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김효남 교수(총신신대원)가 <총신원보> 279호(2022년 10월 18일, 화)에 실은 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왜 성경적이며, 필연적인가?”의 비성경적이 내용을 설명하는 두 번째 글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이해는 성경과 성경을 통해 세운 개혁신학의 체계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순히 구원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서 뿌리를 둔 신학의 전반적인 체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것 관한 명령과 약속을 통하여 아담과 최초로 행위언약이 맺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성적 피조물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김효남 교수)

김효남 교수는 웨신서 19장이 가르치는 행위언약이 창조로 인해 발생된 하나님과 피조물 아담 사이의 필연적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격에 기반하여 아담에게 특별하고 구체적인 말씀을 주심으로 맺은 언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인해 자동적으로 성립된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이 서로의 인격에 기초하는 대화와 소통으로 맺어진 약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하나님 사이의 무지개 언약(창 9:13), 아담과 하나님의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창 15:17),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시내산 언약(출 24:8) 등 모든 성경의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소통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김효남 교수의 다음의 말을 보면,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행위언약의 핵심 사항인 율법이 하나님의 창조 때에 이미 자동적으로 아담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에 행위언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개혁파 신학의 전통 안에 있던 이들의 대부분은 이 교리를 인정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개혁파 안에서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간간히 제기되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령 행위언약을 부정하더라도 작금과 같이 모세가 율법을 주기 전에 율법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개혁파 신학자는 없었습니다" (김효남 교수)

김효남 교수는 모세를 통해 율법이 오기 전, 아담에게 이미 율법이 있었다는 것을 개혁파 신학이 의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체계적인 형태로 명문화되어 오기 전에 이미 아담에게 창조를 통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김효남 교수의 이러한 율법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모든 율법의 내용들은 아담과 함께 타락하여 죄에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죄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죄악된 행위들을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고 규정하고, 궁극적으로 그 열매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사망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5)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3).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

이처럼 성경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비정상(죄악)임을 고지하기 위해 율법이 왔다고 합니다. 만일 김효남 교수의 주장처럼, 이런 율법이 문자로 기록되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미 아담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아담을 비정상으로 만드셨고, 아담의 비정상적인 면들을 규정하고 정죄하기 위해 율법을 아담과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김효남 교수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성적 피조물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은 바로 그 뜻입니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은 처음의 아담이 율법준수를 통해 자기 행위의 의를 완성하여 스스로 영생을 획득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언약했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김효남 교수의 “모세가 율법을 주기 전에 율법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개혁파 신학자는 없었습니다”라는 말도 바로 그런 이상한 사상 위에서 진술되는 내용입니다.

오늘 다루어 볼 내용은 “김효남 교수가 모세을 통해 명문화된 율법이 오긴 전, 창조와 함께 이미 그 율법이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이상한 주장의 학문적 배경은 무엇일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미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율법이 나타났다는 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심각하게 변형시켰습니다.

첫째, 원죄의 내용을 변형시켰습니다. 아담의 원죄를 하나님 섬김을 목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배반(반역)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대신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담의 원죄를 변개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와 김재성 교수 등의 능동적 순종파들이 아담의 원죄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금지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순복하여 절제했어야 하는데, 아담이 창조주의 권위와 질서를 가벼이 여기고 자신을 절제하지 않았던 것을 아담의 원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 희생이었던가를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담의 불순종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 그처럼 좋은 낙원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아담에게 행동의 절제를 요구하신 것이다” (김재성, 그리스도의 순종, 83).

둘째, 칭의신학을 변형시켰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칭의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준수(행위)를 해야 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쳤습니다. 아담이 자신에게 구원을 주는 율법과 동시에 창조되었다는 이론에서 다음과 같은 율법주의 구원론이 탄생했습니다. 

1)구약의 유대교는 100% 율법준수를 통해 칭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2)신약의 갈라디아 이단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의 행함을 더해야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3)펠라기우스도 그리스도를 믿음과 각자의 행위(율법준수)로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4)세미펠라기우스 노선을 택한 로마교회도 그리스도를 믿음에 완전한 행위(율법준수)로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5)종교개혁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신양을 회복시켰으나, 예수 믿음이 왜 칭의를 선물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6)종교개혁을 허무는 알미니안주의가 나타나 믿음과 행위에 근거하여 칭의를 얻는 것이 원칙이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율법준수하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칭의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7)청교도들은 노골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죄용서를(수동적 순종), 율법준수로 칭의를(능동적 순종) 만들어 전가했다고 가르쳤습니다.

8)존 웨슬리 역시 그리스도를 믿고 완전한 행함(율법준수)으로 의로움을 완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9)새관점 학파와 김세윤 역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의 행함으로 칭의가 완성된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언급한 행위를 강조하는 거짓 칭의 신학의 바탕은 구원을 주는 율법이 창조 때 이미 아담에게 주어졌고,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되지 못한 아담은 그 율법을 준수하는 공덕으로 스스로 영생과 하나님 자녀됨을 획득했어야 했다는 비성경적 율법 사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죄를 범하여 죽었는데,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자기 몸으로 아담의 죗값을 갚으시고 자기 속의 하나님의 의를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구원과 율법은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은 두 가지 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아담의 원죄 안에서 비정상이 되어 버린 모든 인간의 비정상적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죗값을 갚아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전가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단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구약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구체적인 요구,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구약에도 없고, 신약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어야 하고,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사하여야 했다는 청교도들의 사상은 처음부터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17세기 유럽의 신학자들을 지배하였던 이상한 율법 사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17세기의 신학자들을 지배하였던 자연법 사상입니다. 저는 박재은 교수(총신대)의 자연법에 대한 강의 영상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박재은 교수의 강의 녹취 가운데 붉은 색으로 처리한 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자연법이라는 무엇이냐?) .... 창조 만물과 인간 본성 내에 본성적으로 내재해있는 도덕법칙 또는 도덕적 윤리적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법이다! 본성의 법이다! 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 이 본성적인 윤리적 법칙을 뭐라고 이야기하냐 하면, ‘이런 일을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

