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를 가르친 로이드 존스도 성령받는 안수를 부정

조나단 웨드워드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를 말한다. 에드워드 목사는 교부시대를 대표하는 성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을 완수한 존 칼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탁월한 신학적 지성을 가졌다고 평가되고, 동시에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역사하심을 더 많이 체험하였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학에서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다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임재가 또 일어난다는 사상이나, 안수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유도할 수 있다는 가르침과 그런 체험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안수하여 성령의 임재를 만들어 내려고 조금 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부흥을 중생한 신자들에게 또 다시 성령의 세례가 임했다고 믿었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 부흥을 주도했던 성령의 사람 에드워드 목사가 믿는 자들에게 또 다시 나타나는 성령의 세례 개념을 조금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중생 이후 계속 반복되는 성령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그것은 일으키겠다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안수하고, 간혹 괴이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불건전한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자신의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그의 글을 갖다 붙이는 일들이 많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남긴 글에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자주 그에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이미 함께 거하시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게 되는 경험이 자주 일어났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말씀이 더욱 더 친밀하고 달콤하게 다가왔다고 고백하였다. 성령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이 에드워드의 글 속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에드워드 목사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나는 종종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조용한 곳에서 후식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달콤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때로는 스미스와 함께 그것을 거닐면서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그 당시 또는 다른 때에도 나는 성경 전부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을 때, 자주 모든 단어가 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과 성경의 달콤하고 능력있는 말씀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종종 모든 문장마다 아주 강한 빛이 비치는 것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양식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에 오래 머물면서 말씀 안에 담긴 놀라움을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거의 모든 문장이 놀라움으로 가득 들어찬 것처럼 보였습니다.”(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성령의 역사는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요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사라들이 많다. 문제는 그들이 거짓 영과 동행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아는 분이 페이스 북에 올려주신 글을 보았다. 유기성 목사가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리신 글이었다. 

유기성 목사의 페이북 사진

나는 유기성 목사의 책이나 설교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오랜 동안 손기철 장로와 교제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매 주일 정기적으로 손기철 장로가 집회를 열도록 후원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분이 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손기철 장로가 거짓 영의 역사를 부리면서 한국 교회를 더립힌 악이 하늘에 사무쳐있는데, 유기성 목사는 과연 그 사실을 깨달았고 회개하였을까? 그러면서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손기철 장로의 집회를 통해서 역사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비록 그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불렀을지라도 그의 전파하고 가르치는 내용과 치유 등의 사역이 전개되는 방식이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 교제하고 크게 후원했으면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으면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유기성 목사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하루는 샤워를 하다가 참을 수 없는 애통함이 밀려와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급히 몸을 닦고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방언과 함께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기도하다 화장실에 가서 씻고 나와 울며 기도하다 또 씻고를 반복했습니다.”

샤워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들었으나 나중에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샤워하고 수건만 걸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예수님이 침대에 걸쳐 앉아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어떤 여성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좋게 생각하고 설교 중에 그 내용을 언급한 그 목사도 정상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왜 하필이면 유기성 목사가 옷을 다 벗고 샤워하고 있을 때 역사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성령이 역사하시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기성 목사에게 방언이 터지면서 눈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방언이었을까? 성경에서 분명하게 그 모습과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기독교의 성령의 방언이었을까? 아니면 고린도에 잠입한 거짓 영, 거짓 사도, 궤휼의 역군, 광명의 천사들(고후 11장 참조)에 의해 퍼진 뜻 없이 옹알거리는 변태적인 방언이었을까? 오늘 날 대부분의 방언은 고린도에서 처음 출몰하여 바울이 퇴치했고, 이후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났으나 대부분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의 현상이었으며, 190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이단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전파된 귀신의 변태적인 거짓 방언현상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외치고 있으나 문제는 말씀과는 거리가 가까운듯 하나 사실은 매우 멀고, 성령이 아닌 다른 영과 얽히어 자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조나단 웨드워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성령의 역사가 왕성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더욱 깊어져갔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났을 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좋아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성경 전부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을 때, 자주 모든 단어가 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모든 문장마다 아주 강한 빛이 비치는 것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양식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에 오래 머물면서 말씀 안에 담긴 놀라움을 보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심한 병이 찾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사랑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725년 9월에는 뉴헤이븐에서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원소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 노스빌리지에서 병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약 3개월 동안 아파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중에 있을 때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달콤한 능력으로 나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거기에서 내 생각을 하나님을 기쁘게 묵상하는데 많이 쏠려있었고 또한 영혼의 갈망이 컸습니다. 나를 간호해주던 사람들이 아침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서 나는 시편의 기자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은 곧 내 영혼의 기쁜 고백이 되었습니다.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아침 햇살이 창문에 비쳤을 때, 아침마다 그 햇살로 인해 내 영혼이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그 햇살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대한 이미지로 보였습니다,”

