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동수 교수의 거짓 방언'(4회)

(기사의 제목에서 '김동수 교수', '김동수 목사' 등의 존칭이 누락된 것은 김동수 교수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제목이 짧아야만 화면에 다 나타나는 공간의 문제로 인한 상황입니다. 바른믿음은 바른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을 당연시하나, 그 방법은 언제나 정당하고 그리스도인 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어긋나는 글을 발견하면 언제든지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글로사’(방언)의 복수형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참 방언을, 단수형은 거짓 방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이창모 목사).

한국의 대표적인 거짓 방언 중독자이며 옹호자인 김동수 교수는 필자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김동수 교수(평택대학교)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해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해서 말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김동수)는 지금까지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방언들”은 진짜 방언을, “방언”은 가짜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바울이 독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게, 마치 암호화 하듯이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김동수 교수)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는 김동수 교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에도 그 예가 없기 때문에 ‘그 예가 없는 어떤 설명은 참이 아니다’라고 하는 논리는 김동수 교수가 진리에 대한 대표적인 물타기 수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들을 죽임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동서고금 어떤 종교나 신화 그리고 어떤 문서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가? 김동수 교수의 방식으로 따진다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은 궤변이고 거짓이 되고 만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의 예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예가 없으며,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에도 그 예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짓 방언을 설명하고, 한 가지를 더해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을 단수와 복수로 구별하는 특별한 방식, 즉 동서고금의 다른 어떤 문서에도 발견되지 않는 이 방식도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또 바울이 거짓 방언을 단수로 표기하고 참 방언을 복수로 표기하여 서로 구별한 것은 김동수 교수의 주장처럼 독자들이 인식할 수 없게 암호화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상대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암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의 특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독자들에게는 이 방식이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방식이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외국어들을 말하는 다양한 성경적 방언들을 복수로 표기하여 참 방언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소리가 나올지라도 하나같이 의미 없는 잡소리에 불과한 소위 ‘영의 언어’, ‘영음 방언’이라는 귀신의 변태적 방언들은 그냥 단수로 간단하게 표기하여 거짓 방언임을 명시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 방식은 그 당시 고린도의 독자들에게는 지극히 이해되기 쉬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신학 박사라는 김동수 교수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그런 암호가 성경에 있다는 말이냐?”라고 반응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이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을 언급할 때 단수형과 복수형을 혼용한 이유를 본문들을 통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을 쓰면서 ‘방언’을 표기할 때, 어떤 때는 단수형 ‘글롯사’(glw/ssa)를, 또 어떤 때는 복수형 ‘글롯사이’(glw/ssai)를 사용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은 20회 언급되는데, 그 중 복수형으로 13회, 단수형으로 7회 나타났다. 그리고 단수형은 고전14장 2, 4, 13, 14, 19, 26, 27절에서 총 일곱 번 나타났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을 표기할 때, 단수와 복수를 혼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이 어떤 곳에서는 단수형으로, 어떤 곳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라는 단어의 단수, 복수 표현의 의미를 몇 학자들의 의견을 여기에 소개하겠다.

“고전14:2의 ‘방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전14장의 다른 곳에서는 복수로 표현된 데 비해 단수로 표현된 의미는 무엇인가? 몇몇 학자들은 단수로 쓰인 것은 외국어를 가리키는 반면에, 복수로 쓰인 것은 하나 이상의 언어들 가리킨다고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단수는 단일한 육체의 일지체인 혀를 가리키는 것이고 복수는 “혀의 다양한 운동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Thayer, 1889, p.118). 또 다른 사람은 단수는 황홀경의 언어를 가리키고 복수는 일반적인 방언의 은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odet, 1886, p.265).”1)

“Glossa는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항상 여러 개의 언어를 가리키는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단수와 복수형 둘 다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그가 2, 4, 13, 14, 19절에서 단수형 ‘방언’을 사용할 때는 몇몇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진짜 방언의 은사 대신에 사용하고 있었던 이교적인 가짜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의미 없이 흥분 상태에 빠져하는 웅얼거림은 근본적으로 전부 마찬가지의 것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복수형으로 지칭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언어의 은사를 언급할 때에는 복수형 ‘방언’을 사용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고린도전서 14장 27절인데 거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unknown) 방언을 하는 한 사람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 단수형 ‘방언’만이 맞는 표현이다. 흠정역(KJV)은 glossa가 단수형일 때에만 unknown(알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만일 한 ‘방언’의 단수형과 복수형의 구별이 진정한 성령의 은사와 이단적인 가짜 방언의 차이가 아니라 실제 언어와 단순한 응얼거림의 차이를 의미한다면 결국 흠정역 번역자들이 그 단어들을 사용한 방법에는 오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27절의 “알지 못하는 방언”은 진정한 영적 은사의 나타남이 아니라 이단적인 타락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존 맥아더).2)