제가 이전에 양심에 관련된 영상을 찍었습니다. 그때도 이러한 내용을 다루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 본문을 보면 오늘 우리의 주제인 자연법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을 바로 양심이라는 표현이예요. 그래서 개념정리를 해보면, 자연법 = 양심 = 본성의 법 = 자연적인 규칙 = 본성에 새겨진 규칙은 다 같은 말이예요.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5). 또 성경적인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는 ... 결국 자연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가진 법칙이다! 그 대상은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우리의 관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것을 좀 더 대응관념으로 볼려고 해요. 대응관념이라는 것은 자연법이 있으면, 그 자연법에 대응하는 법칙은 뭐냐? 혹은 그것의 반대적인 원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자연법이 있다면 또 무엇이 있어야 하냐 하면, ‘신적인 법’이 있어야 해요, 신적인 법과 자연적인 법은 서로 결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신적인 법은 어디에 새겨져 있냐 하면,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법은 아까 우리가 본 것처럼, 성경이라는 특별계시에 새겨져 있다기 보다는 좀더 일반계시 차원, 즉 우리 마음의 본성이라든지 세상의 창조 만물의 질서라든지 그곳에 새겨져 있는 거예요.

신적인 법과 자연적인 법은 서로 대응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한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법칙이라는 것은 신적인 법을 연구하는 신학자라든지 신자들이 연구해도 결국 근원적인 법칙을 찾지만, 믿지 않는 자 성경을 토대로 연구하지 않는 일반 철학자들과 일반 사상가들도 계속 일반계시 차원에서 자연법 차원에서 연구하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법칙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적인 법칙과 자연적인 법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칙을 드러내는 두 가지의 통로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관점은 이 자연법의 범위는 어디인가? 자연법의 범위는 보편입니다. 보편이라는 것은 지정의라는 인간의 영혼을 가진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뜻이예요. 어디에나 다 통용되는 것이지요. 시대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종을 막론하고, 나이를 막론하고, 모든 영혼을 가진 존재는 전부 이 보편적인 법인 자연법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 ‘우리의 본성의 법’이라고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재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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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박재은 교수의 자연법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구원의 원리와 법칙을 두 가지 경로로 인류에게 계시하였습니다. 하나는, 만물과 인간의 본성에 처음부터 내재하는 본성의 법 (또는 양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이 내재된 상태로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법 사상이고, 17세기 유럽의 신학자들은 그것의 영향 하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의 성경적 근거로서 로마서 2:15절, '마음에 새겨진 율법' 개념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5).

또 하나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의 구원의 원리와 법칙을 기록으로 계시하셨다고 설명됩니다. 성경을 통해 구원을 주는 모세의 율법이 정확하게 계시되었다고 합니다.

김효남 교수의 성경의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 아담의 창조 때 이미 구원을 주는 율법이 아담에게 나타났고, 그것에 근거하여 아담과 하나님이 행위언약을 맺었다는 이론은 성경 자체에서 전혀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이론은 17세기 유럽의 신학자들을 지배하였던 자연법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의 사색의 산물이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이 아니고 그 시대 정신의 배우고 따랐던 사람들의 신학이론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르트신조가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는 처음 아담이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성에서는 자신의 창조자와 여러 가지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참된, 그리고 가장 복된 일에 동참하게 하는 지식이, 의지와 마음에는 의가, 모든 감정에는 순결이 주어져 있었다. 인간은 온전하게 거룩한 자였다. 그러나 악마의 꼬드김에 의해, 또한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러한 우수한 은사를 상실해 버렸다” (도르트신조 제 3,4교리조항 속의 1항).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자기를 섬기도록 창조한 아담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누리는 '산 영'(고후 15:45)으로 창조되었음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김효남 교수에게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2:15절의 '그 마음에 새진 율법'이 창조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주신 율법이라면, 그것이 나중에 모세를 통해 글로 기록되어 온 십계명과 다른 율법들이라면,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그것이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 아닌가요? 구원의 특별계시가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공히 주어졌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인가요?  

둘째, 십계명과 모든 율법들은 인간 존재가 비정상이고 모든 행위가 죄악임을 고지하고 죄를 억제시키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김효남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그런 율법들이 창조 시에 이미 '그 마음에 새긴 율법'으로서 아담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아직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죄와 비정상적인 일들로 충만했던 사람이었나요?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셨나요?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를 지적하고 억제하는 율법들을 아담의 마음 속에 담아 주셨을까요?

셋째, 성경은 죽음이 범죄로 인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죄로 인해 사망이 온 것이라면, 아담은 죄를 범하기 전에는 사망과 무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음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하는 율법을 창조와 함께 미리 주셨을까요? 타락하여 사망에 떨어질 것이므로 미리 사망에서 구원받는 길을 예습시키신 것일까요?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효남 교수는 기독교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지 못해 여전히 사망과 저주 상태에 있습니다. 단지 지식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펼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만난 선생들의 학설을 주장하기만 하지, 결코 죄인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또한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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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