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성도들은 오늘날 천주교에 대해 당혹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천주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천주교가 몇몇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이므로 배척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제 교회로써 대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이같은 상반된 주장의 사이에서 교회의 성도들은 천주교를 배척할 수도, 형제처럼 대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같은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왜 개신교가 천주교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양자 간의 분리를 초래한 신학적 상이점이 무엇이며 이같은 상이점들이 오늘날에는 해소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 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는 매우 종교적인 시대였다. 특히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3만 여명이 사는 쾰른이라는 조그마한 도시 안에 백여 개 이상의 교회와 기도처소가 있었고, 그리고 백 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감동을 주는 종교의식이 곳곳에서 성행했고 모든 주위가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성자와 성물의 숭배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거의 매 주 마다 어떤 성자를 기념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개혁 전야의 유럽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그 종교는 도덕적으로 교리적으로 잘못된 종교였다.

16세기의 교황들과 신부들은 돈과 여자와 권력에 탐닉하여 부당한 세금을 받아들였고 축첩제도까지 도입했으며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실시하면서 극도로 세속화 되어가고 있었다. 루터는 1520년에 쓴 「독일기독교 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당시 중세 교회의 타락상을 다음과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하면서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뽐내는 기독교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자가 어떤 왕이나 황제도 따라갈 수 없는 극치의 세속적 영화 속에서 사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 할 수가 없다. 황제가 일층 왕관을 쓰는데 교황은 삼층 왕관을 쓰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추기경들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 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도적놈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로마로 흘러가는 돈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교황청의 부패상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니 곧 성직매매, 술주정, 사기, 도적질, 강도질, 사치, 매춘행위,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적 그리스도가 다스렸다고 해도 이 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루터는 또한 1517년에 쓴「95개 조항」이라는 글에서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 교황청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성베드로 사원 신축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함은 불합리하다. 이 사원이 기독교가 공유하는 보화라고 하는 데는 조소를 보낸다. 이렇게 되다가는 로마의 모든 교회, 궁전, 성벽, 다리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 돈이 허비될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먼저 산 성전(Living temple)을 지어야할 것이다. 다음에는 마을의 교회를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의 성전을 지어야할 것이다. 독일 사람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갈 수 없지 않은가 교황의 수입은 오늘날 가장 부한 사람의 것보다 더 많은데 왜 그 돈으로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는가?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지을 바에는 차라리 베드로 성당을 재가 되게 버려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종교개혁자 루터).

로마 가톨릭의 타락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악덕으로 이름 높았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축첩제(clerical concubinage)를 교황청에 도입시키는 등 교황청을 극도로 부패케 했고 교황 자신은 첩을 두어 4명의 사생아를 가졌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의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사보나로라(Savonarola)는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통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자식을 못 쓰게 만들려면 성직자로 만들어라". 그 당시의 감독 리그의 헨리라는 사람은 많은 첩을 두었는데 22개월 동안 14명의 사생아를 만들었던 것을 자랑했다는 기록도 있다.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사냥과 예술을 즐기던 도박꾼"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도덕적 타락은 현대 가톨릭 역사가들도 인정할 정도이다.

신부들은 물질에 탐닉하여 점차 자신들의 영토를 넓혀나갔고 사생아들이 점점 늘어갈 때 한편에서는 신부의 독신주의를 포기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일어났다.

중세 로마교회의 교리 또한 비성경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성경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함께 항상 전통의 권위를 따랐다. 중세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와 믿음의 복음 대신 인간의 이성과 자연성에 기초한 자연주의 신학을 가르치면서 제도와 의식을 강조했다.

로마교회는 모든 계시와 진리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고 이성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연성과 선에 기초한다고 가르치며 인간의 자연성과 은혜와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이성은 우리를 계시의 영역으로 인도하고, 인간의 자연성은 우리를 은혜의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이성의 지위를 높였고 인간의 자연성의 지위를 높였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 신학은 결국 구원의 방편으로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의식, 제도, 그리고 고행, 선행 등 인 위적인 노력을 강조하게 되었다. 루터가 복음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루터 교구의 신자들은 루터의 설교에 만족하지 않고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비텐베르그 성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형편이었다.

그들이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비합리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면죄부의 증서였다.

오늘 날에도 가톨릭의 강한 힘은 그들의 전통에 있다고 주장한다. 개신교회는 성경이 신앙의 근본 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반면 그들은 교회전통에 있다고 주장하니 대화가 어렵게 되고 있다.

위와 같은 어두운 시대에 진리의 복음으로의 새로운 운동이 개신교의 탄생이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남서호 목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대표, Ph.D)이며, 총신 신대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Liberty University, Ashland University, Bethany University(Ph.D)에서 상담학을 전공했다.