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적 방언기도는 영과 육이 따로 작동한다는 이단사설

“고린도전서 14:14-15에서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 ‘방언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이창모)

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김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김동수 교수(팽택대학교 신학과)

“이것은 헬라어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꼭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 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742).

만약 본문에서 이 사람의 주장대로 가정법 구문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예를 들어 내가 만약 새라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즉 내가 새가 아니기 때문에 날아가지 못한다는 말)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14절) 그러면 이 문장은 바로 뒤 구절과 모순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헬라어 사전을 보면 헬라어 에안( ??ν)+ 가정법 현 재 구문은 ‘......할 때’를 의미할 수 있다."(김동수)

김동수 교수는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꼭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로 또 중심 의미를 무시하고 변두리 의미로 성경 본문을 왜곡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은 김 교수가 변태적인 방언을 옹호하고 주장할 때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김 교수의 말대로 헬라어 가정법이 꼭 현재 사실의 반대를 표현하는 데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영어나 다른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무시하고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키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헬라어 에안( ??ν)+ 가정법 현 재 구문은 ‘......할 때’를 의미할 수 있다“는 변두리 의미로 억지로 본문을 해석하려는 김 교수의 시도야말로 (헬라어 기초를 전혀 모르는 자라면 몰라도) 성경학자라면 하지 말아야 할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또한 그가 인용한 오순절주의 신학자인 Gordon D. Fee의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의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면”을 “방언으로 기도할 때(마다)”로 해석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하고는 의미가 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아마 이런 속임수를 쓰려고 했을 것이다), 계속 연결되는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까지 같이 보면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설령 김 교수 방식대로 억지로 끼워 맞춘다 할지라도 그것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다는 의미는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하면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마다) ~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가 되는데, 바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열매 없는 방언기도를 했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리고 김 교수가 모순된다고 한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14절)를 살펴보자. 여기서 김 교수가 모순된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영으로 기도하거니와”를 ‘성령으로 하는 정상적인 기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학자답지 못한 착각이다. 뒤에서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한 ‘영으로 하는 기도’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정신 줄 놓은 상태에서 하는 정신 나간 기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방언기도를 설명하면서 왜 하필 가정법을 썼을까? 바울이 그 동안 방언기도를 많이 했다면, 자신의 풍부한 방언기도 경험을 바탕으로 직설법으로 방언기도를 설명했다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즉,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이럴 것이다”보다는 “내가 방언으로 기도했더니 이렇더라”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직설법을 써서 말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풍부한 방언기도의 경험이 있었다면, 자신의 방언기도의 경험을 직설법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서는 직설법으로 자신이 방언을 많이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다는 말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방언으로 말한 경험이 많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비록 설득력은 직설법보다 못하지만 가정법을 써서라도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기도의 심각한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a절이 가정법이며, 주어가 일인칭(바울 자신)인 이유는 바울이 “(그) 영으로” 방언기도를 한 적이 실제로는 없었기 때문이며, 고린도전서 14장 16절이 직설법이며 주어가 이인칭(고린도 교회)인 이유는 고린도 교회는 “(그) 영으로” 방언기도를 실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14절에서 무슨 의미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을까? 방옹자들은 14절에서 바울이 ‘방언기도는 나의 영이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성적(마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지만 영이신 하나님께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이해한다.1) 또 이들은 15절에서 바울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기도도 하고 또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여긴다(물론 찬송에 대해서도 같은 다짐을 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거짓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15절에서는 방언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외국인을 상대로 방언으로 말한 적은 많았지만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은 없었다. 고전14:18을 보라. 여기서는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14절에서처럼 가정법을 쓰지 않고 직설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지,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한 것’을 감사하지는 않았다.2) 바울은 어디에서도 방언기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14절-19절(특히 19절)에 걸쳐서 방언기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3)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가 무슨 의미인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의 구성 요소 중 ‘영’4)과 ‘마음’은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즉, 자신의 영이 자신의 마음이 알지 못하게 어떤 비밀을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은 인격, 감정 등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5) 또 인간은 인간 자아의 중심이며 의식의 중심인 자기의 영을 통하여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과 뜻하는 것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6)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서도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 방언을 구사하던 자들은 자신의 방언을 마치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을 향해 영이 독립적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이교적인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헬라의 이방 신전에서 사제들이 하는 예언이나 신탁에 대해 일반적으로, “영은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지 않고, 영에 의해 드러난 신탁이나 예언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7)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이 자신의 방언을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영의 활동으로 말하는 것은, 과거 우상에게 끌려 다녔던 경험(고전12:1)을 토대로 자신의 방언이 이방 신전의 사제들처럼 신적인 것임을 드러내려는 심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또 이 말은 이들의 방언이 이방 신전의 방언을 베낀 증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심증은 고린도전서 14장 15a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바울의 말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방언을 하는 자들이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방언으로 회중 앞에서 기도와 축복뿐만 아니라 찬송도 한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소리로 신을 찬송하는 것은 당시 이방 신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8),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런 괴상한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찬송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송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노래에 실어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행위이다. 그런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찬송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이런 찬송이 더 영적이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때 특별히 더 선호하시는 언어적인 수단이 따로 있는가? 그런것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말로 찬송할지라도 다 알아들으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언어적인 한계 때문에 완벽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는 겉보기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의 자녀들이 찬양할 때 무슨 특별한 언어적인 수단이 따로 필요하다면, 그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일 것이다.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가 영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최고의 찬송인 ‘방언 찬송’9)이 사실이라면,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도대체 무슨 찬송이란 말인가? 하나님께 다이아몬드(방언)로 된 찬송을 하고 난 뒤에 또 깡통(보통 언어)으로 된 찬송도 하겠다는 말인가? 정말 방언 찬송이 최고의 찬송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는 바울이 방언 찬송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음 26절을 보라! 바울은 “찬송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므로 이 둘을 구별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바울은 왜 “찬송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찬송시”와 “방언”이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찬송시”에 방언으로 하는 “찬송시”는 없으며, “방언”에 찬송으로 하는 “방언”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은 이방 신전에서나 하는 이상한 소리의 노래를, 자신의 높은 영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로 가장해 예배 안으로 들여온 것이다.10)

