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동안 쉐마교육에 대해 꾸준히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동안 상당수의 목사님들이 부족한 저의 글을 보고 쉐마교육으로부터 돌이켰습니다. 그 여파로 들불처럼 번져가던 쉐마교육에 제동이 걸리고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쉐마교육에 집착하고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 애를 쓰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쉐마교육이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며 탐스럽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쉐마를 실천하면 하나님나라에 다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쉐마를 열심히 실천한 자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쉐마 유대사상은 예수를 죽인사상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구절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문밖에도 붙이고 열심히 쉐마를 실천하여 자기 의를 쌓아왔기 때문에 예수의 의는 필요 없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쉐마명령을 이루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쉐마를 이룰 수 없습니다.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성이 들어와 죄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인간은 영이 죽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영이 죽어버린 자녀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려고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먼저 메시아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려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하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메시아를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신명기 6:4-9절의 쉐마명령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시작이며 율법의 마침입니다. 즉 율법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큰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쉐마 구절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문밖에도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은 여호와를 사랑하기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기 위해 십계명이 주어지고 613가지의 율법도 주어졌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으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이라고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마 22:37-40)

그러나 열심히 율법에 순종하고 쉐마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무흠한 자만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는 함께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기에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죄인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 자만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쉐마명령을 받을 때 유대인들은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모세 외에는 시내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가면 죽기 때문에 모세 외에는 아무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접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사랑할 수 도 없고 자격도 잃었음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쉐마명령을 실천하면 사랑하는 줄로 알고 자기 의를 쌓았습니다. 그들은 율법 속에 숨겨진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열심히 쉐마를 전수하였으며 이렇게 쌓은 의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의가 필요 없었습니다. 주를 위한 열성이 그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시69:9)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피땀 흘리시기까지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목숨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큰 계명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킴으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함께 이루셨습니다.(마22:37-40) 십자가에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이루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모든 율법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쉐마명령을 이루시고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연합하여 함께 사는 자가 되어 율법을 이룬 자가 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영이 죽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이 회복되어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으니 너희는 새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즉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히7:18). 즉 신명기 6:4-9절은 큰 율법이고 옛 계명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 계명입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어 복음이 전파되는 오늘날 또 다시 옛 계명인 쉐마를 이루자고 미혹하는 목사님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원리와 복음의 원리를 모르는 분들이며, 옛 계명과 새 계명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또 다시 율법으로 이끌고 가는 소경들입니다.

왜 하필 예수를 못 박은 유대사상인 율법주의 열심주의인 쉐마교육을 해야 하나요? 예수께서는 쉐마를 열심히 실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며 저주하셨습니다. 율법주의 쉐마교육은 자기 의를 쌓는 독약입니다. 독약에 중독되면 복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독사의 새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열심히 쉐마를 실천하고 율법을 지켜 쌓은 자기 의와 예수를 믿는 믿음의 의는 함께 갈수 없습니다. 자기 의에 중독되면 믿음의 의는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탈출할 때 무교병을 먹게 한 이유는 복음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며,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것도 복음과 율법을 함께 뿌리지 말라는 것이고,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는 것도 예수의 피로 지은 세마포만 입고 율법을 지켜 만든 자기 의로 지은 옷을 입지 말라는 것이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말고 바리새인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모두 자기 의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독약입니다. 자기 의가 있는 곳에 결코 예수의 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목사님들이 도덕적 선한 행위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면 매우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세우도록 가르쳐서 예수의 의가 필요 없게 만드는 악한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즉 자기가 큰 죄인임을 깨닫는 자가 예수를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도 자기 의가 없는 가난한 심령이 복이 있다고 하셨으며, 또한 죄인을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을 깨닫고 난후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듯 죄인임을 깨닫는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도 쉐마교육에 열심을 내는 목사님들은 죄와 의가 무엇인지, 복음과 율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도덕적 율법적 선한행실을 요구하여 예수가 필요 없는 의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성경이 왜 쓰여 졌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왜 성경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면 성경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당연히 성경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며 위인전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고 죄를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가르치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얻는 길을 가리킵니다. 즉 복음을 알려주시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성경에는 복음의 주체이며 성경의 주체이고 생명의 주체이신 예수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그림자인 구약성경의 율법 속에도 복음이 담겨있고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성경은 자신을 증거 한 책이라고 하셨으며(요5:39)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요,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즉, 예수가 성경의 전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단순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이며 예수를 가리키는 책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성경 전체를 다 읽고 깨달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글을 알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깊이 만난 사람은 성경을 다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를 나타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를 알기위한 목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쉐마교육을 하는 목사님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외우게 하고 암기시키며 성경 내용을 토론까지 시키고 심지어 성경 퀴즈 대회도 합니다.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암기하고 숙지한다고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는 바리새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이론과 지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면 성경 100독을 하여도 모두 헛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영적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고도의 학문으로 만들고 예수께 나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또는 위인전으로, 도덕책으로 알고 있으며 예수를 성경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전부인 예수를 성경의 일부로 만들고 그저 구원의 한 공식으로 예수를 끼워 넣었습니다. 예수는 사순절에나 말할 뿐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성경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메시아사역을 가리키는 책입니다. 메시아는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도덕과 위인은 몰라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주신 메시아의 구원사역을 알리기 위해 성경은 기록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나 인물은 오직 예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경과 복음을 깨달은 분입니다.

이글을 읽는 목사님들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양들에게 기름진 꼴을 먹여주십시오. 기름진 꼴이 무엇인지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 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의 양들에게는 예수만이 기름진 꼴이며 생명의 떡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예수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 까지만 알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를 통해 들며 나며 꼴이 되는 것입니다.(겔 34:14)

모든 성경구절은 예수로 통하여 해석되지 않으면 헛된 꼴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예수로 풀지 못하고 도덕책으로 위인전으로 역사책으로 또는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로 풀어 헛된 꼴을 먹이니까 허기진 양들이 더 나은 꼴을 찾으려 헤매다가 이리에게 잡혀 먹히고 있습니다.(겔 34:5) 꼴을 먹이는 직분은 영광도 크겠지만 반드시 큰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약 3:1)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이고 주보에 “외부에서 성경공부를 금지합니다.“라는 안내문을 공지 했다하여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요? 목사가 기름진 꼴을 먹이지 못하여 양이 실족했다면 그 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에스겔 33:8) 성경의 비밀을 가르쳐 준다고 미혹하는 신천지에 왜 양을 빼앗깁니까? 목사님들이 성경의 비밀을 몰라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목사라면 양들을 먹이라는 직분과 천국열쇠를 하나님께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천국의 열쇠로 성경의 비밀을 풀어서 가르칠 수 있도록 복음을 깨닫게 하셨을 것입니다. 양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깨닫고 은혜의 생수를 흡족히 마신다면 무엇을 더 먹겠다고 이리 저리 헤매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예수에 대해 1시간만 말하면 더 할 말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 것입니다. 어찌 1시간짜리 예수이겠습니까?

예수의 가슴에 얼굴 묻으며 예수님과 친밀한 사이였던 사도 요한은 예수의 실체와 성경을 깨닫고 난후 요한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의 크기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 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요 21:25)

이글을 읽으시는 목사님들께 다시 한 번 정중히 권면 드립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사도행전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그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풀어 예수만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의 목사님들은 사도들보다 수준이 높아서인지 성경을 고도의 학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비켜가는 도덕과 교양과 율법에 매달리십니까?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라면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율법을 넘어서는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게 됩니다. 거듭 거듭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성경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해 1년 내내 설교해도 부족함을 느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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