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남 교수가 총신신대원 신학생들이 읽는 <총신원보> 279호(2022년 10월 18일, 화)에 올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왜 성경적이며, 필연적인가?"를 읽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글입니다. 김효남 교수님의 글로 더 많은 연구를 하게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정이철 목사).

“결국 무죄한 아담은 그 자체로 영생을 확보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태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었으며 (행위언약 혹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는 죽음과 그것이 의미하는 영원한 심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도 역시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지위와 속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김효남 교수가 총신원보에 올린 글).

김효남 교수는 “결국 무죄한 아담은 그 자체로 영생을 확보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을 누리는 상태의 자기 자녀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김효남 교수가 아담이 영생을 누리는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아담이 결국 타락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의 상태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었으며 (행위언약 혹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는 죽음과 그것이 의미하는 영원한 심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김효남 교수).

김 교수는 아담이 AI처럼 변함없이 일관되게 존재하는 상태를 영생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AI같은 자기 자녀를 가지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배반할 수 있으면서도 즐거이 자기를 섬기는 독립되고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녀를 통해 찬양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아담이 존귀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와 같이 지으신 후 그의 자발적인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교만해졌고, 또 하나님과 아담을 시기하는 사단이 그의 마음에 미혹을 주었으므로 그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처음의 모든 것을 잃었던 것입니다. 칼빈이나 어거스틴 등 정통교회의 신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2.2.1).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기독교강요, 2.1.4).

계속 김효남 교수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이 이미 영생을 확보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영생을 확보했다면 영생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던지 죄를 짓는 기다하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속성상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듯이 타락 전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 sive non peccare)였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peccare)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입어 영화된 택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여전히 행위언약의 의무 아래 있던 아담에 있던 아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김효남 교수).

김 교수는 동일한 논리로 아담이 영생을 누리는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항상 단순합니다. 결국 죄짓고 죽음의 심판에 떨어졌으므로 영생을 누리는 사람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이 이미 영생을 확보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영생을 확보했다면 영생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던지 죄를 짓는 기다하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김효남 교수).

정통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이 아담을 영생을 누리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자녀)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교만해졌고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아담이 죄짓고 죽음의 심판에 떨어진 것을 보니 아담이 영생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녀도 아닌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대체 이런 논리는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런 아담을 다시 살려서 자기 백성되게 하시려고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작정하셨을까요?

이처럼 집요하게 아담이 영생을 누리는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하나님이 아담에게 스스로 영생을 얻도록 마음에 율법을 심어주셨으나 아담이 그것을 실천하지 못해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이론을 주장하려는 것이고,

2)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그 율법들을 지켜서 영생의 자격(의)를 얻으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우리가 영생하게되었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로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김 교수에게는 오직 성경으로 신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설명하려는 기본적인 자세가 없고, 죽은 신학을 숭상하는 자세가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백성으로, 영생과 모든 은혜를 누리게 하신 상태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부정되면 결코 올바른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전개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대속적 죽으심을 통해 죄로 죽고 없어진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하여 내시는 종교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성경은 이와 같이 죄로 인해 없어진 자기 백성을 찾아서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김효남 교수의 주장에 맞게 성경을 다시 쓰자면, “인자가 온 것은 되다만 백성을 찾아 되게하려 함이니라” (효남복음 19:10)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영생하는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면 ...) 그렇다면 아담에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듯이 타락 전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 sive non peccare)였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peccare)는 아니었습니다” (김효남 교수).

김 교수는 집요하게 아담에게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영생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김 교수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가장 귀하고 참된 찬송을 받으시고자 자기를 배반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동시에 영원히 자기를 즐거이 섬기면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도 완전하게 가진 사람으로 찬송하셨다는 진리를 왜 모를까요? 죄지을 가능성도 있고 죄짓지 않고 영원히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는 사람으로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대체 언제까지 아담에게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고, 결국 죄를 지어서 죽음의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영생이 아담에게 없는 상태였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려는 것일까요?

 

 

아담에 대한 칼빈의 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4.14.18).

칼빈은 생명나무는 아담에게 이미 주어진 영생을 보증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생명나무를 먹음으로 영생이 생기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에게 영생이 있는 상태를 생명나무로 확인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기독교강요, 4.14.12).

칼빈은 범죄 후에 아담이 생명나무에 다가서지 못하게 막으신 이유를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으셨으므로 생명나무에 대해 아담이 미신적으로 집착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칼빈은 범죄 이전의 아담의 상태를 ‘불멸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칼빈의 신앙과 신학을 존경하는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성경해석이 올바르기 때문입니다. 칼빈처럼 처음 하나님 백성 아담에게 영생이 있었으나 범죄로 인해 아담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 죄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성육신과 대속적 죽으심을 작정하신 것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김효남 교수의 기독교 이해는 바르지 못합니다. 김 교수의 기독교 신앙 이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창조하지 않았고 그에게 영생을 주시지도 않았다.

2) 아담은 자기 마음에 기록하여 주신 십계명을 실천하지 못해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영생과 자기 백성의 자격을 주시기 위해 성육신을 작정하셨다.

4)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 지키시어 영생의 자격을 얻으셨다.

5)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이 범한 선악과 죄를 해결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6)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영생의 자격)와 십자가의 공로(죄용서)를 전가받아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

김 교수의 이와 같은 신앙은 성경적 종교가 아닙니다. 김 교수의 신앙 이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과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율법준수의 공덕이 함께 작용되어 우리가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총신원보에 올린 글의 결론에서 김 교수가 한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무죄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동적 순종으로는 우리는 타락 전의 아담에게로 돌아갈 뿐, 영생을 위해서 필요한 의, 곧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얻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을 사시면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김효남 교수).

김 교수는 결국 이상한 귀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으로는 우리가 무죄한 자가 될 뿐이지 천국에 들어가는 의인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의 아담,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천국 영생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에게는 예수님의 율법준수의 의와 십자가의 의가 동시에 주어져야 구원이 가능해진다고 것입니다.

김 교수의 말은 성경을 비트는 사단의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무죄한 자로 만드심이 곧 의인으로 만드심이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죄한 자로 만드시고, 더 나아가 율법준수 공덕으로 의로운 자로 만드심으로 구원이 일어난다고 단 한번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게 하셨느니라” (히 10:14).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찾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4-6).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하나님이 그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5,26).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19).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성경 어디에 아담과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준수에 힘쓰셨다는 내용이 나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죗값을 갚으심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 순종만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건 말건, 처음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심으로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으로 우리를 의인되게 하고, 십자가로 우리를 무죄하게 했다는 복음은 성경의 복음이 아닙니다. 명백히 다른 복음입니다. 김효남 교수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가 함께 묻어서 전가된다고 하는데, 그런 내용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요? 성경을 바르게 설명하는 모든 신학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자가 자기를 우리를 위해 주심으로 이루어진 죄용서가 곧 우리의 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의를 얻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요구 곧 범죄하므로 그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따라 피 흘림으로 죗값을 갚아 용서를 가져오셨다. 이 죗값을 갚아 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이다. 이 의 곧 죄 용서를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다. 율법의 성취는 죗값을 갚으므로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이상 없도록 한 것이다. 그 면에서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서철원, 그리스도론, 147)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기독교강요, 3.11.11).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기독교강요, 3.11.21).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강요, 3.11.22).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독교강요, 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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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