이들은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며 신령하게 방언으로 찬송하지만, 이들의 방언 찬송은 고린도 교회를 침몰시키려는 사탄의 노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교회에서, 특히 신사도주의 집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방언 찬송(이들의 말로는 방언 찬송은 방언의 최고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은 수많은 영혼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교회 판 ‘로렐라이 언덕의 노래’11)일 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5b절에서 바울이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은 방언 찬송도 하고 일반적인 찬송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14장 15a절에서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즉 내가 아는 말로 하나님께 찬송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굳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영지주의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는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방옹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14절을 근거로 방언 기도하는 자의 “영”과 “마음”이 마치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방언은 영이 하나님께 기도(또는 찬송)하는 것이므로 영이 하는 말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방옹자가 아닌 자들도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방옹자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내 영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영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은근히 과시한다.12)

방옹자들은 바울도 그랬다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로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하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자랑스럽게 방언 찬송을 하기도 한다. 방옹자들은 도대체 인간의 ‘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런 웃지 못 할 촌극을 벌이는 것일까? 다음에 소개하는 김우현 PD의 말을 보면 ‘영’에 대한 방옹자들의 이해가 얼마나 유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울이 방언에 대해 설명한 말씀을 읽고 매우 놀랐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달리 영으로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의 언어가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13)

“나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같이 깊고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내 영이 점점 낮아지고 점점 충만해져 갔다. 성령님의 생수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14)

“이 공격을 그냥 방치해두면 안 될 것 같아 작업실 근처 공원으로 나가 기도했다. 그러자 영이 맑아지며 성령님의 임재를 느꼈다.”15)

“나는 그들과 기도하면서 내 영이 아파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16)

“말씀이 내 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기름부음이 되고 권능이 되었다.”17)

“무조건 순종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이미 내 영에 새겨져 있었다.”18)

“너무나 아픈 고통 같은 무엇이 내 영에 번지는 것을 느꼈다.”19)

김우현 PD의 책 속에서 이런 표현들을 찾아 나열하자면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김우현 PD는 의도적으로 ‘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차별화된 표현으로 자신의 영성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함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김우현 PD는 ‘영’이 하는 일을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20) 자신은 ‘영’이 하는 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이렇게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들이 사실은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다.21) 방언기도는 자신의 마음과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영으로 하나님의 영과 통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방옹자들의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에서 온 것이다.22) 그러면 성경은 인간의 영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내 영(루아흐, spirit)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142:3).

만약 영의 일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이 시편 기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영이 속에서 상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계22:6).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영”만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마음과 육체의 하나님은 아니시란 말인가? 여기서 “선지자들의 영”은 선지자들의 전인격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나 마음이 배제된 ‘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한이 여기서 ‘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본문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성령)이 주시는 계시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영과 마음이 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은 한글 성경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한글 성경에서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프뉴마티’(pneu,mati, 영)이다. 그런데 ‘프뉴마티’를 단순히 ‘영’으로 번역하지 않고 ‘심령’(心靈: 마음과 영)으로 번역한 것은 영과 마음이 별개의 것이기는 하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번역일 것이다. 이런 번역 경향은 한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프뉴마티, pneu,mati)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1:80).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프뉴마티, pneu,mati)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2:13; 엡4:23; 빌4:23; 골2:5; 딤후4:22; 몬1:25 등). 또 성경에서 ‘영’과 ‘마음’을 병기한 곳은,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 외에 시편 51편 10절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본문에서 시인은 그것을 구별하려고 “마음”과 “영”을 번갈아 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은 같은 의미인데 시적으로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시인의 이런 표현은 ‘내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를 반복해서 강조하되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쓰지 않으려는 히브리적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표현 기법이 가능한 것은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따로 작동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합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에게서 ‘영’과 ‘마음’은 결코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즉 ‘영’이 말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모를 수 없다는 말이다.23) 그럼에도 ‘영’과 ‘마음’이 따로 작동하여 ‘영’이 하는 말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붕(멘탈 붕괴, coma) 상태에서나 가능한 현상일 것이다.24)