바울이 방언을 표기할 때, 단수형과 복수형을 혼용해서 쓴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고린도 교회에서 사용한 방언이 두 종류였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어떤 방언은 단수형으로, 또 어떤 방언은 복수형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의 사람들은 앞에서 소개한 Thayer, Godet, 존 맥아더 및 일부 거짓 방언자들이다. 그러나 Thayer, Godet, 존 맥아더 등은 두 종류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 거짓 방언으로 보지만, 일부 거짓 방언자들은 교회용 방언과 개인용 방언으로 본다.)

둘째, 바울이 별 의도 없이 때로는 복수형으로, 때로는 단수형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아마 옥성호 형제는 두 번째 관점인 것 같다. 그는 이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았지만, 존 맥아더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옥성호 성도

“이 해석(단수, 복수의 혼용에 대한 존 맥아더의 해석)대로 할 때 예외의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26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What is the outcome then, brethren? When you assemble, each one has a psalm, has a teaching, has a revelation, has a tongue, has an interpretation. Let all things be done for edification.)

분명 26절은 바른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방언에 a 라는 관사가 있다. 분명히 복수가 나타날 자리에 말이다. 바울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결국 바울이 두 가지의 혼재한 의미로 방언을 사용하면서 그 중요한 차이를 단지 단수와 복수로 구별했다고 보기 힘들다. 만약 바울이 애초에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분명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방언을 두 가지로 구분하면서 14장을 읽어 갈 때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서 14장에 등장하는 방언은 한 가지의 일관되고 통일된 의미만 가지고 있다. 그 방언은 사도행전에 등장한 외국어로서의 방언이거나 아니면 외국어가 아닌 새로운 어떤 형태의 방언이어야만 한다.“(옥성호)3)

그러나 존 맥아더에 대한 옥성호 형제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아마도 이런 실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한 외국어 방언밖에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려는 데서 나온 것 같다. 먼저 그는 “바울이 두 가지의 혼재한 의미로 방언을 사용하면서 그 중요한 차이를 단지 단수와 복수로 구별했다고 보기 힘들다. 만약 바울이 애초에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분명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두 종류의 방언을 단지 단수형과 복수형만으로 구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 바울이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형용사를 사용하는 방법보다 단수와 복수를 사용해서 방언의 종류를 구별하는 방법이 훨씬 더 명료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외국어이기 때문에 외국어는 여러 종류가 있으므로 복수형을 써서 표현하는 것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 방언은 어떤 소리를 낸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소음에 불과하므로 단수형을 써서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현명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수와 복수 형태의 표기가 아니더라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 거짓 방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별하고 있다. 방언을 단수와 복수로 표기한 것은 그 중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옥성호 형제는 “만약 바울이 애초에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분명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어떻게 옥성호 형제는 바울의 마음을 그리 잘 알아서 “만약 바울이 애초에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분명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김동수 교수는 옥성호 형제의 이런 스타일의 성경 접근을 꼬집어 아마추어적인 성경 해석이라고 비판했다.4)

그러나 옥성호 형제의 더 큰 실수는 존 맥아더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분명 26절은 바른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방언에 a 라는 관사가 있다. 분명히 복수가 나타날 자리에 말이다. 바울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라고 단정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는 말은 바른 판단이다.