성령의 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하심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충만이 지속되는 것임을 수많은 증거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친정한 성령의 충만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요즘 유행하는 CCM 찬양 운동을 통하여 더 빨리 성령충만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임재를 호소할 때 성령의 충만이 일어난다는 위험스러운 주장을 많이 한다.

감정이 흥분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은 당장 구별되기 어려우나 본질이 서로 다르다. 성령의 충만의 본질은 성경의 말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이 즐거우나 괴로우나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성령의 충만의 증거이다. 괴로운 상황을 맞아서 울면서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를 고뇌하면서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삶이 성령의 충만의 모습이다. 그러나 빠르고 격렬한 박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고조되는 감성은 그러한 일을 일으키지 못한다. 교회라는 집단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열정과 충동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그것이 신앙은 아니다. 요즘의 유행하는 위험스러운 교회노래 운동은 교회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헌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되려 해가된다. 세상의 노래를 닮아가면서 교회들마다 매 주일 구성지게 불러재끼고 있으나 성경대로 믿고 신앙생활하는 교회는 더욱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기도,순종,회개와 성령

기도생활과 성령의 충만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충만했던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더욱 역사하신다. 강력한 성령의 충만하심이 나타남으로 인해 그릇된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현상이 재현되었다고 오해하는 사도행전 4장의 내용은 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으므로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성령으로 역사하여 제자들이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게 만드셨다. 사도행전 4장의 제자들의 성령충만은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또한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시작되고 유지된다. 불순종은 성령의 역사를 소멸한다. 불순종을 밥 먹듯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영적인 역사는 절대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다. 사탄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관심과 열성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크게 일하다. 사람들은 그들의 겉을 보고서 성령의 충만이라고 칭찬하고 함께 속아 넘어가면서 마귀를 더 크게 이롭게 한다.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안수를 받는 것이 아니가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성령의 충만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는 말씀을 전파하고 적용시키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6:13-15). 인격적이시고 말씀을 신자들에게 설명하고 적용시키기 원하시는 성령은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사람을 볼 때 근심하게 되신다. 그래서 결국 성령의 역사가 더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라.”(엡 4:30)

비록 성령의 세례를 받아 일생 성령을 모시고 살게된 신자일지라도 불순종을 매일 연습하면 결코 성령의 충만을 얻을 수 없다. 구약의 사울 왕과 다윗 왕의 대조하며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사울은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순종하였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면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삼상 15:11)

