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종 박사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관한 논문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두 번째 논평입니다. 최갑종 박사의 논문을 위 첨부파을 크릭함으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1. ‘하나의 의’ 신학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분들의 최고의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확보한 의가 두 종류라는 것, 즉 율법 준수를 통해 얻으신 의와 십자가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확보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의를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싶어 십자가의 의만 말할지라도, 평생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내신 모세의 율법 조항들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공덕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공로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 주어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총신 신대원장 정승원 교수가 했던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박형룡은 벌코프를 인용하면서 ‘최종으로 그리스도가 만일 사람에게 부과된 형벌을 받으셨을 뿐이면 그의 사역의 열매를 나누어 가진 자들은 아담이 타락되기 전에 있던 바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즉 아담의 타락을 치유한 수동적 순종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과 모세 율법과 도덕적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총신 신대원장 정승원 교수).

필자는 십자가로 말미암는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왜곡하는 능동적 순종 교리의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제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다른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저주받을 이단이다!”

능동적 순종 교리를 믿는 정승원(총신), 서창원(총신), 김효남(총신), 이승구(합신), 신호섭(고신), 김병훈(합신), 우병훈(고신) 교수 등의 사람들은 마땅히 “나는 십자가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공덕이 더 해져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동적 순종 교리를 믿는 사람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능동적 순종 교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공덕이 전가됨으로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능동적 순종 교리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보장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이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최갑종 박사는 그리스도 또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칭의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신학적 아이디어를 원천 봉쇄해 버렸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은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의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갈 1:6; 5:4; 참조, 행 15:1).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주장을 거짓 복음으로 단정하면서(갈 1:7), 의와 구원은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갈 2:16; 3:1-9)” (26 페이지, 최갑종).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주장의 약점은, 창세기 2:17과 레위기 18:5이 율법 순종에 대한 순종에 영생의 약속을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오는 의를 그의 율법 순종을 통한 의와 십자가 순종을 통한 의로 양분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약화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성경의 뒷받침이 없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인 율법 순종 없이 십자가의 순종만으로는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단지 죄 용서를 통한 타락 전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게 할 뿐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있는 점입니다” (31 페이지, 최갑종).
 

2.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완성)'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 조항들 하나 하나를 모두 지키신 것으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아기 시절에 어머니 품에 안기어 성전에 가서 할례를 받으신 것 정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신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 가신 것은 자신이 초막절의 의미를 성취할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함이었지, 일반 백성들처럼 초막절 제사를 드리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7-39).

그리스도께서는 초막절이 의미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고자 성전에 가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신 것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역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율법의 명령과 반대의 행동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제사장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명령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의 시체일지라도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 레 21:1).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레 21:10,11).

그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율법의 명령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 거리낌없이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심지어 시체의 손을 잡으시기도 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3,44).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마 5:41,42).

모세의 율법은 피 흘리는 증상을 가진 여인과 어떤 모양으로든지 접촉하면 부정해졌으니 속히 자신을 정결케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그가 불결할 동안에는 그가 누웠던 자리도 다 부정하며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 그의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가 앉은 자리를 만지는 자도 다 그들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의 침상 위에나 그가 앉은 자리 위에 있는 것을 만지는 모든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더럽히지 말려니와” ( 레 15:19-23).

그러나 피 흘리는 병으로 오래 신음하는 한 여인이 고침 받기 위해 몰래 자신에게 다가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리스도는 어찌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속히 그 여인에게서 도망쳐 부정을 씻으라는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치유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선물하셨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 5:25-34).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고 또한 율법의 완성이 되시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모두 지키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셨고, 율법의 완성이 되시었다는 능동적 순종 교리 신봉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반역한 죄를 범한 자들은 모두 저주받고 죽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우리 대신 감당하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믿는 우리들에게 율법의 성취(완성)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최갑종 박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로마서 8:1-4에 있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과 율법의 완전한 성취(순종)를 결코 구분하거나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에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완전한 율법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수동적 순종과 완전한 능동적 순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1 페이지, 최갑종).
 

3. 구원 받은 자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짐

능동적 순종 교리를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가 사람 대신 율법 조항들에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힘써 지키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처럼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은 사도 바울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동시에 율법 조항들을 잘 지키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이단사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무율법주의자들이 되는 것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무율법주의란 단순히 율법을 무시한다는 주장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죄가 영향을 주지 못하니 아무렇게 살아도 가하다는 내용이 바로 무율법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오신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보혈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적용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임재하신 성령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속 사람이 변하고 새로워짐으로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답게 실질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서서히 시작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구약의 율법의 정신, 요구, 지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서 율법이 이루어지는 원리입니다. 성도에게서 시작되는 거룩한 삶의 변화는 구원받은 성도의 결단과 노력의 결실이 아닙니다.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더 이상 죄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옛사람으로 살지 않고 새사람으로 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놀랍게도 최갑종 박사도 이 점에 대해 동일하게 강조했습니다.

“8:4의 목적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가진 우리의 모양으로 보내어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목적이, 우리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의해 이미 성취가 된 그 율법(8:3)의 요구가 계속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9 페이지, 최갑종).

“그리고 가정법이 사용된 것은, 갈라디아서 6:2의 경우처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그를 믿는 신자들을 통해 재현되어야 합니다” (30 페이지, 최갑종).

이전 칭의 논쟁에서 최갑종 박사는 칭의에 대해 믿음으로 얻는 것과 행위로 얻는 것, 이 두 가지를 성경이 가르친다고 주장하여 필자와 많은 사람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능종적 순종에 대한 비슷한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최갑종 박사의 논문을 유심히 읽었습니다. 필자도 그 부분에 대해 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성취, 완성)를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셨고, 우리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속에서 율법의 성취가 계속 이루어진다는 최갑종 박사의 주장이 행위(삶)와 믿음, 두 가지로 말미암아 칭의가 이루어지고 유지된다는 주장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구원의 열매, 즉 거룩한 삶이 나타난다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맺는 말

이상은 부족한 필자가 최갑종 박사의 주장에 대해 기꺼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 수 없는 의아한 부분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전 아담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아담을 이미 그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아담은 이미 죽음이 없는 영생의 축복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충만한 영생은 하나님의 정한 시간에 따라 미래에 주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미래에 주어질 충만한 영생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것이지, 아담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21 페이지, 최갑종).

최갑종 박사는 태초의 아담이 죽음이 없는 영생의 축복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충만한 영생이 나중에, 하나님의 때에 주어졌을 것이라고 하였고, 아담에게 나중에 주어질 충만한 영생은 그 자신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필자가 최갑종 박사의 주장들에 대해 동의한 내용들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는 한 결코 죽음이 없는 육체와 영혼(‘생령’(창 2:7), ‘산 영’(고전 15:45)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말할 수 있는 신학 이론들입니다. 그런데 최갑종 박사는 태초의 아담이 영생의 축복을 부분적으로 누리는 상태였다고 했고, 나중에 주어질 충만한 영생이 따로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최갑종 박사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태초의 아담에게 나중에 오게 될 충만한 영생이 아담의 율법준수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능동적 순종파들과 조금 다르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가변적이고 임시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최갑종 박사의 아담 이해는 자신이 약점을 지적하는 능동적 순종 신학과 같은 계보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