그러나 “분명 26절은 바른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라는 말은 바른 판단이 아니다. 만약 옥성호 형제의 주장대로 ‘방언은 한 가지 밖에 없다면, 그러므로 단수와 복수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가 사실이라면, 결국 바울은 단수형과 복수형을 아무렇게나 섞어 쓰므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며, 또한 용의주도한 바울의 주도면밀함을 고려한다면, 그가 방언이라고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별 생각 없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아무렇게나 섞어서 표기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방언들이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우연이거나 바울의 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두 종류의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말이다. KJV 번역자는 헬라어 원문에서 단수형으로 표기된 방언을 ‘an unknown tongue’로(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보통 ‘a tongue’로 번역했다.), 복수로 표기된 방언을 ‘tongues’로 번역함으로 두 종류의 방언을 구별했다. 일부 방옹자들은 KJV의 번역 ‘an unknown tongue’(알지 못하는 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개인용 영음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an unknown tongue’는 KJV 번역자의 의역일 뿐 헬라어 원문에는 단수형 ‘글롯사’(glw/ssa, a tongue)로만 표기되어 있다.

필자는 바울이 복수형으로는 정상적인 방언을, 단수형으로는 거짓 방언을 표시했다는 존 맥아더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예외라고 말한 27절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에 혹 필사자의 실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앞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예외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27절의 단수형 ‘글롯사’(glw/ssa)는 바울의 의도된 표기가 분명하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을 표기할 때 단수형과 복수형을 혼용한 이유를 살펴보자.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구조다. 고린도전서 12-13장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거짓 방언을 지적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는 방언이 결코 단수형으로 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표기할 때는 꼭 복수형을 쓰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아무렇게나 섞어서 썼다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여섯 번 다 복수형으로 표기된 방언 중에 적어도 한두 번은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열다섯 번 표기된 방언들 중에 일곱 번은 단수형으로, 여덟 번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14장의 복수형 방언은 5절에서 2회, 6절, 18절, 21절, 22절, 23절, 39절에서 나타났고, 단수형 방언은 2절, 4절, 13절, 14절, 19절, 26절, 27절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방언의 단수형을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볼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는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인 방언만을 다루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 거짓 방언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는 방언을 일관되게 복수형으로 표기하다가, 14장을 시작하면서 거짓 방언을 설명하는 2절과 4절에서 처음으로 방언을 단수형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의 책 <방언, 그 불편한 진실>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을 다루면서 21절의 앗수르 방언을 제외하고(앗수르의 방언은 일반적인 인간의 언어이므로) 나머지 모든 방언에 대해 성령의 은사로서의 정상적인 방언인지 아니면 거짓 방언인지를 지적했다. 이때 지적한 방언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예외 없이 정성적안 방언은 복수형으로, 거짓 방언은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6절과 27절의 방언이 정상적인 방언처럼 보이는데도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27절을 예외로 보았고, 옥성호 형제는 26절에서 방언이 단수형으로 표기된 것을 문제 삼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방언의 종류를 구분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26절에서 단수형으로 표기된 방언 때문에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방언의 종류를 구분하려던 사람들은 옥성호 형제처럼 26절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아도 26절에 나열된 것들은 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정상적인 것들로 보이는데, 이들 가운데 유독 방언만 거짓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다. 이는 아마도 바울이 26-33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놓쳤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통역이 결정타다!’에서 다룰 것이지만 본 장의 논의를 위해 조금 언급하면, 바울은 26-33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거짓 은사들, 즉 거짓 방언과 거짓 예언을 퇴출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26절과 27절의 방언을 보아야 한다.

바울이 26절에서 “너희가 모일 때에”라고 전제하는 것은 다음에 나열되는 찬송시, 말씀, 계시 등이 일반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들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26절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과 28절에서처럼 일반적인 은사 목록에 있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방언을 보라. 두 차례 다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방언도 역시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언급된 방언들은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 목록에서 소개하는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6절의 방언은 바울이 “너희가 모일 때에”라고 전제했듯이 고린도 교회가 예배에서 마구잡이로 하고 있는 거짓 방언을 말한다. 또 존 맥아더가 예외로 본 27절의 방언도 2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에서 시행되는 거짓 방언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26절과 27절의 거짓 방언을 단수형으로 표기한 것이다.

바울은 또 26-33절에서 통역의 은사를 사용해 거짓 방언의 퇴출을 명령하고 난 뒤, 39절에서 고린도 교회가 거짓 방언은 퇴출시켜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방언까지 금하지는 말도록 명령한다. 그러므로 39절의 방언은 당연히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 각주 --
1)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김지찬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214.
2)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이용중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62.
3)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00.
4)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113-116.
5)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이용중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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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