따라서 바울이 말한 “영이 기도하거니와”는 “정신 줄 놓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이미를 반영하여 14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정신 줄 놓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이므로 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그 기도는 정신 줄 놓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이므로 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각주 ---

1)앞의 책, p.56;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88;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11), p.10. 이것은 방옹자들 모두의 믿음이다.

2)방옹자들은 18절의 ‘방언을 더 말하므로’를 ‘방언으로 더 기도하므로’로 슬쩍 바꾸어 버린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46;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11), p.10 등 이런 경향은 방옹자들의 책 대부분에서 발견된다.

3)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누스’(nou/j)는 이해(understanding), 정신(mind), 사고(thought), 이성(reason), 태도(attitude)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다.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New Testament(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p.544. 본문에서 이 단어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인식’의 의미로 쓰였다. 김지철, 고린도전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538. 따라서 본문에서의 ‘마음’은 ‘지성’ 또는 ‘이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4)성경에서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사32:15), 또는 인간의 구성 요소로서 눈에 보이는 육신과 함께 연합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의미하거나(눅24:39), 전인격을 의미하기도 하며(요일4:2), 또한 부패한 죄의 본성과 반대되는 거듭난 자의 속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롬8:6).

5)아가페성경사전편찬위원회, <아가페 성경사전>(서울: 아가페출판사, 1992), p.1249.

6)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66.

7)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55.

8)지금도 힌두교에서는 비정상적인 웃음들, 눈물들, 방언들, 전에 알지 못했던 노래를 부르는 현상 등이 일어나고 있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33.

9)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p.55.

10)고대 이방 신전에서 사제들이 방언으로 이상한 노래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신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들은 이상한 소리의 방언 노래가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옹자들 역시 ‘방언찬송’으로 자신이 대단한 영성가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며, 회중을 흥분시켜 자신의 추종자를 만드는데 방언 찬송만큼 효과가 있는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11)로렐라이는 독일 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근처 라인 강에 있는 메아리치는 암벽의 이름이다. 이곳에는 로렐라이라는 처녀가 신의(信義) 없는 연인에게 절망하여 바다에 몸을 던진 후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조난시키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바다 요정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12)이들의 이해대로라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껏해야 이성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김신호 목사는 “한국어로 기도할 때는 우리의 생각이 말에 매이게 되고 우리 스스로 기도 내용을 통제하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지식, 언어적 표현, 이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적, 신학적, 이성적, 감성적 통제를 통해서 기도 내용을 제한한다. 그러나 방언은 인간의 좁은 지적, 감정적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의 형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한국말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표현할 수 있다 ...(중략) 비록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모르나, 우리의 영혼은 이성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한다. 그래서 방언기도는 인간의 지적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 방법으로, 성령께서 말하고 싶은 것, 영혼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게 된다.”고 말한다.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11. 김신호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찬, 수준 이하의 기도가 되고 만다.

13)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67.

14)앞의 책, p.31.

15)앞의 책, p.43.

16)앞의 책, p.52.

17)김우현, <하나님의 심장>(서울: 규장, 2012), p.17.

18)앞의 책, p.19.

19)앞의 책, p.70.

20)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67.

21)영에 대한 이해는 방옹자들 모두 대동소이하지만 필자가 특별히 김우현 PD의 말을 많이 인용하는 이유는 그가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말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에 빠뜨리고 있다. 물론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말이다.

22)영지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몬타누스도 방언을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p.269-270.

23)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존 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편역)(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79), p.530.

24)“방언, 그 불편한 진실” 3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히 다루었지만, 방옹자들이 내세우는 방언 받는 비결들을 보면 사전에 반드시 피방언자의 멘탈을 붕괴시키는 작업이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든지, 큰 소리로 빠르게 기도하라든지 하는 것이다. 그중 노골적인 멘탈 붕괴 작업은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할렐루야’를 계속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할렐루야를 거꾸로 하면 더 나은 멘탈 붕괴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때도 큰 소리로 빠르게 말하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다. 오늘날 방언(방언기도)은 멘탈이 붕괴될 때 받을 수 있는 거짓된 은사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애썼지만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당시 자신의 멘탈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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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