나중에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성신이 떠나고 대신 악신이 임하여 더욱 더 그의 신앙과 인생이 비참하게 되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가 충만하여 그는 더욱 더 지혜롭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다윗 왕에게서도 잠시 사울과 비슷한 행동이 일어났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살해하는 죄악을 저지르므로 하나님의 성신이 더욱 근심하게 되었으나 다윗은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다윗은 밤새도록 눈물로 회개하면서 자신에게서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기 위해 우리는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범죄하면 지체하지 말고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면서 어느 때든지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들으시고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어떤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보기 어려운 신비현상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엉뚱한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그러한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결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건강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고 난 후 계속 언급되는 내용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신자들의 삶의 특징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라고 하셨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감사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의 모습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고 섬기는 신앙생활이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바울은 그 다음에는 성도들의 가정에서 나타나야 할 성령충만의 특징을 이야기하였다. 먼저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마치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하였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마치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또한 주님이 교회를 돌보시고 사랑하듯이 하라고 하였다(엡 5:22-3).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복음 안에서 자기 부모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였고, 그로서 자녀들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은혜를 누리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품고 반항하게 만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훈계과 교훈으로 양육하라고 하였다(엡 6:1-4).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의 신앙은 건강한 사회생활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사회에서 고용인(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고용주(상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여 진심으로 공경하고 성실하게 대하며,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성실하게 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직장에서 상전(고용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종(고용인)부당하게 대하지 말고, 언어폭력이나 협박을 일삼지 않아야 하고, 다 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하면서 행하라고 하셨다(엡 6:5-9).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한 성도의 영적전쟁에 대해서 말하였다(엡 6:10-17). 이 점이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다. 영적전투에 관해 일가견을 보이고,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도가 뜨거운 사람을 성령으로 이미 충만해진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다. 언제든지 영적전투에 뛰어들려는 용기와 준비된 자세를 성령충만의 분명한 특징이라고 여기고 존경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성령충만의 증거로서 가장 마지막에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끼리 서로 섬기고 위하는 자세가 성령의 충만의 제일가는 특징이고, 그 다음에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전쟁이 성령충만한 신자들의 장기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사기꾼들은 반대로 영적전쟁이 성령충만의 가장 중요한 주특기라도 되는 것처럼, 조용히 자기의 삶과 신앙을 돌보지 않고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악한 영을 잡는 중보기도를 한다고 설치면서 설레발을 떤다. 이런 것들도 인해 이상한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가정은 엉망이면서, 매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다니면서 귀신을 퇴치하는 영적전쟁 기도놀이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량한 성도가 아니다.

 

성령을 조종하는 안수기도는 불가능

결론적으로 다시 이야기해 보자. 성령의 임재를 유도하고, 성령의 역사를 부리는 안수기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 영과 친화된 사람들이다. 거짓 영은 자기 사람의 안수행각과 짝짜꿍하면서 속이고 사기치는 만행을 날마다 저지른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며, 성령의 사람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유도하거나 조절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와 은사를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다. 안수를 통해 만들어 내려는 것은 악한 마술사 시몬이 사도에게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망령된 짓이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마술사 시몬은 자신이 안수할 때 성령이 나타나게 되기를 위해 사도들에게 돈을 내려고 하였다. 이것과 오늘 날 안수하여 성령을 유도해내는 사람들의 불법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을 시몬이 돈으로 사서 소유하려고 했던 것과 오늘 날 이상한 사람들이 성령을 소유하기라도 하는 양 안수하고 다니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뭐가 다를까? 결국 그들은 시몬처럼 망하고 저주받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같은 분도 성령의 세례가 중생 이후 부흥과 능력을 일으키는 차원에서 또 반복된다고 잘못 가르치기는 했어도 안수나 다른 방식으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예배되거나 유도되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로이드 존스는 그런 사상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로이드 존스의 그릇된 성령세례 이론을 예로 들면서 안수까지 해 대려는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성령의 역사를 유도하고 준비시키는 안수행각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숙고해야 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이드 존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안수함으로써 이것이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안수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이제 사도가 그 선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신약시대에 그것이 일부 사도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와 독특성에 대한 한 부분이었다 ... 만일 그런 일이 안수의 결과로 일어난 일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내가 인용했던 몇몇 퓨리탄들이나 웨슬레의 경우에 있어서 또는 그 밖의 다른 경우에 있어서 안수를 암시하는 경우는 한 경우도 없었다. 여기서 다시 심리적인 요소가 가미될 경향이 있다.”(로이드 존스)

“이러한 체험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또한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성령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그것은 성령의 행동이다 ... 그것은 미리 예고될 수도 없고 어떤 방식으로 조정될 수도 없고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다. 아무도 이러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로이드 존스)

안수자의 영적인 성향이 그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주장은 이미 성령을 모조하는 거짓 성령과 짝하면서 영적인 사기를 치는 사이비 성령운동가들의 말이다. 그들은 이미 자기에게서 그런 거짓 영의 역사가 나타나므로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안수하여 성령을 부리려는 자들은 가증하고 사악한 이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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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