 발언권을 강화해야한다. 장로교인의 수가 한국교회의 5분의 3에 달하는데, 교단이 너무 많이 나뉘어 있어서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통합되어야 할 이유가 종이 호랑이라는 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를 향한 강한 목소릴 내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힘은 외형적인 요소나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교회의 기구의 강약이나 사회 현안에 대한 즉각적인 입장 천명에 달려있지 않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선지다운 목소리를 외치는 자가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외치는 자의 도덕적 권위와 양심의 교사다운 권위의 부재에 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